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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Ⅱ(4)동양화의 원리와 조선 전기의 회화

편집부


<문화유산을 보는 눈> ‘詩畵一致’ 바탕위에 개성적 화풍 창출

제임스 케일이 쓴 ‘중국회화사’에도 나오지만 동양화의 특징은 서양화보다 무려 700년이나 이른 10세기 무렵 인물화에서 산수화로, 채색화에서 수묵화로, 실용화에서 감상화로 주류가 바뀌었다는 것이에요. 이 때 ‘서화일치(書畵一致)’ 또는 ‘시화일치(詩畵一致)’라고 하는 독특한 개념도 들어와 서양미술을 봐왔던 미적 기준으로 동양미술을 이해하기 불가능해집니다.
특히 산수화와 수묵화가 합쳐진 수묵산수화는 동양화의 핵심 장르이면서도 그림에 대해 감상안을 갖고 싶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해왔지요. 종래 초상화나 벽화 등 기록화를 그릴 때 전부 광물성 안료를 사용해 청록채색을 진하게 썼는데, 수묵과 담채라고 하는 번지기 기법을 쓰게 되면서 지(紙)·필(筆)·묵(墨)이 같이 어우러지는 미적 효과까지 덧붙여 산수화가 발달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수정이 가능한 서양의 유화와는 달리 동양화는 일필로 그려야 하며 ‘기운생동(氣韻生動)’과 격조, 문기(文氣)가 있어야 한다는 독특한 평가기준이 등장합니다.
지·필·묵의 특성 때문에 ‘서(시)화일치’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소동파가 8세기 왕유의 그림을 평하면서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화중유시 시중유화·畵中有詩 詩中有畵)”라고 한 것이 이후 동양화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 되지요. 반면 서양미술사에서 감상화란 장르가 등장한 것은 17세기 들어와 네덜란드 화가들이 풍경화를 그리고 같은 시대에 정물화가 등장하면서부터예요. 이전에는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 교회당이나 수도원 식당 등에 벽화로 그린 기록화거나 모나리자 그림처럼 초상화가 있을 뿐이지요.
동양화가 중국에서 발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또다른 중요한 특징은 직업화가와 선비화가, 화원화가와 문인화가의 작업이 분리된 점입니다. 때때로 직업화가가 문인화가와 같은 풍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정반대의 경우도 나타나지만 엄연히 화원으로서 나아가는 길과 문인으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달라 북종화와 남종화란 서로 다른 미학을 갖게 됐지요. 이것이 17세기 명나라 동기창이 나와 ‘문인화인 남종화가 직업화가들인 화원이 그린 북종화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동양미학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 남종화 우위론을 내세우면서 문인화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며, 동양화가 현대에 들어와서도 사실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사의(寫意), 즉 뜻을 쏟아내 보여주는 그림으로 가게되는 배경이 됩니다.
중국미술사에서 동양화는 8세기 청록산수를 그렸던 화원화가인 이사훈과 왕유가 등장해 쌍벽을 이루면서 각각 북종화와 남종화의 조종이 되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한 점도 없습니다. 이보다 앞선 4~5세기 동진시대 고개지가 궁중의 사녀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그린 ‘여사잠도(女史箴圖)’가 영국박물관에 소장돼 있는데, 화장하는 여인의 얼굴이 거울 속에 비치게 구도를 잡은 솜씨가 굉장합니다.
산수화는 11세기 곽희가 등장하면서 양식의 통일이 이뤄지고 굉장히 철학적인 의미가 부여됩니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곽희의 ‘조춘도(早春圖)’나 곽희 부자가 지은 화론집인 ‘임천고치(林泉高致)’는 동양사람들의 자연 인식을 살필 수 있는 교본이에요. 봄·여름·가을·겨울 등 사계절에 따른 나무의 변화와 아침·점심·저녁 때 안개의 모습 등은 물론 산수화의 기본이 되는 고원(高遠)·심원(深遠)·평원(平遠)의 삼원법(三遠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원은 높고 험한 산악의 기세를 표현하기 위해 산 아래서 산 위를 올려다보는 시각으로, 심원은 앞뒤로 겹겹이 들어선 산악의 깊은 형세를 표현하기 위해 산의 앞에서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산의 뒤쪽을 조감하듯이, 평원은 평탄하고 광활한 공간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가까운 산에서 먼 산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트인 공간으로 시선이 뻗어나가도록 그리는 방법을 각각 말하지요. 산수화를 그릴 때 한 화면 속에 삼원법을 다 집어넣은 곽희의 그림은 소실점이 있는 사실주의와는 어긋나지만 전체 속에서 산수가 갖고 있는 장엄한 모습을 모두 보여줘요.
이밖에 임금과 신하의 관계처럼 산수화에도 주봉을 중심으로 다른 봉우리들을 배치하는 봉건적 위계질서를 산수화에 반영한 것도 곽희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그러나 사람이 냇가를 걸어가는 모습 등이 개미만하게 표현돼 있는 그의 ‘조춘도’를 보면 거룩한 자연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가 그림 속의 돌멩이나 폭포, 나무보다 결코 더 귀한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바로 얼마 뒤 북송의 휘종황제가 그린 ‘문월도’나 ‘송하관월도’처럼 달을 보고 손짓하는 선비가 나오는 그림에서 보이는 인간이 사용하고 자기 낭만을 반영하는 자연을 그리는 태도와 너무도 달라요. 이 같이 자연의 의미가 바뀌면서 남송 대에 들어오면 화면의 절반 내지 3분의 1을 여백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강조되고 심한 경우 강변에서 낚시하는 모습을 일각(一角)구도로 그린 마원의 ‘한강조어도’처럼 여백이 전체 화면의 5분의 4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북송 때 미불이 창안한 여름 산수를 그릴 때 점을 많이 쓰는 미점법(米點法)이나 남송 때 양해가 붓으로 몇가닥의 선을 그려 이태백을 표현한 백묘 또는 감필법, 파묵(破墨)·발묵법(潑墨法), 몰골법(沒骨法)등 동양화의 각종 기법들이 이때부터 하나씩 형성되기 시작하지요.
원나라 때 조맹부는 자연을 이웃집 동산처럼 친숙하게 화면에 끌어들여 표현했어요. 이처럼 위대한 존재인 자연을 그린 산수에서 서정적인 산수로, 다시 조맹부에 의해 친숙한 자연으로 바뀐 산수의 표현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 강남지방에 은거한 황공망·예찬 등 원말 사대가들의 문인화였습니다. 먼 산과 앞 강, 나무, 선비가 사는 집이나 인물 등 18세기 우리나라에서 그려진 남종문인화의 전형이 이 때 형성됐지요. 명나라에 들어오면 대진 등 저장(浙江)성 출신들이 주축이 된 ‘먹을 강하게 쓰고 자연을 단지 인물의 배경으로 사용한’ 절파(浙派)가 등장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 역전되지만 심주 등 오파(吳派)의 문인화가들로부터 미친사람 그림 같다고 해서 ‘광태사학(狂態邪學)’이란 비판을 받고 동기창에 의해 남종화우위론이 나오면서 쇠퇴하게 됩니다. 17∼18세기에 오면 사왕오운(四王吳줩)으로 불리는 직업화가들까지 모두 문인화를 지향하게 되는데,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여행하며 쌓아놨던 교양을 바탕으로 격조높은 정신세계가 우러나온 왕유와 곽희, 황공망, 동기창 등의 문인화가에 비해 직업화가들은 그와 같은 학식이 없이 남종화를 지향하다 보니 그저 형식만 따라가는 것이 돼버리고 말았어요. 19세기 조선에서 박규수가 도화서 화원까지 문인화를 그리는 세태를 비평한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반면 명나라 서위나 주원장의 후손으로 청나라 때 팔대산인(八大山人)이란 호로 활약한 주탑, 같은 시대 상업도시 양주(揚州)에서 활약한 8인의 화가를 지칭하는 양주팔괴(揚州八怪)과 석도 등은 주류 문인화와는 다른 개성을 발산한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국내로 돌아와 고려말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천산대렵도’ 잔편은 ‘화원별집’이란 궁중 도화서 소장 화첩에 있던 것으로 조선시대 회화 중 18세기 이전 그림들은 대개 이를 통해 전해진 것들이 많습니다. 일본 덴리(天理)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과 같이 꿈속에서 복숭아꽃밭을 거닐었던 일을 안견에게 얘기해 그리게 한 것이지요. 곽희풍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과 안평대군의 발문 및 시, 박팽년·신숙주 등의 시문까지 포함해 전부 펼쳐놓으면 10m 정도 됩니다. 비단 속에 먹이 스며들어간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견의 그림은 여러 개 전하고 있지만 어떤 그림도 이런 필력을 보여주지 못해 ‘전 안견(傳 安堅)’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같은 시대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는 중국 절파화풍의 그림과 똑같습니다. 명나라 절파보다 출현시기가 빠르고 17세기 중국 미술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 실린 도상과 같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중국 사신을 통해 다양한 정보의 교류가 있었고 이 책에 실린 도상이 10세기부터 쭉 내려온 것들을 모아놓은 점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이 같은 그림이 나오는게 가능하다고 봐요.
일본 교토 다이겐지(大源寺) 스님 손카이(尊海)가 1539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선물로 받아간 병풍은 ‘소상팔경도’ 중 늦가을 동정호에 둥근 달이 뜬 ‘동정추월(洞庭秋月)’과 늦겨울 꽁꽁 언 겨울산하인 ‘강천모설(江天暮雪)’을 그린 것입니다. 중국 후난(湖南)성 둥팅(洞庭)호 남쪽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이 만나는 아름다운 경치를 사시팔경(四時八景)으로 묘사한 ‘소상팔경도’는 조선초기부터 많이 그려졌지요. 재일교포 고(故)김용두씨가 진주박물관에 기증한 것 중에도 ‘소상팔경도’ 8폭의 그림이 있습니다. 남송풍의 그림에 시정적인 것을 집어넣고 곽희풍의 필치가 결합된 이런 그림들을 통해 성리학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동양화의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하나하나 자기화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5세기부터 1550년 무렵까지의 그림은 우리의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대단히 심심하고 변화가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겸재 정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조광조의 제자인 양팽손의 그림이나 1540년(중종 35년) 이황 등 미원(薇垣·사간원)에 근무한 관리들이 야외에서 연 계모임 광경을 그린 ‘미원계회도’, ‘호조낭관계회도’ 등도 이 당시 대표작입니다. 16세기초 중국 마원의 화풍을 닮은 노비출신 이상좌의 ‘송하보월도’는 소나무 아래를 걸어가면서 달을 보는 광경을 그린 훌륭한 그림이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제 생각에 전남 영암 도갑사에 있다가 왜구가 훔쳐간 ‘관음32응신도’를 그린 이자실이 이상좌일 가능성이 80% 정도는 됩니다. 15세기 산수화 전통을 불화형식으로 그린 것이지요. 강아지 그림에 있어선 오늘날까지 조선 중종 때 이암을 능가하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정숙한 여인의 기품과 함께 우리 정서를 표백해주는 느낌을 주지요. 1550년을 넘어 조선중기가 되면 절파화풍이 본격적으로 도입됩니다. ‘동자견려도’와 ‘한림제설도’등을 그린 양송당 김시를 효시로 이숭효·이흥효·이경윤 등이 나와 인간이 자연보다 앞서는 절파화풍이 유행하고 임진왜란으로 제동이 걸리지만 개성적인 그림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 정리〓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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