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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 100년 제2부 전시를 보고

윤범모

한국미술 100년 제2부 전시를 보고

- 20세기 후반의 한국미술과 평가의 문제
윤범모(미술평론가)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 해에 이어 <한국미술 100년>의 제2부 전시를 꾸몄다. 미술관의 입장에서 보면 오래간만에 기획한 대형전시이기도 하다. 제1부 전시는 출품작 8백 점, 참고자료 2백 점을 선보이면서 전시예산만 해도 5억원 이상을 집행한 대형 전시였다. 이번 제2부 전시는 출품작 3백 점에 참고자료 2백여 점을 진열했다고 한다. 1부가 20세기 전반부의 시기였다면 이번 2부의 전시는 20세기 후반부의 시기에 해당한다. 20세기는 전반부의 식민지시대와 후반부의 분단시대로 규정되는 질곡의 시대였다. 이러한 정치상황 속에서 서화의 시대는 가고 ‘미술’의 시대가, 수묵 사군자와 문인화의 시대가 퇴색하면서 영상 등 다양한 형식과 매체의 시대로 바뀌었다.
이렇듯 짧은 시간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 미술계의 상황은 가히 단군 이래 최대규모와 수준이었고 이는 하나의 미술 혁명이기도 했다. 이 같은 변화의 내용을 미술관에서 평가하고,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하고, 또 감동까지 선사하려는 기획이 곧 이번 전시일 것이다. 그러니 두 번에 나누어 개최된 <한국미술 100년> 전시는 마땅히 제1부와 제2부를 집약하고 연결하는 성격과 기획의도 혹은 전시공학상의 일관성을 견지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1부의 각종 자료를 동원하면서 동시대의 시각문화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려는 방식과 완전히 맥락을 달리했다. 한마디로 이번 전시는 심심했고 무엇인가 허망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했다. 이런 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마냥 아쉬웠다. 왜 그런가.

우리 미술을 평가하겠다는 미술관은 무덤인가, 유배지인가
한국미술 100년을 평가한 미술관에 가려면 무엇보다 ‘날을 잡아야 했다’. 왕복 교통시간에 관람시간을 고려한다면 마치 여행이라도 떠나듯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정말 유배된 미술관이었다. 근교에 그것도 동물원 옆 미술관으로 구석에 쳐박혀 있다. 진입로의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동안 통과하면 마치 요새 같은 위압적인 건물이 나온다. 거기가 이름하여 국립현대미술관이란다. 유배 간 미술관의 외양이다. 100년전은 미술관 입구의 마당에서부터 시작한다. 거기 거대한 무덤 하나가 입구를 가리고 있다. 육근병의 <풍경을 위한 눈>(1992년 카셀 도큐멘타 출품작)이다. 근접 촬영한 눈동자, 그것은 끊임없이 깜박거리고 있다. 무덤 속의 눈동자, 누가 말했는가. 미술관과 공동묘지의 분위기는 흡사하다고. 아니 뮤지엄이나 무덤이나 영어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미술관은 미술작품을 박제화하는 곳인가. 미술이라는 시체를 안치하고 때로는 제사(전시)를 치루는 성전(聖殿)인가, 예배소(禮拜所)인가.
한국미술 100년은 유배간 미술관 안에서 시체처럼 박제화되어 있었다. 실내 전시장의 입구를 차지한 신학철의 <한국 현대사 –갑돌이와 갑순이>(2002),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허, 눈동자 무덤 다음에 민중미술? 그리고 중앙 홀을 차지한 거대한 풍선은 무엇인가. 관객은 숨이 가쁘다. 호흡을 가다듬고 보니 거기에 6미터 높이의 설치작품이라는 이불의 <히드라 –모뉴멘트>(1998)가 어색하게 위치하고 있다. 참고자료의 진열장 곁에서 높게 치솟은 <히드라>는 엽기적(?)으로 분장한 작가의 모습처럼 정말 엽기적이다. 과연 어울리는 광경인가. 이런 설치작업이라면 이불 이외 최정화 등 한 두 명의 작가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미술관 전시장의 중앙을 이불 혼자서 독점을? 한 시대의 시각문화를 변화시켰던 20세기 후반의 걸작, 걸개그림 같은 ‘한국적 정체성의 작품’은 어디로 갔는가. 과연 어떤 것이 우리 미술의 역사에 남아 화려한 빛을 낼 것인가.
전시실은 모두 4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각기 의미부여를 시도했다. (1)현대미술작가초대전(1957-1966) -전후 모더니즘 미술과 실존적 정체성의 모색, (2)청년작가연립전(1967-1979) -실험미술과 단색조 미술, 현대미술의 진로를 묻다, (3)5,18 민주화운동(1980-1987) -현실, 그 인식과 실천의 과제, (4)서울올림픽(1988-현재) -다양성, 대안적 정체성의 모색 등이 그것이다. 이 같은 시대구분 방식에서 최소한 2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하게 한다. 하나는 1957년의 기점론이다. 그동안 한국현대미술의 시원을 1957년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되기도 했다. 이 해에 몇몇 미술동인이 창립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그러나 미술사조가 특정 연도를 분수령으로 하여 개벽되는 것도 아니고 이 같은 시대구분법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본다.
시대구분과 의미부여에 좀더 참신한 접근방식이 아쉽게 하는 부분이다. 더불어 (1)과 (2)의 1950년대에서 70년대까지의 시대는 전시명으로 대표성을 삼아 현대미술작가초대전의 시대 혹은 청년작가연립전의 시대로 명명했다. 문제가 많은 명명 방식이 아닌가. 어찌 복잡다단한 위의 시기를 하나의 전시명으로 성격을 부여할 수 있는가. 아니 좀 양보하여 전시명의 시대구분 방식을 수용한다면 최소한 일관된 통일성이라도 견지했어야 옳다. (3)의 경우, 갑작스럽게 5,18 민주화운동이 왜 나오는가. 그렇다면 5,18보다 역사적 하중이 더 무거운 6,25전쟁은 어디로 갔는가. 1950년대는 전후(복구)의 시대 혹은 분단(반공문화) 고착화 시대라고 했다면 이해라도 하기 쉬웠을 것을. (3)의 경우, 앞의 방식대로 통일성을 준다면 예를 들어 현실과 발언 시대 혹은 민족미술협의회 시대라고 명명하는 것이 차라리 타당했다고 본다. 그런데 갑자기 5,18? 그리고 서울 올림픽? 오늘의 ‘현재’가 서울올림픽 시대라고? 불행하게도 나는 이 대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너무 자의적이고 상투적이지 않은가. 시대구분은 하나의 사관(史觀) 즉 역사를 보는 관점을 의미한다. 역사적 평가의 미술전은 무엇보다 역사를 평가하는 사관이 중요하다. 정말 불행하게도 나는 이번 2부 전시에서 기획에 따른 역사의식은커녕 관점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미술관은 과연 시각문화의 공동묘지인가. 유배지인가. 시효가 지난 과거의 ‘시체들’을 안장하고 경배를 올리는 곳인가. 서울 근교의 산골짜기에 묘지처럼 서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과거의 역사를 평가하면서 어쩌면 그렇게 유족 없는 상가처럼 썰렁한가. 상주(喪主)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지만.

한국미술과 정체성의 문제
“정체성(Identity)의 개념은 <한국미술 100년>(2부)을 포괄하는 하나의 주제이다. 이것만큼 한국현대미술 반세기에 걸쳐 다양한 층위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개념도 흔치 않다. 때로는 실존적인 존재의 물음의 형태로, 때로는 지역적 문화적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탐구로, 때로는 민족적 자긍심과 주체성의 표현으로, 때로는 현대미술의 존재론적 위상에 관한 질문으로, 실로 다양하게 등장하는 ‘정체성’은 한국현대미술의 현장에서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닌 개념이다. 격동으로 점철된 한국현대사를 몸소 겪어낸 한국인들에게 ‘나는, 아니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단지 수사학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의 당위성을 찾아내려는 눈물겨운 투쟁이었다. 당연히 한국현대미술의 현장에서도 ‘정체성’의 문제는 원죄처럼 부담스러우면서도 좀처럼 실마리를 풀기 힘들었던 화두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20세기 내내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각도로 추구되었던 ‘정체성’의 개념을 전통, 인간, 예술, 현실 등 4가지 범주로 다시 세분하여 살펴본다.”(<한국미술 100년>의 리플렛에서 인용)
전시의 주제가 정체성이란다. 다소 진부한 개념이긴 하나 정체성의 문제는 두고두고 천착해야 할 용어인지 모른다. 문제는 이 같은 정체성이란 주제와 함께 전통, 인간, 예술, 현실이라는 소주제이다. 이 소주제는 정체성보다 더 피상적인 구분이면서 애매하다. 아니나 다를까, 전시장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우려를 실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작가와 더불어 작품 선정의 기준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부분이다. 아니, 어떻게 이런 작가가 이곳을? 이와 같은 의문은 줄기차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이런 작품을 여기에 진열을? 역시 이와 같은 의문은 계속 따라다녔다. 정말 작품 선정기준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한가지를 들면 박수근의 경우이다. 박수근은 전쟁 이후 피폐한 사회의 현실을 나뭇잎 하나 용인하지 않는 나목으로 상징화했다. 게다가 가장 부재의 시대를 상징하려는듯 생활을 담보하는 아낙네의 세계를 하나의 도상학처럼 정리했다. 따라서 박수근의 경우는 가장 박수근다운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미술 100년 전시는 박수근답지 않은 소품 그것도 무슨 새 그림 같은 마이너 작품을 내세웠다. 도대체 전시기획의도가 무엇인가, 이해하기 어렵게 했다. 김환기, 이응노로부터 오윤, 임옥상, 홍성담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가의 대표작급 혹은 정체성 관련 작품이 누락되어 어리둥절했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경우, 작가 및 작품 선정 기준의 부재현상은 더욱 안타깝게 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작품은 없고 엉뚱한 것도 비일비재했다. 이번 전시를 위한 소책자를 보니, 아니 현장에서 명제표를 살피다 보니 작품 선정 기준의 문제에 대한 의문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전시품의 대다수는 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었다. 아하! 한마디로 <한국미술 100년>의 도록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도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는 지나칠 정도로 직무태만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해당 작품을 대여하여 전시기획 의도를 구현했어야 마땅하거늘, 그렇고 그런 자신의 소장품 위주로 지난 반세기의 역사를 정리하겠다고? 정말 꿈도 야무지다. 그러니 박수근 같은 말도 안 되는 사례들이 넘쳐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전시가 단순 나열식이고 평면적이어서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일견 이번 전시는 민중미술 분야를 대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민중미술분야도 철저하게 연구된 결과로서의 전시와 거리가 멀다. 지나치게 나열식으로 되다 보니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분야가 누락되었다. 80년대 미술운동은 그야말로 우리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추스린 세계적 미술운동이었다. 군사독재정권과 대항하면서 그리고 민주화운동과 맥락을 함께한 미술운동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이에 해당하는 초기의 선구적 작품들과 매 시기마다의 분수령을 이룬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재조명했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노동미술, 여성미술 등과 같은 주제에 따른 영역, 혹은 걸개그림, 판화, 만화, 벽화, 사진, 출판미술 등과 같은 장르에 따른 영역 등 보다 전문적이고 특화된 시각이 필요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정체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무엇이 정체성인지, 또 그러한 기획의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정체성, 나는 더 이상 정체성의 문제를 재론하고 싶지 않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인 [한국근대미술의 정체성](1995)이라던가 졸저 [한국근대미술 –시대정신과 정체성의 탐구](2000)과 같은 연구서 혹은 [한국미술에 삼가 고함](2005)과 같은 평론집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이다. 나의 화두는 보수와 외세를 지양하고 창의성과 시대정신을 바탕에 깐 작업이었다. 과연 이번 전시를 보고 일반인들이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실감하고 미술관 문을 나섰을까. 정체성의 시각이기에 앞서 각 시기마다의 ‘이름’ 중심으로 적당히 안배한 나열식 전시는 아니었는가. 한마디로 집중과 선택이라는 최소한의 고뇌라도 진열실에 스며있는가. 나의 가슴은 의문만 쌓였다.

미술관이 책임운영기관이란다
올해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은 책임운영기관으로 운영방식을 바꾸었다고 한다. 변두리의 산골짜기에 위치한 미술관이 어떻게 수지 관계를 맞추면서 ‘책임운영’을 할지 걱정이다. 우리 미술관이 언제부터 돈벌이 사업에 연연했는가. 아니 미술관장급의 전문경영인이라도 양성했었던가. 무엇인가 커다란 착각을 한 것은 아닌가. 서울‘특별시’의 시내에 위치한 국립극장과 경기도 과천의 산골짜기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가는 비교의 대상조차 되기 어렵다. 그런데 국립극장에 이어 미술관도 책임운영기관이라 한다. 무엇보다 책임운영기관이 되려면 근무방식부터 환골탈태해야 한다. 배전의 전문성과 사명감은 물론 서비스 정신도 강화되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2부 전시를 염두에 두고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미술관은 작가를 우대해야 한다. 물론 고객은 왕이지만 생산자인 작가를 홀대해서 어떻게 미술관을 책임운영할 수 있겠는가. 이번 전시처럼 전시 출품작가에게 사전 양해는커녕 철저하게 무시한 태도는 시정되어야 한다.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이라 하여 일방적으로 이런 전시, 저런 전시에 마구 진열해도 무방한 것인가. 일본의 한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된 어느 화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해당 미술관에서 기획한 전시에 출품하거나 혹은 다른 미술관 전시에 대여할 때 사전에 통보를 하면서 꼭 도록을 보내준단다. 이는 작가에 대한 예우이다. 더불어 법적으로는 저작권에 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100년전의 경우, 상당수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2부 전시에 걸려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미술관 소장 작가조차 그렇듯 홀대하니, 그 다음 이야기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말 책임운영할 수 있겠는가.
도록 문제. 지난 해 1부전의 전시도록은 아직도 발행되지 않았다. 원고마감 1년이 되어도 도록이 출판되지 않았다? 이는 정말 기네스북용이 아닌가. 전시 개막일에 앞서 출판되어 홍보, 협찬 등으로 활용해야 할 도록이 전시가 끝나고 계절이 몇 번씩 바뀌고 있는데도 아직 제작중이란다. 한심한 일이다. 필자들에게 양해는커녕 무시한 상태에서 마냥 지연시키고 있는 도록 출판문제, 과연 국립현대미술관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특별전에 따른 다양한 상품 개발 등 수익사업에 열을 올려야 할 미술관이 가장 기본인 도록조차 발행하지 않고 1년을 넘기려 하다니! 국립현대미술관은 세계적(?) 미술관임에 틀림 없나보다. 정말 책임운영할 수 있겠는가.
100년전과 같은 시기에 열고 있는 주경 회고전, 미술관은 정말 책임을 져야한다. 출품작 <파란>의 경우, 무슨 근거로 1923년작이라고 공식화시켜 크레디트를 주는가. 학계의 동의를 충분히 수렴하지 않은 한국 최초(?)의 추상화라는 유화, 과연 타당한가. <파란>의 작품 옆에 친절하게 부착한 작품 해설에 의하면, 작가의 서고에 [입체파, 미래파, 표현파]와 [칸딘스키] 같은 책을 소유하고 있어 <파란>의 1923년작은 설득력이 있다는 것. 그러나 이 책들은 각기 1924년과 1925년에 출판된 책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1년 앞서 제작되었다는 작품이 어떻게 1년 뒤에 나온 책을 참고할 수 있는가. 같은 해설판의 몇 줄 되지도 않는 글에서조차 모순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으니, 아쉽다. 정말 책임운영할 수 있겠는가.
몇 시간을 관람하니 피곤도 하고 배도 고팠다. 커피 샵에 갔다. 그러나 근교로 유배까지 온 처지이면서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식당이 없다. 한 나라의 대표 미술관에 식당 하나 없는 것, 과연 상식에 맞는가. 이 역시 세계적 자랑거리가 아닐까. 골짜기에 미술관을 박아놓고 식당 하나 없다니! 어떻게 손님을 맞아 수지관계를 맞출 것인가. 걱정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책임운영기관이라! 철밥통 행정직 공무원은 손도 대지 못하고 힘 없는 학예관만 다치게 하는 제도인가. 기획전 하나 알차고도 재미있게 꾸미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책임운영을 할 것인가. 초상집에 가면 먹을 것이라도 듬뿍 주더만. 나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미술관 문을 나섰다. 나는 공동묘지를 나서는 것처럼 슬퍼지기도 했다. 드디어 나는 유배지에서 해방되었다.
과연 국립현대미술관은 책임운영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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