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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예술 속의 샤머니즘 “비디오에 한번 찍히면 죽을 수가 없다”

김홍희

글 ㅣ 김홍희


한국의 ‘백남준’은 한국을 떠나면서 세계적인 ‘남준팩’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세계적인 남준팩이된 이면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성, 아시아성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함께 그것을 작품에 녹여내는 미학적·조형적 탐구의지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 고국을 떠나 홍콩, 일본,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하고 국제적인 예술활동으로 세계인이 된 그에게 이주, 이산, 유랑 등 탈식민주의 이슈와 함께 민족·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삶 그리고 예술과 분리될 수 없는 의식의 한 층을 형성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산 작가에게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절실하면서도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백남준에게 있어 특이한 점은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새로운 조형 방식과 미학 언어로 풀어냄으로써 비디오라는 새로운 장르의 예술을 창안하였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새로움의 추구는 예술뿐 아니라 인생의 좌우명으로 그로하여금 아방가르드와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는 뒤샹-케이지-보이스-플럭서스의 계보에 속하는 아방가르드 작가로서, 특히 존 케이지와의 만남은 그에게 자신의 뿌리를 다시 들여다보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도교, 젠 사상, 주역 등 동양사상에 비견될 비고정성 개념을 통해 생예술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 바로 케이지였다.
아방가르드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시각의 결단력 있는 재조정을 표방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때, 서구적가치관과 전통미학에 대한 도전으로 극단적 변화를 유도한 백남준의 아방가르드 정신에 공감하게 된다. 더구나 예술의 사회적 역할, 타자와 주변 문화의 목소리에 대해 주목하면서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이게, 음성 없는 것에 음성을 부여하는 탈식민주의, 후기구조주의 시대에 서구에 대응하는 아시아 효과를 증폭시킨 백남준의 예술은 탈중심주의에 입각한 현대적 정치예술의 목적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백남준은 글로벌 세계에 대한 비전으로 동서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1세계와 3세계의 대화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다”고 전제하고 그는 동서의 공동존재와 협력을 개발할 공생모델을 창안하고자 했다. 예컨대 실시간 폐쇄회로 작업인 시리즈는 과거와 현재, 동과 서를 연결하면서 세계 권력과 그 구조적 상황을 패러디하는 작업이다. 백남준의 공생모델은 한국과 아시아의 문화적 전통 등 지역성에서 출발하여 세계성을 획득하는 글로컬리즘의 총화로서, 주역, 윤회, 젠 사상, 무위, 샤머니즘 등, 아시아적 사상과 문화전통을 현대화한 해프닝과 비디오 아트에서 그러한의지를 감지할 수 있다. 백남준의 예술적 공헌은 바로 동양철학이나 한국 전통사상을 서구 아방가르드정신과 결합하여 현대미술 언어로 조형화시키면서 세계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자신의 고유양식을 구축한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행위음악에서 플럭서스 해프닝을 거쳐 비디오 아트에 이르는 백남준의 예술세계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사상적 통찰과 상상적 미학 실험의 산물이며, 소통과 참여라는 그의 진취적 예술이념 역시 자신의 의식 속에 내재하고 있는 동양정신과 깊게 맞닿아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샤마니즘은, 백남준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에 깊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우주와 인간, 자연과 인간, 이승과 저승의 소통과 조화를 신봉하는 샤마니즘적 사유방식에 대한 참조, 그 문화적 기능과 의미에 대한 숙고를 통해 대중 소통, 관객 참여, 나아가 전 지구적 문화교류를 추구하는 상호성의 예술을 개념화한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무속과 해프닝, 샤마니즘적 ‘마술’과비디오 ‘미술’, 구체적으로는 샤마니즘과 백남준 예술의 유추를 상정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첨단의 테크노 문화와 고전 동양사상 사이의 동질성과 차이를 인식하고백남준 작업에 나타나는 아시아성 또는 한국성을 이해할 수 있다. 샤마니즘과 비디오 아트는 영험적 초자연 세계와 물질적 자연세계,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매체적 기능을 통해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고인간 주체와 자연 대상의 소통을 증진시킨다는 유사성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텔레비전과 비디오 작업으로 새로운 영상미학을 제시한 백남준의 매체실험을 신화를 전수·재현하는 샤먼적 행위의 실천에 비견할 수 있는 한편, 샤머니즘을 문화의 차이를 넘어 교감의 형식과 가능성을 추구하는 백남준 예술의 은유로 파악할 수 있다.
백남준은 샤머니즘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류의 기원과 역사를 해석하고, 한국의 선조를 샤머니즘 신화에 결부시킴으로써 몽골, 우랄알타이계의 아시아 정체성을 강조한다. 또한 1963년 자신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 아트의 효시가 되는 역사적인 전시회인 <음악의 전람회>(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화랑)에 방금 잡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소머리를 내걸어 주위를 경악시킨 샤먼적 행위 역시 유럽의 아방가르드화단에 자신의 뿌리를 알리는 일종의 인종적, 민족적 선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2차대전 중 중앙아시아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경을 헤매다 타타르 족의 보살핌으로 회생한 후 샤머니즘에 경도된 요셉 보이스에게 분신과 같은 혈육애를 느끼고, 그가 죽은 후 추모굿(1990년 현대화랑)을 열어준 백남준의 정서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가집 자손으로 어려서부터 굿판을 보고 자라난 백남준에게 굿판과 같이 떠들썩하고 혼란스러운 해프닝은, 존 케이지와의 인연이 ‘운명적’이듯, 어쩌면 백남준을 위한 운명적 장르였는지 모른다. 백남준은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작품을 만들 때 무의식으로 만들지만 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것은 무당이다. 매년 10월이 되면 어머니는 1년 액을 때우기 위해 무당을 부른다. 24시간 해프닝이 된다. 혼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히 밤에 이루어지는 예술. 그것도 그녀의 예술이 된다. (중략) 무당은 돼지머리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춤춘다. 그 리듬은 중국 아악 리듬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의 리듬은 싱코페이션이 있는 삼박자로 3박자, 5박자, 7박자로 이어지는 홀수가 많다. 내가 작곡하면 거의 3박자, 5박자가 되던 것은 결국 나의 예술은 한국의 미술, 그 중에서도 민중의 시간예술, 춤, 무당의 음악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면 무속 신앙을 물려받고 무당의 제식에 익숙한 백남준은 자신이 택한 예술 장르, 해프닝과 비디오 아트를 통하여 무엇을 추구하며 그것은 결국 무속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해프닝은 전통예술개념을 부정하는 인터미디어와 비고정성 개념으로 참여 이상을 실현한다. 미술과 연극의 인터미디어이자, 시간과 공간의 비고정적 환경인 해프닝 환경에서 관객의 역할은 수동적 감상자에서 능동적 주체로 전환되며, 자신을 ‘지금 여기’의 미학적 요소로 상정한다. 비디오 역시 해프닝으로부터 이 두 개념을 전수받고 있지만, 매체의 특성상 이 두 개념이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즉, 비디오는 인터미디어의 총화로서, 회화적 이미지와 조각적 오브제,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의 중간형태일 뿐 아니라, 예술과 기술,예술과 유흥 사이에 위치하며 우리의 인생과 생활에 개입한다. 비디오 이미지는 또한 전자적 운동으로전개되는 이미지의 흐름이 비고정적 이중 장면을 창출하고, 그 이중 장면의 이중성이 특수한 양태로 보는 이의 지각적 반응을 일으킨다. 말하자면 피드백 미캐니즘으로 생물학적 차원의 관객 참여가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객 참여 이슈는 비디오를 대중문화, 대중매체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이렇게 관객 참여로 상호연결되는 해프닝과 비디오는 라이브 아트, 즉 예술과 인생의 통합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며, 인생 장르적 반예술 실천으로 전통재현예술의 위상을 훼손시킨다.
관객참여예술로서의 해프닝과 비디오 아트는 사회적 퍼포먼스로서의 굿판과 내용과 양식에서, 미학과 이념에서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백남준의 해프닝과 비디오 작업, 또는 비디오 퍼포먼스에서는 무속적제식성과 연극성이 더욱 강조될 뿐 아니라 보이스 추모굿에서와 같이 굿과 퍼포먼스의 결합이 시도되기도 한다. 해프닝과 굿판의 유사성을 비교해보면 백남준 예술이 얼마나 샤머니즘 전통과 결부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선 해프닝은 집단참여 예술로서, 굿은 민중적 기복이나 집단정화를 위한 사회적퍼포먼스로서 소통과 참여의 맥락을 같이한다. 예컨대 해프닝의 능동적 관객처럼, 굿판의 구경꾼은 제관으로 뽑혀 신내림과 접신의 엑스터시를 경험하며 행사의 일원이 된다. 또한 무복, 무악, 무화, 무가, 무극, 무담, 무언 등의 총체적 문화집합으로 이루어지는 굿은 음악, 미술, 연극 등 다장르 사이에존재하는 인터미디어로서의 해프닝 형식과 유사하며, 굿판의 현장성과 장소성은 시공적으로 비결정적인 해프닝의 현장미학에 비견될 수 있다. 이처럼 해프닝과 굿은 관객참여 양상, 인터미디어 형식, 비결정성의 미학에서 공유점을 갖는데, 바로 이러한 점들이 관객을 분리시키고 각본에 의존하며 타장르들을 위계적으로 종합하는 연극, 오페라와 같은 전통공연예술과 다른 점이다.
해프닝과 굿의 이러한 양식적 유추를 통해 비디오 아트와 샤머니즘의 매체적 환유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해프닝의 비결정성미학이나 인터미디어 양식이 비디오 아트로 연장되고, 관객 참여 이슈가 비디오에서는 기억을 담보하는 생태학적 차원의 참여나 사용자 친숙형의 인터페이스 미캐니즘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특히 정보통신기술이나 가상현실의 발전이 미디어를 영매靈媒 현상으로 파생시키는 현 테크노 문화에서 비디오와 샤머니즘은 매체와 영매의 동일한 어원을 환기시키듯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이러한 맥락에서 백남준은 “매체는 중세 신학적 개념으로 신과의 교접을 의미한다. 굿의 기원,무당의 액소시즘은 얼, 몽고말로 영혼을 의미하는 얼이다. 얼은 미디어와의 유사어이며, 미디어는 굿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굿과 해프닝, 샤머니즘과 비디오 아트는 소위 주객체의 인터액티비티 개념으로 상호연결되는데, 장르적으로 보면 해프닝, 비디오 아트, 무속굿은 모두가 시간성에 기초한 시간 장르라는 점에서 미학적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해프닝, 비디오 아트, 굿은 시간 속에서 진행되는 일반적 의미의 시간 장르가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잡아두거나 역류시키는 특수한 시간 장르라는 점에서 의미 심장하다. 그것은 마치 꿈의 시간처럼 비연속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맥락적인, 우리를 공리적인 좌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비합리적인 시간성으로 그것이 관객에게 새로운 지각 경험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의미를 갖는다. 백남준은 ‘지금 여기’라는 현재성과 함께 동시성, 통시성을 담보하는 해프닝, 비디오의 시간성에 주목하면서 현재 속에서 ‘생’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나 비디오 생방송 예술의 의미를 강조한다. “생예술은 인간의 불가항력적 요소들을 그대로 반영하며, 예측할 수 없는 인생같이 우연과 사고를 동반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듯 생생하다. 탄생, 죽음 같은 중요한 일은 일생 단 한번 일어나듯, 생예술의 의미는 그것이 똑같이 되풀이 될 수 없다는 일회성에 있다.”

샤머니즘과 미디어 아트는 정신과 육체, 초자연과 자연, 가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기능으로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고 인간과 자연의 소통을 증진한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는백남준의 비디오 실험과 신화, 집단무의식을 재창조하는 무속 활동을 견주어 볼 수 있다. 비디오는 시간을 영속화하거나 지연시키는 조작의미캐니즘을 갖는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촬영해 화면에 동시 중계하는 폐쇄회로 설치에서는 즉각 반영으로 시간이 영속화될 뿐 아니라 시차 반영을 통해 시간이 무한정 연기된다. “비디오에 한번 찍히면 죽을 수가 없다”고 백남준이 말하듯이, 비디오에 찍힌 이미지는 영원한 현재 속에 존재하며, 관객은 ‘랜덤 악세스’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시제를 동시에 넘나든다. 과거와현재의 이중시제는 전자의 흐름으로 생성되는 비디오 이미지 자체의 특성이기도 하다. 현재가화면을 지나가는 순간, 그 현재의 장면은 보는 이의 기억으로 사라지고, 기억 속의 과거는 현재로 되돌아오듯, 비디오는 시청자의 기억에 의존하는 지각적 매체이자 이중시제의 매체인 것이다.
지각 주체로서의 관객은 비디오가 제시하는 통시성과 동시성,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인식하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 즉 순간과 영원, 시작과 끝은 동일하다는 동양적 신비사상을 접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비디오의 굿과의 시간적 연계가 발생한다. 고인을 위한, 고인과 만나는 영매예술로서의 굿의시간 역시 바로 영원과 순간, 죽음과 삶을 관통하는 이중시제인 바, 굿은 인류의 원형이자 집단무의식의 표출인 신화를 기억술로 환기시키는 기억의 장르가 된다. 기억의 장르이자 시간 장르인 굿, 해프닝, 비디오의 영역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시간을 유희하는 ‘시간의 마술사’ 백남준은 시간예술에 대하여 이렇게 피력한다. “우리나라에서 국제적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예술은 음악, 무용, 무당 등 시간예술뿐이다. 이것을 캐는 것이 인류에 공헌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유목민이었으며, 유목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주어도 가지고 다닐 수가 없다. 무게가 없는 예술만이 전승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백남준의 예술과 샤머니즘은 중층적 차원에서 공유영역을 형성하며 그 유추적 독해를 가능케 한다.그러나 비디오 아트와 샤머니즘의 유사성으로 백남준의 예술을 현대판 샤머니즘 또는 ‘네오샤머니즘’으로 일반화·유형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동북아시아 샤머니즘과 한국의 ‘무속’(Korean shamanism, Musok), 그리고 백남준의 무속적 예술의 차이를무시하는 거친 대비를 피해야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무속은 물론 동북아 샤머니즘의 한 갈래임에는 틀림없지만, 한국적 문화 토양 속에서 민족적특수성으로 재해석된 고도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동북아 샤머니즘과 다르게,한반도의 무속은 집단성이 약하고 가족·개인적 성격이 강조되어 있으며, 서사성,제물 차림, 가무에서 세련되고 의례가 다양하다. 또한 동물, 곤충보다는자신의 몸을 영매로 접신하는 인격신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샤머니즘과 구별된다. 무당굿을 몸소 체험하며 자란 백남준의 작업에 내면화된 샤머니즘은 일반적·추상적 개념의 샤머니즘이 아니라 한국적 색채와 가락으로 각인된 특수하고 구체적인 한국의 무속이라는 것이다.
백남준의 샤머니즘을 아시아적 샤머니즘, 현대판 샤머니즘으로 일반화하는 논리는 자칫하면 개인적·민족적 차이를 무시하는 멀티컬츄럴리즘이나 스테레오 타입을 상정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오류로 빠질 수 있다. 백남준은 샤머니즘과 비디오 아트의 동질성과 차이를 구별하는 미학적 통찰로 글로벌리즘과 로컬리즘의 양면적 요구를 통합시켜 자신의 양식으로 체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샤머니즘적 영감과 상상력으로 점화되는 그의 예술의 아시아성 또는 한국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1950~1960년대 고어들을 구사하고 이제는 구식의 정서가 되어버린 ‘끈끈한 정’의 소유자 백남준, 섬뜩할 정도로 토착적인 그의 행동거지에서 우리는 첨단 아방가르드 작가에 대한 경계를 풀고 안도하게 된다. 샤머니즘 요소와 함께 그의 작품에 소도구처럼 자주 등장하는 담뱃대, 요강, 장독 등 구시대의 민속품은 고국에 대한, 과거에 대한 이주자의 향수를 느끼게 하지만, 백남준은 그것을 비디오와 같은 현대 영상매체로 현재화함으로써 스스로를 탈식민주의 예술의 스테레오 타입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백남준이자 세계속의 ‘남준팩’으로 자리매김하는 당위를 발견하게 된다.
김홍희|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콩코디아 대학에서 미술사 석사를 마친 후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광주 비엔날레 큐레이터, 2000년 광주 비엔날레 커미셔너,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로 활동하고, 1999년 '팥쥐들의 행진', 2001년 '동아시아 여성과 역사' 전 등 여성미술제를 기획했다. 현재 쌈지스페이스 관장, 홍익대 미술대학 무대겸임교수로 있다. 저서로는「페미니즘·비디오·미술」「백남준·해프닝·미술」 등 다수가 있다.

출처-기전문화예술 2006. 1ㆍ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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