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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 -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28) 구례 운조루

편집부


유교적 공간 분화....빼어난 자연과의 조화
압도적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구례 운조루를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민가로 꼽았다. 조선 한옥의 건축적 아름다움도 빼어나지만 여백의 마당과 건물이 함께 어울려 빚어내는 공간미학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룬 싱그러운 팔작지붕, 지표의 높낮이를 그대로 건물의 일부로 받아들인 자연친화적 조형감각, 그리고 유교적 질서를 건축학적으로 표현한 공간배치에서 운조루의 아름다움은 빛을 발한다.
구례 운조루는 조선시대 제택의 하나로,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번지에 자리한 중요민속자료 제 8호이다. 이집이 완공된 것은 영조52년(1776)인데, 처음 집터를 잡고 지은 사람은 유이주(柳爾, 1726~1779)라 전한다. 아들 德浩(1757-1815)의 일기수록에 의하면, 유이주는 관직으로 외지에 머물러 있어, 직접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덕호에게 ‘全羅求禮五美洞家圖’를 보내어, 황무지를 개간하여 집터를 잡고 털끝 만큼이라도 계획과 틀림이 없이 1백여간의 집을 1776년 가을 9월에 완공하도록 하였다.
雲鳥樓는 북쪽으로 지리산 노고단 줄기의 하나인 삼태봉이 병풍처럼 둘려있고, 앞 남쪽으로 넓은 들과 섬진강이 흐르며, 남서쪽인 정방으로 안산인 오봉산이 있다. 이곳은 三台星 중, 上台인 ‘금구몰니(金龜沒泥)’, 中台인 ‘금환낙지(金環落地)’, 下台인 ‘오보교취(五寶交聚)’의 세 명당이 함께한 곳으로, 운조루는 바로 하태 오보교취에 자리하고 있는 세 명당 중 으뜸이라 한다. 실제로 집을 지을 때, 이 터에서 돌거북이가 나와 보관하여 오다가 분실하였다고 한다.
‘全羅求禮五美洞家圖’에는 솟을대문행랑채와 방형으로 둘러쌓은 담장 속에, 사랑채, 안채, 중대문간채, 사당채가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자리 잡고 있다. 주산과 운조루 사이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집 앞 장방형의 연못 저 멀리 너머에 안산이 둘러 있다.
조선시대의 제택이 갖추어야 할 공간 모두를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갖추고 있으면서 각 공간을 크고 작은 마당과 함께 적절하게 배분하였다. 남성적인 공간인 사랑채와 작은사랑채를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전체 집터의 서쪽에 두고, 여성적인 공간인 안채와 안사랑채를 안마당을 중심으로 동쪽에 두었다. 또한 상위의 공간인 몸채와 하위의 공간인 행랑채를 크게 북과 남, 안쪽과 바깥쪽으로 배치하였다.
장방형 연못 북쪽의 솟을대문간 행랑채는 대문간 서쪽으로 7간, 동쪽으로 11간이다. 솟을대문간 서쪽부터 청직이방, 아궁이부엌, 행랑방, 곳간이다. 본래 곳간에서 북쪽으로 꺾이어 초분처(草墳處)로 쓰던 2간이 돌출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동쪽으로는 3개의 헛간과 1간의 아궁이부엌, 본래 1간의 내측과 중문간이었던, 지금은 방으로 바뀐 모두 7개의 행랑방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남성공간인 사랑마당이다. 이 마당 북쪽 높은 기단위의 사랑채는 정면 5간, 측면 2간의 장방형평면에, 북쪽으로 2간이 돌출되어있다. 사랑방은 정면 1간 측면 2간이나, 정면 1간은 실제적으로 2간 간살이다. 2간 간살의 도리에 기둥을 세우지 않아 1간이 된 것이다. 사잇장지를 들여 아랫방과 윗방으로 나누어 취침 때 아랫방을 침방으로 쓴다. 때문에 뒷벽 창호 중앙에 사잇장지 벽이 서있다. 긴 도리를 두어 기둥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안정된 구조는 아니라 생각된다. 또 사랑방과 대청 전면에 툇마루가 붙어있어, 대청과 아랫방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고 하나, 이 또한 잘못된 판단이다. 사랑방의 남면한 창호는 출입용 창호가 아니라 南窓인 것이다.
대청은 정면 2간 측면 2간이고, 대청 북쪽으로는 1간의 책방과 1간 齋室이 돌출되어 있고, 서쪽으로 정면 1간 측면 2간의 누마루가 연이어져 있다. 대청의 전후면, 사랑방과 누마루 사이에는 창호가 설치되어 겨울철 찬바람을 막아준다.
누마루의 삼면은 창호 없이 개방되었고, 또 계자난간을 설치하고, 추녀에는 활주를 세웠다. 북쪽에는 ‘二仙樓’, 서쪽에는 ‘足間亭(柳爾의 3대손 柳億의 호)’ 편액이 걸려있다. 이집의 堂號인 ‘雲鳥樓’ 편액은 사랑대청의 남쪽에, 사랑대청의 동쪽에는 ‘歸晩窩(유이주의 호)’, 사랑방 남쪽에는 ‘隨分室’ 편액이 걸려 있다. 사랑채는 굴도리 3량 가구이고,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장남의 공간인 작은사랑채는 안채로 출입하는 안중문간의 남쪽으로 西向하여 있다. 이것은 많은 제택에서 사랑대청을 중심으로 큰사랑과 작은사랑을 ㄱ자로 꺾이게 배치한 것과는 크게 다른 보다 격이 높은 공간계획이라 하겠다. 안중문간과 붙은 헛간 1간 남쪽으로 반간의 골방, 작은사랑방(弄月軒) 1간, 누마루(歸來廳) 1간이 자리 잡고, 방과 누마루 서쪽 앞면으로 툇마루가 붙어 있다. 본래에는 누마루 남쪽으로 중대문간과 행랑방들이 솟을대문간행랑채까지 연이어져 있었고, 이곳 중대문간으로 들어서면 안사랑마당이었다.
사랑마당의 서쪽, 담장 아래에는 길이 22m, 폭 6m 크기의 화단이 있다. 매화, 동백, 감, 석류, 은행, 대나무 등이 식재되어 있고, 동백나무 밑에는 石床(길이 2.3m, 폭 1.3m)이 놓여 있다. 사랑채의 높은 기단 중앙에 6단의 디딤돌이 있는 돌계단을 놓고, 계단 좌우로 폭 1.4m의 화계를 조성하여 석류, 무궁화, 회양목 등을 심었다. 사랑방 앞마당에는 큰 소나무 한그루가 식재되었다. ‘家圖’에는 4그루의 붉은 꽃나무들과, 꽃나무 사이에는 괴석들이 그려져 있고, 사랑방 앞에는 큰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사랑채 뒤로 돌출된 글방 북쪽벽선을 따라 동쪽에 담장을 세워 나무청 마당과 구분하였다. 담장과 사랑채 사이의 사랑 뒷마당에도, 꽃나무들과 괴석들이 그려져 있다. ‘三水公柳爾影幀’에는 운조루 서쪽으로 대나무 숲이, 그 북쪽으로 소나무들이 그려져 있다.
여성공간인 안채는 사랑채의 동쪽 끝에 접해 있는 안중문간으로 들어선 안마당 북쪽에 ㄷ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면 2간 측면 1간반의 안방, 정면 2간 측면 1간반의 대청이 남향으로 자리 잡고, 서쪽으로 2간 부엌, 1간 찬광이, 동쪽으로 1간반의 건넌방, 1간의 아래건넌방, 1간 아궁이부엌, 1간 광, 1간광이 남쪽으로 뻗어 있다.
안방은 안주인이, 건넌방은 며느리방이다. 때로 건넌방을 노모가 쓰고, 뜰아랫방을 며느리가 쓰기도 한다. 그러나 운조루에서는 본래 노부모가 쓰던 안사랑채가 남쪽 一 자형 광채 동쪽에 연이어 있었다.
ㄷ자형 안채는 작은사랑과 연이어진 一자형 곳간채와 마주하여 장방형 안마당을 형성한다. 이 안마당 안방 앞쪽 기단 아래에는 물확과 돌절구가 놓여 있고, 남쪽 곳간 앞으로 장독대, 연자방아, 맷돌이 있다. 안채의 서북쪽, 사랑채의 북쪽 담장 안으로는 우물과 나무청이 자리하고 있으나, 본래 ‘家圖’에는 2간의 종현각이 있었다. 안채는 굴도리 5량가구로, 홑처마인데, 네 모서리에 합각을 형성하고 있다.
안사랑채는 노부모의 생활공간으로, 안채 남쪽의 곳간채와 연이어져 있었다. 2간의 안사랑방과 1간의 누마루(石亭亭)로 구성되었었는데 지금은 소실되고, 내측 1간이 자리 잡고 있다. 안사랑마당 남쪽으로 솟을대문간행랑채에서 북쪽으로 돌출되었던 3간의 초당이, 그리고 동쪽 담장의 협문 밖으로는 초가집인 서당이 있었다. 초당은 큰애기들의 생활공간이었었다.
사당은 안채의 동북쪽,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본래 지금의 사당 자리는 영당(影堂)이 있었고, 사당은 앞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민가 중에서 대군, 공주, 군, 옹주의 집인 궁집과 사대부의 집을 말하는 제택은 한반도의 자연환경적인 영향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정치, 사회, 사상 등의 인문환경적인 영향 모든 것을 가장 잘 들어내 주고 있는데, 전국적으로 많은 남아 있다. 이들 제택 중에서 구례 雲鳥樓는 보다 치밀한 계획과 합리적인 채(棟)와 間의 空間分化와 統合, 좋은 목재, 우수한 官營木手들, 그리고 긴 공사기간을 투입하여 이루어낸 빼어난 第宅인 것이다. / 주남철(고려대 명예교수ㆍ건축학)
필자는 '조선시대 주택의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한국미학시론', '전통주택의 연구', '新生活 100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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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 (28) 中·日 민가와의 비교
中, 좌우대칭 棟 분화 특징 …日, 시각적 구성, 間 나눠
조선시대의 제택과 비교할 만한 중국의 주택은 한족이 지은 북경의 四合院이다. 목조와 벽식구조가 혼합된 주택건축으로, 지금 남아있는 것들은 청대(1644-1911)의 고위관료나 거상들의 주택들이다.
사합원은 골목길인 후통(胡同)에 면한 倒座房 외벽, 동남쪽에 자리 잡은 대문을 들어서면, 마주한 곳에 화려하게 치장한 影壁이 서있고, 동서로 긴 영벽의 중앙에 내문인 垂華門이 서있다. 대문은 집모양의 屋宇式과 단순한 壁式이 있는데, 고위층의 대문은 屋宇式으로 우리의 솟을대문과 같은 것이다. 영벽과 도좌방 사이의 좁고 긴 공간을 前院이라 한다. 도좌방은 하인방과 창고들로 구성되어 있다.
垂華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주인의 거처인 正房이, 동서 좌우로 자녀들의 공간인 廂房이, 가운데의 방형 마당 院子를 둘러싸고 있다. 이렇게 네 채[棟]의 건물과 院子로 이루어진 하나의 공간단위를 一進이라 하며, 사합원의 최소단위이다.
보통 북경의 고위층 사합원은 二進 이상으로 구성된다. 이때에는 垂華門과 마주하는 正房은 청당(過廳)이 되고, 청당을 지나 다시 마주하는 채가 正房이 된다. 이때 처음 院子에 면한 廂房은 집안의 일족이나 손님의 공간이 된다.
正房 뒤로도 정방과 마주한 後房이 있어, 前院처럼 좁고 긴 後院을 형성한다. 後房에는 閨秀房과 부엌등 취사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사합원은 방형의 대지에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각 채(棟)를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는데, 유가의 질서와 대가족제도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한국의 제택이 유가의 대가족제도, 남여유별의 공간표현이면서도, 비좌우대칭균형과 채(棟)와 間의 分化를 이루는 것과는 달리 四合院은 좌우대칭적이면서, 채(棟)의 분화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第宅이나 四合院 모두 외부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안에서는 개방적인 점은 같으나, 제택은 보다 주변의 동산이나 냇물 등 자연환경을 제택 안으로 끌어드리고, 또는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 자연과 융합하려는 공간이라면, 사합원은 자체 내, 院子에서 자연을 재현하려고 한다. 이는 전국토의 3분의 2가 산지인 풍토와 도시적인 풍토의 서로 다른 환경에 기인된 것이라 하겠다.
제택과 비교할 일본주택으로는 무로마치시대(1336-1573)에 완성된 書院造라 하겠다. 헤이안시대(794-1185)의 寢殿造와는 달리, 건물의 배치에 있어 좌우대칭을 벗어나 자유로운 배치를 택하며, 또 거실에서 장식벽감(床間), 선반(棚), 부서원(付書院)등이 모두 비좌우대칭의 구성을 한다. 간막이가 발생하여 건물 안에서 필요로 하는 숫자의 방을 자유롭게 나누어 만들게 되었다. 이때 작은 방들에는 여닫이문이 불편함으로 자연적으로 가벼운 장지문, 창호지문, 판문, 삼나무문들로 대치되고, 기둥도 짜임새가 나쁜 원기둥에서 각기둥으로 바뀌게 되었다.
창호에 있어 창호지를 안으로 붙이고, 방들이 작아짐으로 바닥 전체에 다다미를 깔고, 천장이 발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각적으로 내부에서는 선적인 구성을 하고 외적으로는 면적인 구성을 하여, 운조루와 같은 제택에서와 반대되는 시각적 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書院造는 匠明에서 보듯이, 설사 크고 작은 채들이 건축되지만, 이 채들은 모두 複道로서 서로 연이어지고, 채 속에서 간막이로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雲鳥樓와 같은 제택이 채(棟)와 間의 分化라 하면, 書院造는 間의 分化라 할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주택이 채(棟)의 分化로 대륙적이고, 일본의 주택이 間의 分化로 해양적이라 하면, 한국의 주택은 채(棟)와 間의 分化로 대륙적이며 해양적인 반도적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 주남철(고려대 명예교수ㆍ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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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 (28) 전문가 조사: 한국의 최고 민가
팔작지붕의 싱그러움

구례 운조루 이외에도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은 곳은 안동 하회마을의 忠孝堂, 北村宅, 양진당을 비롯하여 경주 양동마을의 송동만 가옥과 香檀, 그리고 觀稼亭 등이다.
풍산 류씨의 집성촌인 화회마을의 충효당(보물414호)은 서예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종택이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낸 서예가 죽은 후 문하생과 사림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여 솟을대문과 행랑채를 갖춘 품격높은 한옥을 건립한 것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높은 죽담 위에 지어진 사랑채가 여유있게 펼쳐진다. 넓은 대청으로 바람이 소통되면서 넉넉하고 시원하다. 팔작지붕의 널찍한 사랑채는 뒤편 안채와 연결되면서 유교적 질서를 구현하고 있다.
양진당(보물 제306호)은 조선 명종시 관찰사를 지낸 입암 류종영(1515-1573) 선생의 부자가 살았던 집이다. 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바로 ‘입암고택’이란 현판을 단 사랑채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의젓하게 서있다. 충효당과 달리 양진당은 대청에 분합문을 달았고 정면에 쪽마루와 난간이 있다. 사랑채 옆으로 행랑채가 붙어있어 약간 답답한 느낌을 주지만 선비의 결기를 느끼게 하는 당당함이 있다. 북촌댁은 경상도 도사를 지낸 류도성 공이 철종 13년(1862)에 건립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한옥이다. 시원한 마당과 팔작지붕의 날렵함이 주변 경관과의 조화 속에 고졸한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낸다.
경주 인근의 양동마을은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에 의해 형성된 양반마을로 화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 한옥마을로 손꼽힌다. 산언덕에 위치한 관가정의 전통적인 ㅁ자형 건물로서 장괘하고 시원스럽다. 관가정이란 말은 김매는 모양을 본다는 뜻이다. 높은 곳에 팔작지붕의 사랑채를 올려 마을 어귀 논밭들이 잘 보이도록 했다. 香檀은 회제 이언적을 위해 중종이 회사한 가옥으로 매우 보인다. 여유가 넘치는 관가정과 달리 향단은 빼곡한 구조를 하고 있다. 다양한 기능의 건물들이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미로같은 좁은 길들이 서로 조화롭게 이어진다. 한옥의 아기자기함과 유교적 공간배분, 그리고 뛰어난 조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빼어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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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운조루 ★★★★★ ㅣ 하회마을 충효당★★ 북촌댁·양진당 ★★ 양동마을 손동만 가옥과 향단★★ 관가정 ★★
※ 추천해주신 분들: 김동현 한국전통문화학교,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봉렬 한예종, 김지민 목포대, 이강근 경주대, 장경호 기전문화재연구소, 정영호 단국대 박물관, 주남철 고려대, 천득염 전남대 이상 총 9명 가나다순.
※ 출처-교수신문 2006.12.18
▼ 하회마을의 충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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