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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 -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30) 종묘 정전

편집부


필요한 공간만을 담은 기품 있는 절제미
종묘란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 사당을 말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 최고의 사묘건축으로 단연 종묘정전을 으뜸으로 뽑았다.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와 정신이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종묘는 유교 건축으로서 사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단순하고 절제된 기품있는 미를 보여준다.

서울에 있는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거나 왕실과 관련된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악(樂), 가(歌), 무(舞)로 구성된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행하는 종묘제례는 그 자체로 탁월한 무형유산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무형적 가치 이외에, 종묘는 외부공간이 자아내는 신성함과 엄숙함으로 종묘를 찾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주는 건축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종묘의 중심을 이루는 정전 일곽은 사방으로 네모나게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남쪽 담장 중앙에는 신문(神門), 동쪽에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 그리고 서쪽에는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각각 나있다

남문인 신문을 통해 묘정으로 들어갈 때 받는 공간적 감동은 가히 충격적이다. 신문의 가운데 문은 원래 혼령이 다니는 통로이다. 이 신문에 들어서면 정전 일곽은 죽은 자의 공간이 어떠한 곳인가를 보여준다. 바로 눈앞에는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가 펼쳐 있고, 멀리 북쪽에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동서로 길게 서있다. 묘정 월대는 제관과 집례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도열하는 공간으로, 아악과 여타 의식 절차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월대는 단(壇)의 일종인데, 지면으로 부터 단을 높여 종묘가 죽은 자의 혼이 머무는 천상의 공간임을 암시한다.
월대는 하월대와 상월대로 구성되어 있다. 하월대의 중앙에는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신문에서 정전 앞의 상월대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다. 신로와 접한 동쪽 한 곳에는 검은 전(塼)을 깐 방석 모양의 부갈위판이 있다. 부갈위판은 궁궐의 혼전에서 3년상을 치르고 종묘로 이안되는 왕이나 왕비의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종묘 정전은 상월대 북쪽에 있는 기단 위에 서있다. 정전은 묘정을 향하는 앞면에 퇴칸이 나 있고, 나머지 세 면은 벽체로 감싸 내부를 어둠의 공간으로 만들어 신성함을 높이고 있다. 앞쪽의 퇴칸 기둥 사이는 벽체가 없이 묘정으로 트여있다. 정전 내부로 출입하는 문은 각 칸마다 두 짝씩 달렸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한쪽 문짝이 약간 뒤틀려 틈새가 벌어져 있다. 이 틈새는 죽은 자의 혼이 드나들게 하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이면서, 공기가 통하도록 해서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는 역할도 한다.
정전 내부는 전체가 트인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뒷벽에는 각 칸마다 신주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 정전은 당(堂)은 같으나 실(室)은 달리하는 ‘동당이실제도(同堂異室制度)’를 따른 건물이다. 정면 내부 뒷벽에는 제상과 감실이 각 칸마다 배설되었으며, 감실과 감실 사이는 발을 늘어뜨려 칸을 구분하고 있다. 각 감실에 모신 신주는 서측에 왕, 동측에 왕비의 위치가 되게 봉안되었고, 감실 전면에는 신탑(神榻)이 있어 제향 때 신주를 모신다. 신탑 뒤에 있는 신주장(神主欌) 좌-우에는 각각 책보장(冊寶欌)을 배설하였다. 감실 주위에는 사방과 천정으로 황색의 망건장을 쳤으며, 앞에는 따로 황색의 외면장을 쳐서 마치 생전의 침상과 같이 꾸몄다.
종묘는 전주시 풍남동에 있는 경기전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와 태조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은 이런 점에서 다를 뿐 만 아니라, 경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본전 건물 전면 가운데에 왕릉의 정자각(丁字閣)과 같은 건물을 덧달아 내어 제사를 지내는 점이 종묘와 다르며, 둘레에 회랑을 두르고 남쪽 회랑 가운데에 내삼문을, 다시 그 밖으로 외삼문을 둔 배치 형식도 종묘와 다르다.
동서로 긴 장방형 평면을 한 맞배지붕 건물인 본전의 공포가 다포인 점도 익공으로 지은 종묘와 다르고, 건물 내부에 두 개의 고주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고, 단 양옆으로 일산과 천개를 세운 점도 종묘 정전의 내부와 다르다.
종묘 정전의 건물 배치는 개별적으로 대칭에서 벗어난 구성을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예로서, 정전 동.서월랑을 보면, 남북축을 중심으로 대칭적인 배치를 하고 있으나, 그 세부 처리는 그렇지 않다. 동월랑은 트여 있으나 서쪽 것은 벽으로 막혀 있어 대칭 속에서 비대칭을 읽게 한다. 뿐만 아니라 종묘는 대칭적인 배치 속에서도 변화를 담고 있다.
정전 신로는 남문인 신문에서 시작되어 묘정을 이루는 상월대 계단에 가 닿아 있는데, 미묘하게 중심축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대칭인 듯하지만 정확하게 대칭이 되지 않게 처리하고 있다. 정(靜)을 통하여 동(動)을 느끼게 하는 배치를 해서 대칭적인 묘정 월대와 기단, 그리고 지붕에 동적인 기운이 감돌게 한다.
뿐만 아니라, 종묘건축에는 의례공간의 위계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의 기단과 처마와 지붕은 위계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고 있다. 정전 신실과 좌-우 협실, 그리고 동.서 월랑 지붕, 처마와 기단 윗면의 높이는 신실, 협실, 월랑의 순으로 낮고, 기둥 지름과 높이도 마찬가지로 신실, 협실, 월랑으로 가면서 작고 낮게 처리되어 있다.
또, 종묘는 제례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화려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종묘의 모든 건축 처리는 극히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다. 묘정 월대와 기단 위의 건물은 신로를 표시하는 선, 몇 개의 판위, 그리고 장식이 배제된 건축 구조 등 과감하게 생략된 조형과 단순한 구성을 하여 종묘에 구현해야 할 건축 의도를 잘 성취하고 있고, 단청도 극도로 절제되었다. 이와 같이 종묘건축에는 신로, 월대, 기단, 담 등 꼭 있어야 할 것만 있고 그 속에 필요한 공간만 담고 있다. 이러한 구성, 구조, 장식, 색채의 간결함과 단순함은 종묘건축을 상징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종묘건축에서 읽는 단순하고 절제된 건축구성은 종묘건축을 자체 완결적이고 기품 있는 건축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상징적인 의미까지 읽게 해준다. 그것은 마치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그 속에 죽은 자와 산 자가 한데 어울려 영적인 교류를 가능케 하는 듯하다. 그것은 종묘에 신성한 힘이 항상 감돌게 하는 원천이다.
서울에 있는 종묘는 태조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1394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395년 9월 29일에 준공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41년(1608) 정월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5개월 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완공하게 된다. 그 후 몇 차례 중건을 거쳐 현재의 규모로 되었다.
우리나라의 종묘는 기본적으로 중국 북경에 있는 명.청 때의 태묘와 같이 엄격한 좌우대칭적인 배치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 지세에 순응하도록 필요한 건축물들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건물을 구성하는 축을 통일시키지 않고 있다. 중국의 태묘와 마찬가지로 예제(禮制)의 적용을 받아 종묘가 건립되었지만 중국의 그것과 건축 형식과 배치에서 다르다. 이는 예제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고 하기 보다는 이해는 같게 하지만 적용에 차이가 있음을 뜻한다. 이는 종묘건축제도의 한국적 수용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이다. 뿐 만 아니라 북경의 태묘는 현재 그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종묘는 아직도 그 기능이 살아있어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이상해 / 성균관대 - 건축학
필자는 미국 코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 위원장이다. 주요 저서로는 ‘종묘, 서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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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3중 담에 싸여 日, 20년 마다 새 신궁
중일 종묘와의 비교
종묘제도는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중국의 종묘는 천자와 제후가 조종(祖宗)에 제사지내는 장소였다. 중국은 일찍이 서주(西周)시기에 정치, 종교와 관련되는 의식을 행한 공적인 장소인 종묘가 있었다. 주나라 시대 중국의 종묘는 죽은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나 기타 제례를 위한 장소이었지만, 조상의 혼령에게 바치는 청동기 제기를 보관하는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였다. 진(秦)나라가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폐기하면서 종묘는 황제의 조상을 모시는 조묘(祖廟)를 가리키게 되었다. 명.청 시대에 이르러 중국의 종묘는 가장 완정한 제도로 정착하였다. 현존하는 청나라 때의 태묘는 자금성 앞 동쪽에 있는데, 명나라 초기인 1420년(영락 18) 건립한 것을, 1648년(순치 5) 중수한 것이다.

‘태묘’로 불리는 청나라 종묘는 3겹으로 담이 쳐진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바깥담은 동서 폭 2백94미터, 남북 길이 4백75미터가 되는 직사각형이고, 그 주위는 백송이 숲을 이루었다. 그 다음 담은 동서 폭 2백8미터, 남북 길이 2백72미터가 되고, 남쪽에 위치한 정문인 유리전문(琉璃?門)을 통해 들어가면 명당수에 놓은 백옥교가 있다.
이 백옥교를 건너면 태묘로 들어가는 정문인 극문(戟門)이 있다. 극문을 들어서면 멀리 앞으로 태묘의 대전인 전전(前殿)이 웅장하게 서있다. 태묘는 이 전전과 중전, 그리고 후전으로 구성되었다.
전전과 중전은 같은 기단 위에 앞뒤로 배치되었다. 전전은 향전(享殿)의 기능을 가졌는데, 각 실마다 황제와 황후의 위패를 소목제도로 모시고 매년 4회 거행하는 대향(大享) 때 중전에 모신 신주를 향해 제사지냈다. 전전의 정면은 11칸인데, 가운데 9칸은 정전이고, 양쪽 각 1칸은 협실이다. 전전 앞의 동무와 서무는 각각 정면 15칸인데, 동무에는 공왕(功王) 13명, 서무에는 공신(功臣) 13명의 신위를 모셨다.
중전은 9칸인데 침전(침궁)이다. 동당이실로 되었으며, 태조를 포함한 각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후전은 9칸이고 사방으로 둘레담이 쳐져 있다. 후전은 청 순치 황제의 4대 조상 신위를 모신 곳으로 조묘(?廟)라고도 한다. 북경 태묘는 현재 노동인민문화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의 종묘에 해당하는 건축은 혼슈(本州) 미에켄(三重縣) 동부 이세(伊勢)에 있는 이세진구(伊勢神宮) 이다. 이세진구는 일본 각지에 걸쳐 있는 씨족 신을 대표하는 총본산으로 크게 정궁인 외궁과 내궁으로 나뉜다. 기원전 2년에 일본 천황 가문의 선조인 여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명을 받아 내궁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세진구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개의 터를 만들어 놓고, 20년에 한 번씩 신궁을 똑같은 모습으로 세우고, 다른 터에 있는 이전의 건물을 헐어버리는 것이다. 이를 시키넨조타이(式年造替)라고 한다.
일본은 7세기 후반 ‘대륙’으로부터 건축에 새로운 기법과 구법이 보급된다. 6세기에 한국에서 불교가 전래된 후 7세기 후반에 새워진 호류지(法隆寺) 금당 등 사원건축은 불교 전래 이전의 건축에 비해 많은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일본 건축의 변화는 제사시설에도 나타난다.
이세진구는 그 이전에도 시키넨조타이 제도에 의해 그 형식과 의장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지만 현재와 같은 건축제도가 확립된 것은 7세기 후반으로 본다. 이 시기에 형성된 이세진구는 ‘대륙’으로부터 새롭게 기술의 영향을 받아 전국을 통일한 왕권이 제사의 통제와 정비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세진구의 시키넨조타이는 헤이안쿄우(平安京)으로 천도를 한 직후 국가의 종묘로서 이세진구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행정개혁이었다. 그러한 정치적 배경이 깔려있기 때문에, 이세진구 사전(社殿)은 단순히 그 이전의 건축 형식을 계승하거나 외래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왕권을 상징하는 독특한 건축형식을 갖춘 하나의 기념물로 지은 것이다.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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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 (30) 전문가 조사 : 유교 건축과 다른 이례적인 美 보여줘
종묘 정전 ★★★★★★★★ 전주 경기전 ★★★★★ 서울 동묘 ★★★
전문가들은 단순하고 절제된 건축구성으로 조선시대 건축가들의 뛰어난 공간창조 예술성을 보여줬던 종묘 정전을 한국 최고의 사묘건축으로 선정했다. 더불어 전주 경기전과 서울 동묘 역시 종묘 정전과는 다른 美적 특징을 보여준 사묘건축으로 추천했다.
전주 경기전은 태종 10년(1410)에 창건된 건물로써,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봉안된 곳이다. 경기전은 가운데 정전 영역과 정전 동쪽의 실록각 영역, 서쪽의 복원된 부속채 등 세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세워진 건축물 가운데 이례적으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경기전은 단청의 문양과 색채가 매우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기품을 지닌 다포계 형식의 건물이다. 다포식 건물은 화려함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소박함을 추구하는 유교건축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경기전이 이례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은 조선왕조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경기전은 조선초에 건립된 5개의 태조진전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어 건축사적으로 더욱 그 의의가 크다.
서울 동묘는 중국 촉한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에게 제사를 지냈던 묘로서 선조 32년(1599)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601년에 완성됐다. 현재 동묘의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부장인 관평, 주창 등 4명의 상이 모셔져 있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6칸이고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지붕 무게를 받치는 장식은 새의 부리처럼 뻗어 나온 익공계 양식이다. 관우의 사당인 동묘의 조성은 임진왜란에 기인한다. 임진왜란 시기 원군으로 명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건너왔으며, 그들은 관우를 軍神이자 전신으로 이미 추앙하고 있었고, 이는 동묘 건축의 배경이 됐다.
종묘 정전이 선왕에게 제사지내는 최고의 격식과 검소함을 건축공간으로서 구현했다면, 서울 동묘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 내부의 화려한 장식과 벽체 전체를 벽돌로 구성하는 등의 배치는 중국식으로 볼 수 있으나, 익공이나 화반대공 및 단청 등 세세한 부분은 조선적인 모습을 농후하게 보여준다. / 배원정 기자 wjbae@kyosu.net
※ 출처-교수신문 2007.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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