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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영역에서의 예술적 실천과 새로운 공공미술

김준기

공공영역에서의 예술적 실천과 새로운 공공미술
김준기(미술비평, 공공미술추진위원회 팀장)

물질형식을 빌어 영구적으로 공공장소에 설치되는 건축물미술장식품과 같은 공공미술이 낮은 단계의 공공미술이라면, 비물질적이며 비영구적인 공공미술을 포괄하는 새로운 형식과 태도의 공공미술을 새로운 공공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기존의 건축물미술장식품 개념의 낮은 단계의 공공미술과 한국의 현장미술이나 서구의 뉴장르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과 같은 새로운 위치의 공공미술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새로운 공공미술과 그렇지 않은 공공미술을 구분하여 개념적으로 정리하고 예술적 실천으로 매개하며 새롭게 제도화해야 한다는 당위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새로움의 효용성이 어느 정도까지 미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매우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구분은 미술을 심미적인 물질형식으로만 규정하는 데 동의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예술공론장 논의는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미술을 심미적 오브제의 창작과 향유의 과정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영역에서의 예술적 실천으로까지 확장해서 사고하려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몇몇 논고들을 재구성한 이 글은 새로운 단계로 변화하고 있는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포착해내기 위하여 새로운 공공미술과 현장미술, 그리고 예술공론장 논의를 검토할 것이다.

새로운 공공미술
공공미술은 미술의 역사와 함께 존재한 미술 창작과 매개와 소통에 관한 일체의 방식들 가운데서도 특히 근대적 예술개념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공공미술은 근대적 의미의 예술개념이 창안된 이래 지속되어온 모더니즘 예술의 폐쇄적인 창작과 매개, 소통의 방식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공장소에서의 미술, 공공적 의제를 다루는 미술, 공공기금으로 조성된 미술 등 다양한 형식과 태도를 가지고서 미술에 있어서의 공공성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 공공의 요청으로 제작되어 사회적 맥락과 참여민주주의의 성격을 가지는 공공미술은 특정장소의 역사성과 특수한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한다. 포스트모더니티 논의는 모더니티의 체계적인 영역분할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탈분화 과정을 해명함으로써 미술의 실천적 영역과 창작 방식에 있어서 실재와 기표, 현실과 예술 간의 새로운 관계설정에 당위성을 제공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는 일상생활의 미학화 개념이나 매체, 스타일, 장르의 해체와 중복 등 미술 영역의 확장과 다원주의적 양상은 미술의 탈제도화나 사회적 실천들과의 통합 등과 같은 유연성을 제공한다.
공공미술은 예술의 대사회적 자기정당화 과정에서 나온 개념이다. 60년대 후반 이후 서구에서 진행된 공공예술(public art)의 실천적 전략들은 공공재로서의 가능성을 담보한 것으로 파악된다. 예술의 거처를 전시장과 같은 특정 장소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로 치부해왔던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공공장소에서 공중과 만나는 예술적 장치로서의 공공예술 개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공공예술은 공공재로서의 실천적인 함의를 내포한 예술개념이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이라는 담론이 유포되기 이전에도 미술을 전시장에서 열리는 전시라는 틀에 한정하는 관행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져왔다. 이제 미술은 전시장 안에서의 게임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영역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전시장에서 열리는 전시가 미술의 언어 게임에 갇히면서 비평적 활기를 잃고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에 부응하면서 비평적 맥락을 상실하는 반면, 새로운 유형의 예술 실험들이 공공영역을 형성하면서 예술의 공공적 소통의 가능성을 넓혀가고 있다.
새장르공공미술 논의에서 말하는 ‘행동가로서의 예술가’의 지위는 새로운 공공미술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매우 시사적이다. 수잔 레이시에 따르면, 예술가의 행위 과정은 ‘경험, 분석, 보고, 행동’의 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공공적인 예술이란 ‘개인의 경험에 따른 주관성적 감성을 공감시키는 단계로부터 정보를 공유하고, 상황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며, 나아가 새로운 합의를 세워내는 과정’으로서 예술행위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공공미술의 함의를 살리기 위해 주목해야할 맥락은 오늘날 사회운동과 문화예술운동이 적극적인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영역(public sphere)에서의 예술적 실천은 공론장에서의 예술가의 지위를 점검하는 것으로부터 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경험자로서의 예술가-분석가로서의 예술가-보고자로서의 예술가-행동가로서의 예술가
주관성의 공감 ------- 정보의 공유 ---- 상황에 대한 해답 --- 새로운 합의 도출
private art ---------------------------------------------------- public art
위의 분석에 따르면, 예술가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넘치는 예술가이자, 예술가 집단의 조직가이며, 특정 상황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고 보고하는 이슈 파이터이자, 정치적 맥락을 잡아내는 사회적 퍼포먼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공공미술은 환경조형, 장식미술, 대지미술, 장소지정형 미술(Site Specific Art) 등을 포괄하는 낮은 단계의 공공미술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새장르공공미술 논의를 통해 새로운 단계로 전환하고 있다. 이 개념은 물건으로서의 작품을 남기는 것을 넘어 행위과정을 중요시하며 프로그램 운영으로까지 예술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공공미술의 출현은 행동주의 예술의 전략적 단초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새장르공공미술 개념은 ‘예술을 통한 공동체 건설, 사회적인 표현, 공공적인 안건을 만드는 새로운 미술가의 역할’ 등의 특성에서 드러나듯이, ‘주제의 문제나 장소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활성화된 가치체계의 미학적 표현‘을 시도하는 참여적 성격이 강하다. 공공미술은 ’다양한 관객들과 삶의 이슈를 소통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매체를 사용하는 시각예술‘을 의미하며, ’장소(site)의 역사적, 생태적, 사회적 측면에 대한 관심으로 관객과의 관계설정을 모색하는‘ 미술행위이다. 따라서 공공미술론은 ’특정 공간 대상의 미술행위, 현실 개입의 실천적 경향성, 장소와 동시대성을 공유하는 현장성 획득‘ 등에 있어서 현장미술과의 접합의 지점을 형성한다. 특히 새장르공공미술 논의는 상호작용, 관객, 효과 등에 관한 논점을 제시함으로써 공공미술 논의의 확장적 양상을 해명하는 데 유익한 논점을 제시한다.

현장미술과 공공미술
시각 영역의 창작과 소통에 관한 일체의 행위와 개념과 제도를 말하는 미술이 공간적 특성과 동시대의 시대적 정황을 포함하고 있는 현장(現場, insitu)이라는 개념과 결합한 현장미술은 1980년대 한국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피어난 전위적인 예술 개념이자 실천이다. 현장미술은 삶의 영역과 심미적 영역을 통합적 시각으로 접합하려는 적극적인 미적 실천이자, 동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환경 속에서 미술의 기능과 역할에 관한 능동적인 개입의 산물이다. 이러한 미술 흐름은 역동하는 변혁의 힘이 팽배해있던 80년대 한국사회에서 구체적인 실천의 장으로 존재했던 영역이다. 현장미술의 흐름을 통해 한국 미술의 변동과 확장적 양상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현장성이 가지는 미적, 실천적 지위를 확인함으로써 현장미술이 남긴 열린 미술의 가능성을 재검토하는 것은 향후 한국 현대미술에 동시대적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줄 대안적 비평담론으로 현장미술이 남긴 현장(성)미학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일이 될 것이다.
현장미술은 특수한 시공간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언명과 실천 영역을 구현하고자 했던 미술운동이다. ‘신명성, 공동체성, 민주성, 포용성, 개연성, 역동성, 현장성, 실용성, 유기성’을 띄는 문화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 전통과 현대의 가치통합, 미술전문인과 대중의 미적 역량의 통합, 미술제도의 민주화’를 이루며, 현실 속에서 작품내용을 찾고, 대중성을 전제로 하는 현장성의 강화, 쓰임새에 따른 일상성과 현장성의 공유 등을 강조했던 두렁의 지향은 현장미술의 방향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현장미술은 ‘리얼리즘의 사실주의적 소통방식, 대중정서에 기반한 미술형식, 서사와 상징, 풍자와 해학, 역동과 서정을 담은 감동적 미술형식‘을 주창함으로써, 리얼리즘 지향의 현실인식과 실천적 지향을 표방했다. 현장미술의 함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성, 공공미술론의 관객과의 상호소통 가능성 등의 논점을 포용한다. 특정 단위, 지역 또는 장소 뿐 만이 아니라 무형의 현실인식, 특정상황, 문화지형 등을 작업의 대상이나 영역으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장미술은 ‘상황으로서의 현실에 대한 문화적 개입과 생산이라는 참여적인 형태의 미술행위’를 통해 현장성을 획득한다. 현장미술의 현장성이란 양식으로서의 리얼리즘을 태도로서의 리얼리즘 지향으로 재편하는 실천주의 미학의 요소이며, 확장된 개념의 리얼리즘 미술이 지향하는 동시대 현실과의 소통 가능성을 확보하는 조건‘이다.
현장미술의 뿌리는 사회운동적 미술실천에 있다. 전통미술의 긍정적인 요소를 계승해서 걸개그림이라는 양식과 공동창작 방식을 주창한 두렁, 광주항쟁을 겪으며 현장체험을 바탕으로 대중미술교육에 나선 광자협 등은 전시장이라는 일상과 괴리된 공간을 벗어나 일상적인 삶의 공간과 민중의 투쟁 현장에서 직접 만나는 현장미술실천을 이끌어낸 선구적 역할을 했다. 전자의 경우 계급계층운동의 현장에 결합해 노동자, 농민 등 기층민중의 정서에 부합하는 미술적 실천으로 주로 노동미술의 경향성으로 나타났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민주화 운동이나 통일운동 등의 정치적 투쟁 현장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아방가르드 형태로 진행되었다. 현장미술은 대중이나 시민들과 직접 만나 문화소비를 넘어서는 문화생산을 실천적 영역에 도입하려 했으며, 조직적인 미술운동의 흐름 속에서 한 시대의 대세를 이루었다. 현장미술은 동시대성과 장소특수성을 동반한 것이어서 삶의 현장과 미술을 예술적 차원에서 매개하는 현장성을 구현했다. 특히 1987년을 전후로 한 한국 사회의 격변기를 맞아 이들의 미술실천을 파업의 현장인 공장, 농촌, 민주화 운동의 열기로 가득했던 집회장, 시위 현장, 민주열사의 장례식 등 급박한 흐름 속에서 노동미술과 정치선전미술의 전성기를 일구어냈다. 민미협과 민미련건준위 등의 미술가 조직과 활화산, 갯꽃, 가는패, 노동미술위원회 등 수많은 창작소그룹을 통해서 활동한 다수의 익명의 작가들과 학생미술운동에서 헌신성을 발휘한 무수히 많은 미술가들의 활동이 리얼리즘 미술의 현장성을 전취했다.
전문공간에서의 심미적 소통에 머물렀던 미술의 영역을 동시대성과 장소성을 구현한 현장성 전취의 영역으로 넓혀 놓은 현장미술의 대사회적인 목적의식과 활동방식은 예술을 ‘예술 내부의 자율적인 흐름’으로만 파악하려는 경향과는 달랐다. 그들은 예술가로 살아남기보다는 시대정신에 충실한 당대의 활동가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동가로서 예술가적 실천 모델을 찾고자 했던 이들로부터 새로운 형식과 태도의 공공적인 미술실천의 맹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초에 논의되었던 창작소그룹의 중요성이 90년대 후반 이래 대대적인 창작소그룹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점 또한 특기할만한 일이다. 현장미술 운동에 정신적 뿌리를 둔 창작소그룹의 발흥은 탈현대적 지형의 동시대 미술 속에서 새로운 예술적 실험을 지켜내는 전략적 실천의 단위로서 기능했다. 당대에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그들 현장의 예술가들이 환경운동과 여성운동, 생태운동, 소수자운동, 지역공동체운동과 만나 예술적 창의력을 발현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지난 시기에 일구었던 정치적 아방가르드로서의 현장미술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가까운 우리의 과거를 통해 동시대와 미래를 성찰하고 예견하는 일이다.

예술공론장으로서의 공공미술
예술공론장 개념은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 연구’의 핵심개념 가운데 하나인 문예적 공론장의 가능성을 도출하는 데에서 출발해서, 사회의 구조 안에서 행위하는 개인의 역동성을 강조한 행위자이론(agency theory)을 토대로 예술의 장 구조를 파악하는 것으로 나아가며, 행위주체들의 속성인 하비투스가 작동하는 예술적 행위공간으로서의 공공영역을 예술공론장으로 파악하는 개념적 절차를 거친다. 이러한 과정들은 예술공론장을 능동적 행위주체로서의 예술가 주체의 ‘자율성’과 예술 창작과 향유 과정에서 형성되는 공론장으로서의 예술의 ‘공공성’이 공존하는 구조로 파악하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공론장 개념은 예술영역을 공중의 소통의 장이자 집단과 개인 사이를 넘나드는 사회적 소통의 장으로 규명한다. 이러한 논점은 공공예술의 실험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선보였으며, 오늘날 새로운 공공미술의 사례를 통해 그 실천적 함의를 가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술의 대사회적 자기 정당화 과정을 검토하며 사적인 코드에 가려져있던 미술의 공공성을 옹호하려는 태도가 공공미술이라는 하나의 예술 개념과 관행, 나아가 제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회 안에서 미술로써 예술공론장을 만들어 내는 일이 공공미술의 핵심이다. 하버마스는 근대사회 이후 문예적 공론장과 정치적 공론장이 여론 형성과 공공성 형성에 기여해 왔으나 자본주의 사회의 발달에 따라 문예적 공론장이 쇠락하고 정치적 공론장만이 현대사회의 매스 미디어와 결합하여 공공의 생동감을 잠식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 문제는 예술과 정치의 관계와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예술은 과연 탈정치의 장이 될 수 있는가. 예술은 탈정치의 영역이 아니라 치열한 문화정치의 장이다. 계급과 계층의 상충하는 문화적 감성이나 예술적 코드의 상호경쟁 시스템이다. 따라서 예술의 가치를 탈정치적인 것에서 찾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은 문예적 공론장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에도 정치적 공론장과 결탁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대안은 예술 스스로 정치적 공론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진정한 자율성을 획득하여 문예적 공론장의 기능을 회복하는 일이다. 오늘날의 시각예술은 작업실과 전시장의 단선적인 구조로부터 벗어나 보다 역동적인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것은 공공의 장소 또는 영역 속에서의 미술의 지위와 역할을 새로이 묻는 새로운 공공미술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유사 이래 존재해왔던 기념비적인 조상이나 건축과 결합한 조각의 모습을 재확인하거나, 건축물 앞 또는 도심 곳곳에 조각이나 벽화 작업을 남기는 방식의 20세기 중후반 패러다임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새장르공공미술은 이러한 예술의 지위와 역할에 주목하여 새로운 예술언어를 만들어 내고 있다. ‘공공미술은 건축물 앞에서 세우는 환경조각’이라는 인식은 낡은 것이 되었으며, 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향해 열린 개념이자 제도이며 가치이다.
공공미술은 예술공론장의 해방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장이다. 예술공론장으로서의 공공예술은 체계적인 영역분할에 의한 근대성의 분화 과정에서 스스로 사물화한 예술적 소통을 탈분화 과정으로 인도하기 위한 탈근대적인 예술전략을 함유하고 있다. 나아가 공공예술은 제도화된 소통 영역으로서의 예술 시스템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공론장과 예술의 맥락을 재검토함으로써 체계적으로 분화된 자율성의 영역인 자폐적인 예술 개념과 이를 극복하고자하는 탈근대적 예술 개념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은 일체의 규율과 속박들로부터의 해방을 모색하면서 사회적 수준으로부터 이탈한 모더니즘을 통합의 시각으로 재검토하여 공론장의 관점에서 예술을 파악하게 한다. 오늘날의 대다수의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미술적 행위들이 공공영역과 유리된 소통불가능한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준조세 형태로 마련된 기금을 가지고 조성되는 건축물미술장식품들이 예술공론장으로서의 공공미술과는 다른 매우 사적인 예술적 창작과 매개방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미술계의 심각한 장애가 아닐 수 없다.
예술공론장은 ‘자율성과 공공성의 공존의 장’이이다. 사적인 맥락의 그것으로 오인되고 있는 예술적 자율성은 공적인 맥락의 공공영역과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관계의 장에 놓인다. 공공의 문화 향유권에 합당한 예술행위를 위한 공존의 개념을 토대로 장소와 상황에 대한 직간접적인 개입과 참여의 영역으로 지평을 확장하기 위한 자율성과 공공성의 공존 개념을 찾는 것이야말로 예술공론장의 주요한 작동원리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하다. 나아가 특정장소나 상황에 대한 맥락화, 현실개입으로서의 공공적 예술행위,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의 공공적 시각예술의 사례 등을 고찰함으로써 예술창작과 향유로 이루어지는 예술적 소통을 공리적 차원에서 융합하여 자율적이면서도 공공적 소통 가능성을 열어두는 문화생산의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 탈근대적 예술의 통합적 개념, 리얼리즘미술의 비판적 관점, 공공예술의 함의 등에 대한 포괄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자율성과 공공적 유용성이 상호 충돌하고 갈등하는 관계에 놓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양자의 공존이 공공미술을 성공적인 공론장으로 이끌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지만 양자의 충돌 또한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점은 현장에서의 경험이 해답을 제공해 줄 것이다.

공공적 기재로서의 새로운 공공미술
문화예술적 개입과 실천적 참여를 전제로 하는 새로운 공공미술은 특정 사안에 결합하여 명료한 이슈 파이팅을 통해서 사물화 하지 않는 정신으로서의 예술적 성과를 남긴다. 요셉 보이스가 심은 수천 그루의 나무는 특정 미술관이나 컬렉터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며, 그가 예술적으로 개입했던 녹색당은 한 예술가의 행동주의적 예술행위가 정치적인 파급효과를 이끌어낸 모범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80년대 거리에서 수만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벌어졌던 수많은 집회와 장례식들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집결한 웅대한 퍼포먼스였으며, 그 가운데서 시각적 장치물로서 훌륭하게 제 몫을 해낸 걸개그림들과 깃발, 상여 행렬, 영정그림들은 물신화의 덫에 걸리지 않고 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훌륭한 행동주의 예술가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탁월한 예술적 향기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공공영역으로서의 예술의 장, 예술공론장은 탈근대적인 예술가 주체의 행위를 보장하는 공간이다. 근대적 예술가 주체는 근대의 계몽프로젝트가 야기한 예술의 자율성 개념에 매몰되어 자본주의적 상품교환 체제에 호응하는 예술산업의 물신화와 상품화에 종속되었다. 예술노동과 예술향유 영역의 완벽한 분화는 극단적인 경우 배타적인 소통현상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이 신화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새로운 야만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방증하며 나아가 인간의 이성이란 새로운 야만과의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엘리티즘과 포퓰리즘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오늘날의 타락한 예술이 대중문화와 문화산업을 만드는 계기로 작동한다. 오늘날 예술과 문화산업은 예술작품(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역전된 가치전도의 상황 속에 놓여있다.
새로운 공공미술은 이러한 한계를 넘고자 했던 예술가들의 선구적인 실천 수준에서 체계적인 제도화 과정으로 전환하고 있다. 공공영역에서의 예술적 실천은 공공기재로서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의 기재는 공공의 이해와 요구에 따라 공적인 보호와 육성의 대상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제도화 과정이 예술적 진정성을 훼손하여, 공공미술을 체제내적인 미술로 전락시키지 않을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공공미술에 대해서도 비평적 접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공공미술 비평은 기존의 사적인 미술에 대한 비평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공공미술과 관련한 검증이나 비평과 관련한 몇 가지를 예시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공공미술적인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이나 현장에 대한 고려, 공공성에 기반한 목표 설정, 목표와 계획의 예술성과 창의성, 목표설정의 지속 가능성 등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방법 또한 주요한 고려 대상이다. 예술가의 실천행위와 주민참여가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 적절히 대응하는지, 현장에 맞는 매체를 선택했는지 등의 사안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목표와 과정에 다른 결과에 대한 물음이다. 예술적 실천을 통해 발행한 걸과가 공적인 공유를 이루었는지, 작가와 매개자와 협업자와 수용자들은 각각 자기의 역할을 수행했는지, 최초의 목표가 지속가능한 결과를 얻었는지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과정에 대한 기록 작업, 사후관리에 대한 계획, 예산집행의 합리성 등 검토해야할 대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공영역에서의 예술적 실천은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를 점검하는 것으로부터 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공론장은 ‘집단화된 사적 개인들의 영역’이다. 공공영역에서의 예술적 실천이란, 사적 영역에서의 예술 생산과 향유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거대담론의 영역이 잠재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총체성의 미덕을 견지하면서도 미시적 차원의 실천적 함의를 놓치지 않는 지역적 실천으로서의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자치와 분권의 시대를 맞아 지역성이라는 이슈가 주목을 받고 있다. 글로벌 네트워킹은 로컬 네트워킹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지역성이라는 화두는 오늘날 새로운 예술개념의 첨단을 이루고 있다.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현장으로 파고드는 일은 미시적 예술실천의 방법론 가운데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항목이다. ‘인권, 소수자, 여성, 인종, 계급, 노동, 국가, 가족, 지역주의, 전지구화 등의 문제에 대해 권력과 저항, 자본과 반자본, 전지구화와 지역주의 이슈’ 등을 뛰어 넘어 예술과 현실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영혼의 자유로움이 예술가의 몫이다. 이것은 예술가들이 공공영역을 형성하면서 예술적 실천을 담보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이다. 참여와 개입을 실천하는 예술, 비판적 성찰로서의 예술, 전위적 이슈의 생산기지로서의 예술은 도구적 유용성을 넘어 그 자체로 공공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것은 건축물미술장식품 같은 낮은 단계의 공공미술을 극복하고 예술적 공론장을 형성하는 하나의 대안이다. 건축물미술장식이 미술을 건축에 대한 장식으로 폄훼해온 것은 그것이 미술을 심미적 가치를 담보한 물질형식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공공미술은 그와 물질형식으로써의 공공미술을 포함하여 여타의 예술적 실천이 가지고 있는 성찰과 생산의 기능에 주목함으로써 예술적인 공공영역을 형성하는 주요한 매개로 자리 잡을 것이다.
- 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소위 제4차 공공미술포럼 발제문 200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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