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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9월 14일] '국내 전문가' 유감

강수미

대한민국 미술계는 지금 한창 호황이다. 9월 내내 그럴 것이다. 여기서 호황은 작품을 팔고 사는 미술시장 경기가 좋다는 뜻은 아니니 그것을 기대했던 이에게는 미안하다.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서울 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 대구사진비엔날레 등 굵직한 국제미술행사가 거의 전국에 걸쳐 연이어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새롭게 선보인 '올해의 작가상' 같은 주요 프로젝트와 김수자, 이불 등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의 중요 개인전이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된다는 의미에서 대한민국 미술계가 호황이라는 말이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비엔날레 붐이 일면서 이제 격년으로 한국의 9월은 축제처럼, 잔치처럼 좋은 의미의 예술 사건이 폭발하는 시기가 됐다. 해외 미술계의 관심과 국제 미술전문가들의 방문 또한 1년 중 이 시기에 가장 집중된다. 물론 그 효과와 의미도 크다. 재미있는 점은 이처럼 주요 미술행사들이 폭죽 터지듯 한 달 내내 연이어 이어지다보니 거기에 참석하는 소위 미술계 인사들의 만남이 대부분 겹친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에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개막식에서, 그 다음 날은 서울 한 상업 화랑의 한국 중견작가 개인전에서, 또 다음 날은 광주비엔날레 장에서, 곧 이어서는 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가 열리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같은 얼굴들을 계속 마주하는 식이다. 국내외 미술전문가 그룹이 확대, 다원화됐다고는 해도 한줌의 사람들이 좁게 네트워킹하면서 주요 일을 꾸려나가고 있는 현장이 국제 현대미술계임을 이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참여 당사자들은 이렇게 만남이 겹치고 대화가 깊어지는 와중에 상대방의 국가, 소속, 직위, 유명세를 떠나 각자의 진짜 실력을 알게 된다. 어떤 교수는 전문적인 대화가 시작되면 그럴듯한 얼굴로 침묵하거나 자신이 예전에 쓴 책 내용만 반복하고, 어떤 큐레이터는 국제 비엔날레 예술 감독까지 맡았음에도 자신이 기획한 전시를 두고 정보적인 차원의 말밖에 못한다. 

자기 얘기를 하기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학부는 물론 석ㆍ박사까지 국내에서만 공부한 나는 미학을 전공한 학자이자 미술평론가로 살면서 꽤 오래된 질문 하나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왜 나는 여기서 수준 미달인 어느 영미권 비평가의 난삽한 주장이 담긴 책을 골머리를 앓아가며 읽고 인용해야 하는가?', '한국의 문화예술기관과 학회에 초청받아 강연하는 저 영국 사립대의 교수이자 미술사학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몇 년 동안 똑같은 내용을 이곳에서 발표하는가? 누가 그에게 그런 중요한 기회를 주고, 이처럼 안하무인으로 낭비하도록 돕는가?' 같은 질문이다. 짧게 말해, 외국의 전문가라고 해서 모두가 동의할 실력이 있지도 않고, 최소한 학자 또는 비평가로서 지적으로 신뢰할만한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에게 발언권을 넘겨주고, 결과야 어떻든 무조건적으로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국내 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이들의 책이 대단한 이론이라도 담은 양 반복해서 번역되고, 그렇게 지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태만한 이들의 발표가 회전문처럼 국내에서 돌고 도는 데는 국내 전문가들의 능력 탓도 있다. 하지만 가령 우리 학계와 미술계가 국내 전문가들의 각종 성과를 그 값에 걸맞게 인정하고, 그것을 제대로 국내외 공론장에 노출시키기만 했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게 진행돼 왔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그에 합당한 실력을 가진 이들이 있다. 

짧은 만남을 통해서도 상대의 진면모를 파악하는 것이 전문가 세계다. 그러니 어떤 외국 전문가가 여기서 하나마나한 일들을 반복하지 않게 하려면, 우선 국내 전문가를 이유 없이 저평가하거나 역할을 축소시키는 비틀린 내부 역학부터 바꿔야 한다. 나아가 국내든 국외든 각자의 역량 및 성과를 생산적으로 교차 비교하고, 상호 수평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동료가, 기관이, 관련 공동체가 지지해주어야 한다.

- 한국일보 201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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