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재삼과 임만혁의 목탄화_'너머'의 신화와 외딴 침묵

김종길

글 ㅣ 김종길
이번 호부터 「작가대작가」는 흔히 미술의 기초재료라 일컫는 연필, 목탄, 펜, 콩테, 수채를 주 재료로 한 작가들을 다룬다. 이것들은 미술장르에서 마치 ‘하위 생산품’이라는 식으로 천대를 받으며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수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 기획은 그러한 재료 혹은 작품을 격상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애당초 하위적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어서 여기서는 이 재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름진 유화의 화려함이 담지 못한 단색조의 내밀한 진정성, 그리고 색채의 소박과 투명의 중첩성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몸의 소멸 목탄木炭은 숯charcoal이다. 숯은 공기를 차단한 곳에 나무를 넣어 태운 것이다. 즉, 숨 막힌 공간에서 제 몸을 불사른 후 검은 뼈가 남은 것이 숯이요, 목탄인 셈이다. 재질로서 이러한 성질은 작가에게 상상의 기제로 작동한다. 검은 뼈는 ‘화畵’를 탄생시키며 서서히 소멸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열반涅槃이란 반드시 ‘수행자’라는 주어가 따라 붙어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되지만, 본래 그것은 ‘불어서 끄는 것’ 혹은 ‘불어서 꺼진 상태’를 말한다. 고요함의 극치인 적정寂靜에 이르는 최상의 안락은 바람이 불을 끄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야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의 몸은 죽어 화장되고 명징한 사리를 남긴다. 어쩌면 목탄이란 재료는 나무의 사리가 아닐까. 즉, 나무에 내재된 생육의 번뇌가 불꽃으로 화하고 남긴 ‘육체의 투명성’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탄화는 목탄이라는 육체의 검은 투명성이 남긴 흔적이다.
숲을 주제로 한 이재삼의 회화는 목탄만이 가질 수 있는 짙은 어둠의 농밀함을 극사실성의 구축 뒤에 숨겨 놓는 이중전략을 사용한다. 사물은 이 어둠속에서 떠오른 하나의 표정이다. 또한 소리이며, 긴 역사의 시간이 침적된 풍경이다. 수없이 많은 목탄의 몸이 부스러지며 남긴 기억이다. 임만혁의 인물들은 목탄처럼 딱딱한 고형질의 몸을 드러낸다. 육체의 풍요를 상실한 이들은 실존이라는 딜레마에서 헤엄치는 현대인이다. 불안이 가득한 외딴 방에 결박된 채 시선의 초점을 잃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설령 그들이 한 가족일지라도.
지독히 세밀한 저 풍경 뒤 이재삼이 2004년과 2005년에 발표한 <저 너머> 연작은 대나무, 연잎, 소나무, 옥수수,그리고 이름 모를 숲의 풍경 등이다. 가히 대작大作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이 작품들은 가로 길이가 6~7미터에 이른다. 보통 전시장에선 그림을 걸 수조차 없을 정도로 크다.‘미술관용’이라기보다는 분명 작가의 숨은 의도가 있음이 분명한데, 마침 이영미술관에 전시되어 그 의도를 파악할 기회가 있었다.
일반인의 키를 기준으로 해도 높이가 2미터를 웃도는 작품 앞에 서면, 작품은 감상의 대상이 아닌 숲이라는 실체로 시야를 압도한다. 그림의 한쪽 끝에서 시작해 한 동안 그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느낌을 체험해야 비로소 ‘감상’이 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대나무 숲이 되고, 연잎 호수가 되며, 소나무 숲, 옥수수 밭으로 변한다. 관객은 그 사이를 오가며 숲이 뿜어내는 내밀한 풍경의 깊이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순간 숲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도대체 숲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그의 그림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풍경의 사실성을 담아내는 ‘재현’에 충실하다. 진짜 같은 그림이 아니라 풍경의 리얼리티가 최대한으로 살아나는 쪽에 비중을 둔단 얘기다. 다시말해 사물 하나하나의 표정과 그 표정의 군집이 역동에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군집의 숲은‘영혼’의 울림조차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은 개념이나 관념에 의해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엄청난 숙련을 필요로 하며, 몸 전체가 숙련으로 단련되어 어느 순간 손이라는 붓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기억이며, 손의 기억이다. 수천, 수만 번의 그음과 관찰에서 비롯되는 기억의체계이다.
“초기엔 먹과 목탄을 함께 사용했어요. 그러다 점차 목탄으로 기울었죠. 먹에 대한 대안이라고 할까.저에겐 목탄이 잘 맞았습니다. 저는 목탄을 ‘검묵’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드로잉 재료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 먹이죠. 사물마다 고유한 형상이 있습니다. 사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이, 그 고유한 형상의 바깥(너머)이 만들어 내는 빈 공간입니다. 그 어둠, 그 여백,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 비경이 있습니다. 일종의 ‘초월’일 것입니다. 그림엔 보이지 않지만 달빛이 있어요. 숲은 신령한 존재로 드러나는데, 달의 빛, 달의 소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술가’로 불려지기보다 장인이 사라진 시대의 ‘예술장인’이고 싶습니다. 예술은 일종의 수행과정이기 때문이죠. 큰 산을 몸 안에 품고 간다면 굳이 ‘예술’을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는 사물을 그려나가면서 그의 몸이 기억한 사물의 정신을 포착해 낸다. 사물의 외연을 구륵법으로 소묘한 뒤 군데군데 찾아가며 풍경의 부분들을 성취해 간다. 부분에서 사물은 뚜렷한 향내를 풍기며 얼쑤얼쑤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의 몸이 사물에 흡입되고 사물은 몸의 일부가 된다. 순간 그는 사물의풍경 속으로 들어가 헤엄치며 숨통을 틔운다. 바람이 일고,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녹아 흐른다. 고대로부터 사람의 몸에 침적된 서사가 신화로 부활하며 ‘인류의 씨앗’을 쏟아낸다. 이랑을 따라 씨를 뿌리듯 사물과 사물 사이의 어둠에 씨앗을 심는다. 그렇다. 그는 지독히 세밀한 사물의 외연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어둠을 보는 것이다. 저 보이지 않은 심연의 이랑에서 숲이 토해내는 생명을 보는 것이다. 니르바나에 이른 목탄의 투명한 육체의 소멸이 깨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저 외딴 침묵일 뿐 장 그르니에는 『섬』에서 “나는 오로지 나만의 삶을 갖는다는 즐거움을 위하여 별 것 아닌 행동들을 숨기기도 한다. 비밀스러운 삶. 고독한 삶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삶 말이다”라고 말하는데, 임만혁의 삶이 마치 그와 같다면, 그의 작품 속 인물들도 그런 ‘나만의 삶’에 경도되어 있는 듯하며, 결코 비밀스럽지 않은 ‘비밀스런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주문진 바닷가 외딴 방에서 베르나르 뷔페와 에곤 쉴레,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남긴 현대인의 ‘실존’을 상기할 수 있다는건 작가의 삶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일정 부분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발현된 사르트르 류의 실존철학이 위 세 작가의 ‘실존’ 경향이었다면, 임만혁의 인물들은 오롯이 그를 둘러싼 주변, 즉 ‘현재적 상황’에서 건져 올려진다. 그러니까 임만혁은 그들에게서 인물 형상과 심리의 표현기법을 차용하지만, 전쟁과 죽음의 공포가 아닌 21세기의 심리적 ‘공황’ 상태를 겪고 있는 현대인의 ‘실존’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실존’이 세 작가들의 ‘실존’과 동일한 맥락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그는 서양화로 시작해 한국화로 이행했는데, 이로부터 그의 독특한 선線이 나온다. 그러니까 칠해야 하는 서구의 붓과 그어야 하는 동양의 붓을 동시에 습득했단 얘기다. 또한 서구엔 없는 동양의 준법을터득했기에 그의 작품에서는 칠하고 긋고 묘사한 선의 활력이 매력적이다. 반면 그러한 선의 활력은 목탄이라는 재질의 특수성이 만들어내는 건칠 느낌으로 인해 인물의 형상을 건조하게 드러낸다.
그의 인물들에서 풍부하게 묘사되는 것은 언제나 얼굴이다. 얼굴은 몸의 비례를 심하게 왜곡시켜 신체중 가장 크게 그려지고 있는데, 눈과 코, 입, 주름, 귀, 헤어스타일 등 얼굴의 세부 표정은 적나라할 정도로 세심하다. 감거나 퀭하게 떠서 어딘가를 주시하는 눈은 공포, 비애, 소외 등의 양상을 보이나 대부분 ‘관계’ 밖을 향해 있다. 혼자 혹은 여럿이 있는 그림일지라도 최소한의 ‘소통’도 차단된 채 저마다 고립되어 있단 얘기다.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명암으로 빚은 생채기들은 주름과 뒤섞여한 인물이 간직한 내면심리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가늘고 긴 다리, 뼈마디가 앙상하게 튀어 오른 손, 검은 넥타이는 그가 상정하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인물들에게서 무언가 심리적인 것을 끌어내고 싶었어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도 있구요. 그래서 일부러 양복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가족군상은 주변의 친구, 동생들이에요. 다들잘 살아가는 것 같지만, ‘소통’이 막혀 있단 생각입니다. 현실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 있어요. 그래서 시선에 초점이 없는 것입니다. 가끔 그들에게서 ‘기분 나쁜 냄새’가 나요. 사회가, 세상이 그들을 냄새 나는 인간들로 만든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인물 하나하나를 그릴 때혼자일 수밖에 없는 그들을 생각합니다. ‘관계’를 생각하는데, 저는 이들에게서 장 그르니에가 말한‘닫힌 공간 속의 긴 희망’같은 걸 꿈꿉니다.”


이러한 인물들은 화면 어딘가에 앉아 있거나 기대 있으며, 늘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방’으로 주시될 수 있는 이곳은 마치 잡다한 소품이 제거된채 몇 개의 물건만으로 꾸며 놓은 연극무대 같다. 인물들은이 무대에서 대본 없이 떠도는망령들처럼 유영하고 있다. 이는 겉으론 아무런 일 없다는 듯 강제당하고 있는 극도의 불안심리이다. 불안심리 앞에 ‘국민사회’, ‘미래사회’, ‘기업의’, ‘농가의’, ‘금융시장,’ ‘외환시장’, ‘경제주체의’, ‘가족의’ 등과 같은 접두어를 붙여 보라! 현대인에게 있어 삶은 곧 불안심리이다. 그래서 개개인들은 그들스스로 고립되어 ‘섬’이 된다. 억압적 기제가 어디에도 없는 이 억압의 실체는 대중을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몸의 기억은 몸의 언어로 드러난다. 몸의 기억은 모든 생애의 기억이지만, 희로애락의 깊은 파동에 의해 각인된 부분이 많을 것이다. 조광제는 “몸은 정신 혹은 영혼이 타고 다니면서 통제하고 지시하고 관리하는 수레와 같은 대상이 아니라, 정신 혹은 영혼이 마치 꽃이나 열매인 양 피어나고 달려 있는 나무와 같은 것”이라 말한다. 두 작가가 보여주는 목탄화는 몸에서 피어난 정신 혹은 영혼의 꽃이며 열매에 다름 아니다. 그 언어는 사뭇 다르지만 그들 자신의 몸에서 발아한 몸의 실체로서 ‘자아의 신화’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아로부터 다시 사회와 역사의 몸으로 눈길을 돌린다. 이재삼은 최근 수원의 방화수류정 풍경을 완성했으며, 임만혁은 강릉단오제에서 축제에 깃들어 있는 ‘민중’이라는 실체의 신화를 엿보고 있다. ‘현대인’이라는 주체에서 보다 거시적 주체로서의 민중으로 그 시야를 넓히려는 것이다. 확언컨대 목탄의 소멸이 만들어내는 그 투명한 육체들에서 진향의 꽃이 만발하리라!
김종길|미술평론가. 1968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월간 『미술세계』를 통해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 연구를 하면서 월간 『미술세계』에 「작품 속 작가의 내면을 찾아」와 월간 『space』에 「환경미술」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본지 전문위원이다.
김민곤|프리랜서 사진가. 1967년생이며 미술전문지에서 10여 년 동안 사진작업을 해왔다. 현재 『미술세계』 사진팀장 겸 Mogi스튜디오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출처-기전문화예술 2005.9ㆍ10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