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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없는 美는 거짓이다

문광훈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메디치 예배당’의 궁륭(1524년, 플로렌스). 직사각형의 규칙적·기하학적 구조에서 느껴지는 질서, 규칙적 질서의 둥근 배치에서 오는 움직임은 온전하고 완전한 무엇, 미의 어떤 원형을 떠올리게 한다.
벌써 수년 전 일이지만 귀국한 지 얼마 안됐을 때 ‘에스테틱’이라 적힌 간판을 길거리 지나다가 본 적 있다. 미학 강연장인가,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게다가 다들 깨끗하고 화려한 실내를 갖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은 주름을 없애고 코도 높이는 화장과 성형의 장소였다. 이것도 미와 무관하지는 않다.
아름다움의 욕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또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다. 그것은 이전에도 그랬고, 중국이나 일본, 서구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의 이런 광적 추구가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은 스타들의 세계일 것이다. 스포츠나 대중음악 분야도 그렇지만 영화계가 대표적이다.
할리우드에서 미는 흔히 날씬함에 있다고 여겨진다. 살 빠지면 예뻐 보이고 날씬하면 인기가 치솟는다. 그래서 배우는 더욱 살을 빼고, 감독은 이런 배우를 열심히 찾아낸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살을 빼야 한다. 최근의 한 신문은 이것을 ‘할리우드의 굶주림 나선’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즐겨 굶고, 먹더라도 음식을 나중에 토해낸다. 그러다보니 음식을 아예 삼킬 수 없는 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거식증(拒食症)이나 음식구토증이 그것이다. 많은 배우의 다리는 나뭇가지처럼 말라있고, 심할 때는 죽기까지 한다. 실제로 적잖은 배우들은 병원에서 약물치료를 받는다.
여기서 보는 것은 단순히 미의 광적 추구나 취향의 획일주의가 아니다. 그런 것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피상화에서 야기되는 심미적 보편성의 실종이다. 구치 가방을 들고 폴로 모자를 쓰면 미를 선도하는 듯 자랑하지만, 아무도 이 진짜가 참으로 진짜인지 묻지 않는다. 그래서 가짜는 진짜와 뒤섞인다. 그러나 진선미가 얽혀있는 것이라면, 미의 왜곡은 진과 선의 왜곡이기도 하다. 이런 폐단은 우리의 경우 더 심해 보인다. 미의 역사는 길지 모르지만, ‘미에 대한 논리적 사고의 역사’, 즉 미학적 전통은 우리에게 짧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왜곡이 왜 일어나는지는 간단치 않다. 오늘날의 미는 생활 속에서, 스스로 의식하는 가운데 대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라이프스타일(life style)’로 나타난다. 그래서 누구나 미를 즐기고 스스로 구현하는 듯한 득의감 또는 착각을 갖고 있다. 기미와 주름을 제거하면 아름다워진 것 같고, 쌍꺼풀 수술을 하고 가슴을 키우면 시대의 미적 기준을 충족한 것처럼 여긴다. 자신이 미를 직접 주도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낭비를 늘 탓할 수는 없다. 근검함도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고, 이 사회가 불필요한 수요에 의해 지탱되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광고나 선전은 이런 가수요를 나서서 부추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문화의 추동요인에 낭비적 요소가 있는 까닭이다. ‘장식의 나르시시즘’이라고나 할까. 자신을 (불필요하게) 꾸미면서 이렇게 꾸민 자신에 의해 (유용하게) 지탱되는 잉여적 측면이 문화에는 분명 있다. 이 나르시시즘은 소비에서 가장 활개를 친다. 우리는 쇼핑할 때 흔한 만족감에 젖지 않는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말하기란 까다롭다. 그것은 미학사를 보면 시대와 지역에 따라 계속 변해왔기 때문이다. 가령 중세 때 미는 신이나 신적 완전성의 표현이었다. 18세기까지 미는 대체로 예쁜 것이었고, 19세기로 오면 추함도 포함된다. 미의 탈신화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현대에 올수록 심해진다. 그만큼 미의식이 소극적·부정적으로 되는 것이다. 현대의 미는 너무 분화돼 심지어 미 없이도 이해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왜 미가 아직도 매력적인가?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은, 간단히 말해, 그것이 나의 느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도 느끼는 것-객관적으로 공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나와 대상은 미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칸트는 이것을 ‘주관적 일반성’이라고 불렀지만, 미는 내가 느끼는 것(주관적·감각적)이면서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는, 느낀다고 생각하는(객관적·이성적) 것이다. 따라서 미는 감각과 사고, 개인과 사회를 ‘잇는’ 일이 된다. 이 매개 속에서 바른 미는 현실을 성찰한다.
그러므로 감각만의 미는 반쪽의 미다. 감각이 사유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 미는 거짓이다. 참된 아름다움은 나와 타자, 현실과 이념을 잇고, 이 이어짐 속에서 두 세계의 대립을 넘어선다. 미는 이어짐이고 넘어섬이고, 이 넘어섬 속의 균형이다. 그리고 이 균형 속에 행해지는 반성이다. 반성의 능력이야말로 참된 아름다움이다. 왜냐하면 반성으로 하여 대상의 미는 나의 미가 되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메디치 예배당’(1524)의 궁륭은 이런 느낌을 준다.
이것은 르네상스 건축예술의 고전적 미를 잘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이 아니더라도 천장의 모습은 어떤 질서와 움직임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질서는 직사각형의 규칙적이고 기하학적인 구조에서 올 것이고, 움직임은 이 규칙적 질서의 둥근 배치에서 올 것이다. 그래서 리듬 속에서 상승감을 느끼면서도 온전하고 완전한 무엇을 떠올린다. 현대의 심미적 시각에서 보면 고답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미의 어떤 원형을 생각케 한다. 심미적 반성으로 나는 나를 넘어선 전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전체란 온전한 것, 그래서 좋은 것이다. 결국 미는, 플라톤이 말했듯 선에 대한 참여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에는 이런 온전성이 빠져있다. 감각은 사고되지 않고, 외양은 내면과 겉돌기 때문이다. 예쁘고 젊고 날씬하고 섹시한 것이 미의 전부라고 여기는 사회는 가련하다. 가는 허리와 쌍꺼풀진 눈만이 미의 표본이라 불린다면, 우리는 이 표본을 누가 만들어내는지 물어봐야 한다. 유행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을 자기 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다. 미는 내가 대상을 얼마나 제어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이 이 화장술의 한국사회-무반성적 나르시시즘의 문화에서 내가 갖는 미에 대한 생각이다.
-경향신문 007.1.20 [천천히 사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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