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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진정한 쓸모

이선영

미술의 진정한 쓸모
이선영│미술평론가


1. 너무나 바쁜 한국의 미술가들
현대사회에서 미술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많다. 우선 시간의 부족이다. 작업하느라 바쁜 것은 논외로 치고, 작업 이외에 신경 써야할 일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이 글은 한국 사회에서 작가는 왜 이렇게 바쁜 존재가 되었나 하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바쁨은 단순히 ‘열심히 한다’의 의미가 아니라, 억압적인 체계의 압력에 순응한 자업자득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당췌 이렇게들 바빠서 미술에 몸담고 있는 사람의 최종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작업이란 것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대개 이러한 바쁨은 작업의 목적이 아니라,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 및 도구를 확보하기 위한 바쁨이기 때문에, 결국 작업의 본말이 전도되고 만다. 수단을 쟁취하기 위한 겹겹의 장치들은 유형, 무형의 상품 생산이라는 사회적 생산의 틀과 맞물려 있다.
미술에 관심이 없는 대중, 순수 예술에 대한 무관심을 부추키는 우리의 사회의 풍토에 대해서는 일단 괄호를 치자. 우리는 미술인들끼리라도 얼마나 서로 간에 독자나 관람자가 되어주는가. 서로의 작업에 대해 제대로 보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있는가. 작품 수용 및 소통을 넘어 생산의 입장에서 본다면, 작가란 작품의 영감을 받기 위해, 그리고 그 영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나름대로 한가하게 고여있는 시간이 필요한 존재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을 보면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바쁨은 소위 잘나가는 작가와 그렇지 않는 작가를 가리지 않는다. 그 와중에 이 모든 바쁨의 최종적인 결집체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전시회들이 열리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사실 그것은 미술의 시작부터 예견되어 있다. 매우 세속적인 코스를 언급해 보자면, 예능 과목은 다른 학과목에 비교해서 엄청난 학원비와 학비를 들이고 미술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다. 작가의 생활의 근거지가 되는 미술대학 주변에 어른거리기 위해서 유학을 비롯하여 끝없는 학위취득의 길에 올라야 한다. 지나고나서 하는 말이지만, 뭔가 일상의 질서와는 다른, 미지의 세계로서의 예술이라는 최초의 환상적인 기대가 실제와의 만남을 끝없이 유보시킨 채, 학교에서 시작해서 학교로 끝나는 듯한 그 기나긴 여정으로 대치되는 과정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이 질서를 내면화하고 최상으로 잘 수행한 경우에 그는 후배나 후학을 복제하는 재생산 노동에 투입되어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과정들이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맞추어 경력을 관리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생산된 작품의 질을 따지고 볼 때 작가에게 있어 작업과 학위취득과의 관계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끝없는 학위취득의 과정이 작업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기야 작가로서 대성하기 위해 학벌 관리는 시작에 불과하다. 한번 사회의 눈높이에 맞추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사회와 고립되어 있는 괴팍한 인물이라는, 작가에 대한 근대적 이미지와 달리, 오늘날의 작가는 그림도 잘그려야 하고 외국어도 잘해야 하고 작가 주변을 에워싼 기자, 평론가, 큐레이터, 동료 및 선후배 등등과 인간관계도 좋아야 하고, 미술관이나 학교는 물론 관청이나 매체와의 관계도 무난해야 한다. 작업을 지속시키고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들이 어느덧 목적이 된다.
수단은 비용을 지출하거나 이익을 낳는 생산품이 되어 사회의 한자리를 차지하지만, 정작 예술의 목적은 모호해진다. 이러한 의례를 잘 통과한 작가일수록 타인에게도 그것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자기도 그만큼 했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착취하는 관계로 들어서게 된다. 쓴 만큼, 투자한 만큼 회수할 수 있다는 논리야말로 체제의 가장 달콤한 유혹 아닌가. 가령 가장 시간이 널널해 보이는 미술대학 학생들도 바쁘기 그지 없는데, 그들은 자랑스러운 미술대학의 합격생으로서 살아있는 모범이 되어 미술학원의 강사로 일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에서 미술대학은 미술의 시작과 끝을 조율하면서 기존 질서가 미술인에게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기에 무리가 없다.

2. 현재 미술대학은 작가를 길러내는데 적합한 제도인가
한국에서 작가가 되기위해 가장 먼저 거쳐가야 하는 코스는 미술대학이다. 대학도 많고 미술대학 역시 많다. 많은 학생들을 뽑아 등록금만 챙기고 방치하다시피하고 강한 의지와 조건, 그리고 운이 맞아 떨어지는 몇몇만 거의 스스로의 힘에 의해 작가로 살아남는다. 굳이 미술대학의 존재 의미를 찾자면, 같은 꿈을 지닌 젊은이들을 한데 모아 서로 교감하는 장을 마련해주는 정도일 것이다. 사실 미술대학만 ‘백수 탱크’, 또는 다른 길을 가기 위한 일시적인 정거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대학, 심지어는 전문 분야라고 알려진 자연과학 학도들 조차 자신의 전공을 살리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어차피 일은 일터에서 배워야 한다. 고용의 기회는 좁고 해고는 쉽고, 실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훈련 내지 준비를 개인에게 모두 떠넘기는 구조가 정의롭지 못할 뿐이다.
학생들마저 바쁘게 된 것은 재학기간 동안 학점 이수 외에 따로 개별적으로 준비해야하는 일들, 가령 국제화 시대에 필수 코스가 된 어학연수나 희망 직업에 관련된 학원수강, 기업의 인턴 활동같은 것들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휴학과 재학을 반복하면서 학창시절을 고무줄처럼 늘이는 것이 관행이 되다시피 했다. 반듯한 직장을 구하고 아파트사고 차도사고 하는 등의 정해진 미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경쟁에서, 학창시절은 잠시 유예된 시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유예기간을 더 늘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서 상급코스의 진학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사실 예술가들은 자신에 대해 많이 투자해야 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보고, 토론하고 두루 만나고 여기저기 다녀봐야 한다. 그러나 이 투자는 단순한 상품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작업 목적과 보다 긴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의 작업을 위해 써야할 시간과 돈이라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선택을 해야한다면, 이미 상품화되어 있는 것, 가령 틀에 박힌 코스를 밟는 것 보다는 관심있고 필요한 분야에 대한 자기학습이나 선택적인 수강, 여행같은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작가가 박사코스를 밟거나 유학을 한 것에 못지 않은, 작업과 관련된 자기 학습이나 연구의 제시, 그리고 어느 기간 동안 학교를 다닌 대신 어디를 여행해서 무엇을 보고 느꼈으며 그것이 자신의 작품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같은 좀더 본질적인 경험이 그 작가의 ‘경력’에 포함될 수는 없는 것일까. 다른 분야가 그렇게 못하더라도 예술은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미술대학은 한곳으로 몰아치는 쥐떼같은 경쟁 대열에 자신을 위치시키지 못해서 안달이다.
그래서 미대입시는 결코 그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입시가 바뀌지 않으면 미술에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점은 미술인 누구나 느끼는 문제의식이지만, 이 질곡의 시스템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미술대학 주변을 에워싸면서 나날이 높아지는 학원 빌딩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학원이든 대학이든, 예술에 대한 교육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차피 작가는 소수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술이 현행의 학원-대학의 시스템을 통해 배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택된’ 소수의 인생이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의 길을 선택한 자의 운명일 것이다. 작가로 나설 소수 이외의 나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종합적이고 심미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들이 결국 예술 및 예술가들을 지지해줄 기반도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미술교육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릴수록 너도나도 예술교육에 대한 투자를 하다가 서서히 거품은 빠지고 정작 예술의 생산자인 전문 작가에 대해서는 냉담해진다. 대중들은 미술을 보고 즐기는 법을 모른다. 교육열이 세계 어느 곳보다도 높은 한국에서 학교를 통해 교육은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미술은 내신 성적에서 제외되어 해도되고 안해도 되는 뒤로 제껴진 과목이 되고 있으며, 대학 구조조정 과정에서 취업률 낮은 학과로 찍혀 학과 통폐합 등의 일방적 폭력에 노출될 날도 머지 않았다. 지방의 어느 미술대학 교수는 고된 학과 수업이 끝나고 야간에 애니메이션 학원에 다닌다고 한다. 미술학과가 어느날 갑자기 순수미술보다 경제성이 높은 만화과로 바뀌었고, 졸지에 만화과 교수로 변신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작업을 할만한 역량과 능력이 있는 소수가 작가로 나서고, 이를 뒷받침할 재생산 시스템은 더욱 전문화되어야 한다. 적어도 미술이론은 미술사 및 미학 분야로 전문교육을 받은 교원이 담당해야 하고, 일반학생을 위한 교양으로서의 미술교육도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신문같은 대중매체에 미술비평 칼럼 하나를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물론 그것은 대중은 커녕 미술인들과의 소통능력도 확보하지 못한 비평의 무능력 탓도 크다. 다행히 인터넷 매체 등으로 언로가 뚫려 지금은 말못해서 죽은 귀신은 없지만, 단순한 전시 소식, 미술계 화제 등을 다루는 식의 미술 기사에 한정된 미술담론은 전문성과 깊이를 확보하는데 한계가 있다.
미술이 전문화되기 위해서는 미술대학이 아니라, 전시나 작품에 대한 담론 중심으로 흘러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작품이든 담론이든 사회에 의미있는 화두를 던지지 못한 채 사회의 잉여 에너지에 기대는 것, 그리고 예술이란 존재의 당위성만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것은 시효가 지났다. 그러나 순수예술은 단지 무용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만화나 영화, 게임같은 응용 분야에서 떼돈은 벌어들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쓸모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생산중심주의에 맞서는 상징적인 기능을 통해서이다.

3. 생산중심주의에 맞서는 예술
앨버트 허쉬먼은 [열정과 이해관계]에서 인간 고유의 열정이 억압되고 투명한 이해관계를 중시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단계에서 비로소 일어난 것이라고 지적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충동과 어떤 성향 등을 억누르고 좀더 단순하고 예측가능한 1차원적인 인간성을 만들어내리라고 기대되었다.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세계의 특성이란 예측성과 불변성이다. 그러나 본래 ‘interest’라는 단어는 인간의 전반적인 열망을 의미하였으며, 특히 이러한 열망을 추구함에 있어 숙고와 계산의 요소를 지칭하였다. 이점에서 본다면 열망이라는 요소는 이해관계에 의해 완전히 억압될 수 없다. 예술은 이러한 열망이 고이고 그 순수한 표현을 얻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력을 해방시켰지만, 인간을 해방시킨 것은 아니다. 생산력은 자연과 인간을 객관화, 도구화시키며 경제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재단한다. 그것은 경제적 합리주의라는 하나의 모델로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방식을 제한하는 것이다. 생산중심주의는 모든 것을 조작 대상으로 만들고,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을 생산력에만 한정한다.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은 체제에서 가혹하게 배제된다. 예술도 이러한 배제의 압력에 놓여있다. 예술이 생산중심주의라는 사회의 논리를 내면화하기 시작하면 그 존재자체가 비참해진다. 차라리 예술은 억압된 질서의 내면화한 결과는 노동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고,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게으름을 찬양한 라파르그는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들의 노동계급은 노동에 대한 격정적 사랑이라는 기이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력 혁명을 통해 물질적 부를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시간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장시간의 노동이 생산성을 더 높여주는 것도 아니다. 라파르그에 따르면 하루에 3시간만 노동해도 사회가 유지되는데는 이상이 없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많이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생산중심주의는 이를 정당화한다. 같은 맥락에서 보드리야르는 예술은 자본주의의 착취 뿐 아니라, 현실원칙과 합리성의 원칙으로서 자명한 기준이 되었던 노동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희소성을 산출하는 체계를 통해 노동과 생산의 의미를 연장시킨다. 체계는 축적과 진보, 성장, 생산 따위에만 의미를 부여한다. 생산은 가치, 에너지, 욕망 같은 유혹의 차원을 조절하여 힘의 관계라는 유일한 구조 위에 놓는다.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는 엄밀하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항상 낭비하고 탕진하고 소모하고 소비하였는데, 개인이나 사회가 생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초과분과 여분을 소비할 때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소비는 소모, 즉 순수하고 단순한 파괴에까지 이를 수 있는데, 그 때에는 특별한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 낭비는 항상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비축품을 태워버리게 하고 자신의 생존조건을 비합리적 행동에 의해 위태롭게 하는 일종의 광기, 착란, 본능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낭비는 결코 비합리적인 찌꺼기가 아니라, 긍정적인 기능을 지니면서 보다 높은 사회적 기능을 가진다. 예술은 보통 낭비, 즉 필요, 축적 및 계산에 근거를 둔 경제학과 반대되는 위치에 놓인다. 예술은 생산과 경제의 영역을 벗어난 상징적교환의 장이다. 상징적 교환은 모든 잉여와 생산을 배제한다. 여기에서 풍요의 본질은 희소성이 아니라 교환 속에 있다. 희소성은 오직 재산축적에 대한 직선적인 전망 속에서만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상징적 교환을 주장한 바타이유도 인간이 자연의 총체성을 벗어나 추상계에 진입하면서 세계가 빈곤해 졌다고 비판한다. 노동, 과학, 그리고 관료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 우리를 추상적 개체로 변화시키는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는 가장 빈곤하고 종속적인 세계, 유익한 사물의 개별화된 세계, 노동만이 규칙이고 오직 그것이 지배하는 세계, 각자 기계화된 질서 속에서 자기자리만을 지켜야 하는 세계이다. 상징적 사회관계는 주고 받는 끝없는 순환이다. 사회에서 축적된 것, 가령 교환되지 않는 것, 상실되지 않는 것, 파괴되지 않는 것이 상호성을 파괴하고 권력을 나타나게 할 위험이 있을 경우 과잉 생산물의 폐기와 반생산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반면에 정치경제학이 지배하는 현대사회는 소유와 무한한 축적의 과정이다. 즉 생산된 것은 더 이상 상징적으로 교환되지 않으며, 상징적으로 교환되지 않은 것(상품)은 권력과 착취의 사회관계를 유지한다. 강박적 생산과 축적은 오늘날 대규모 전쟁과같은 파국적인 상태로 소모되곤 한다.
그러나 예술은 이러한 실제적인 죽음의 충동에 대항하여 죽음에 가까운 열정으로 댓가없는 사치를 행하면서 상징적인 도전을 행한다. 동질적으로 분할된 추상적 생산의 시간과 단절하는 절대적 시간, 그 절정의 순간을 지속하고자 하는 상징적 교환은 현대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저지하는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강조했듯, 현대사회의 구조적 병폐는 사회가 노동시간에 의해 지배되는 경쟁 체제로부터, 즉 생산력과 착취와 이윤의 체계로부터 물음과 대답이 조작하는 거대한 놀이로, 모든 가치들의 조작할 수 있는 기호에 따라 변화하고 교환되는 거대한 결합관계로 이행함으로서 가능하다. 예술의 진정한 생산성은 생산중심주의 사회의 끄트머리에 붙어서 바쁘게 경주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중심주의에 내재해 있는 억압과 폭력성을 상징적 교환을 통해 해소시킨다는 점에서 진정한 ‘쓸모’를 가진다.

문화예술 2005.7월호 '문화현상읽기-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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