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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①] 돼지 수난극-한국사회, 엽기성으로 현대예술을 능가하다

진중권


시민들이 '퍼포먼스'라 부른 아기돼지 능지처참
미술관의 돼지 사체보다 황당한 '감각의 테러'
비난하는 사람들도 사형제 잔혹성은 의식 못해
우리사회 폭력성·전근대성 보여준 '문화 아이콘'


트럭 한 대가 시청 앞을 지난다. 짐칸에 두 명의 노인이 알몸으로 서 있다. 둘 사이에는 거대한 나무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는 뻘건 색으로 ‘멸공통일’이라 적혀 있다.
생방송 중에 바지를 내린 젊은 아이들의 치기도 아니고, 대책 없이 보수적인 머리 위에 허옇게 센 머리카락을 입은 노인들이 반공의 이념을 위해 성스런 십자가를 들고 국부를 드러낸다. 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가? 이 사건이 한국의 행위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좌절감을 안겨 준 모양이다.
“도대체 한국에서는 예술을 할 수 없어.” 44라는 작가의 푸념이다. 사회 자체가 워낙 엽기적이라서, 예술가들의 상상력으로는 그 황당함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 아름다움으로 감동을 주는 고전예술과 달리, 현대예술은 새로움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주려 한다. 그런데 한국은 현실 자체가 워낙 그로테스크해서, 예술가들이 연출하는 인위적 충격으로는 도대체 사람들을 자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느 나라에서 반공과 누드와 할렐루야를 합쳐 하나의 별자리를 그린단 말인가?
얼마 전 누드-반공-할렐루야를 능가하는 수준 높은(?) 사건이 있었다. 군부대 이전에 항의하는 이천 시민들이 서울 한 복판에서 새끼 돼지의 사지를 찢었단다.
흔히 이를 ‘능지처참’이라고들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거열형’(車裂刑)이라 불러야 한단다. 물론 동물을 잔혹하게 학대하는 이상한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하지만 벌건 대낮에, 시장과 의원이 참석한 공식적 자리에서, 평범한 시민들의 손으로 이런 엽기를 ‘퍼포먼스’라고 버젓이 저지르는 나라가 또 있을까?
●동물 사체의 오브제
유감스럽게도 돼지를 작품(?)의 소재로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6년에 영국의 작가 다미엔 허스트는 죽은 돼지를 두 쪽으로 잘라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들어 있는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그는 이렇게 죽은 동물들을 통째로, 혹은 슬라이스로 쳐서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곤 한다. 그 첫 시도가 <살아있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인데, 이 심오한 형이상학적 제목의 실체는 오스트리아에서 잡은 타이거 상어를 포름알데히드로 채운 유리 용기에 담아 놓은 것이다.
마르셀 뒤샹이 1917년에 변기를 미술관에 들여놓은 이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자격을 얻게 되었다. 옷걸이, 자전거 바퀴, 세제 박스, 통조림 깡통 등 이런 식으로 졸지에 작품이 된 사물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허스트의 오브제는 특별히 도발적이다. 왜? 온갖 것을 재료로 사용하는 예술에서도 동물의 사체를 재료로 쓰는 것은 꺼려왔으나, 그는 ‘생명의 경외’라는 전통적 가치로 인해 터부시되어온 그 일을 저질러 버렸기 때문이다.
더 잔혹한 것도 있다. <엄마와 아기>(1993)라는 작품에서 그는 어미 소와 송아지를 각각 절반으로 절단해 포름알데히드에 담가 놓았다. 뭘 말하려는 걸까?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이 삶과 죽음과 성을 담고 있다고들 하는데, 솔직히 센세이셔널리즘을 넘어서는 철학 같은 것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동물을 학대하는 병적(morbid) 취향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 20세기 후반 예술의 ‘아이콘’으로서 생존 작가들 중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이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감각의 테러
가련한 아기 돼지는 분노한 시민들의 손에 사지가 찢긴 채 아스팔트 바닥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잔혹한 장면을 담은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가 된 채로 네트 위를 떠돌았다. 하지만 붉은 색을 머금은 분홍색 고기 덩어리는 흐릿한 모자이크 상자 뒤에 숨어서도 이미 충분히 참혹해 보인다. 이 역시 예술사에서 처음 보는 장면은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책형>(1944). 짐승의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고기 덩어리가 매질당해 십자가에 걸린 예수의 몸처럼 축 늘어져 있다.
‘현대예술’이라 하면 피카소나 칸딘스키를 떠올리던 당시 관객들에게 베이컨의 작품은 참을 수 없는 시각적 테러였을 것이다. 왜 그는 고기 덩어리를 난자하는 잔혹극을 연출했을까? 관객의 “신경세포 위에 직접 작용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데카르트 이후 서구인들은 자신을 ‘정신’으로 착각해 왔다. 하지만 감각의 폭력을 당하면 자신을 신과 같은 정신적 존재로 생각하던 인간들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한 마리의 짐승임을 깨닫게 된다.
두뇌로 올라가지 않고 신체로 내려와 감각을 자극할 때, 이미지는 시각적 구조물이 아니라 촉각적 자극이 된다. 베이컨은 신경세포에 가하는 이 자극을 ‘회화의 폭력’이라 불렀다. 그의 그림처럼, 사지가 떨어져 나간 채 아스팔트 위를 나뒹구는 새끼 돼지의 몸뚱이는 시각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촉각적 폭력의 주체가 된다. 그것은 시민들의 신경세포를 난타했다. 그들의 분노는 양식을 파괴하는 이 잔혹극이 자신들의 감각을 폭행했다는 느낌에서 나온다.
●죽은 동물의 퍼포먼스
이천 시민들은 새끼 돼지 잔혹극을 ‘퍼포먼스’라 불렀다. 동물을 퍼포먼스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63년에 백남준은 독일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피가 흐르는 소머리를 전시한 바 있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회화를 설명할 것인가>(1965)라는 퍼포먼스에서 요셉 보이스는 회칠을 한 얼굴로 죽은 토끼를 가슴에 끌어안고, 웅얼거리는 짐승의 언어로 몇 시간에 걸쳐 토끼에게 회화론을 강의했다. 인간과 동물의 소통을 회복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하지만 허스트와 베이컨과 보이스를 다 합쳐도 이천 시민들의 퍼포먼스를 따라가지 못한다. 죽은 돼지를 사용한 허스트와 달리 그들은 산 돼지를 사용했고, 화폭 위에서 폭력을 행사한 베이컨과 달리 현실의 공간에서 돼지를 난자했으며, 소통을 회복하려 한 보이스와 달리 인간과 동물 사이에 있어야 할 최소한의 연민마저 파괴했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원리가 한국에서는 차라리 일상의 질서에 속한다. 그리하여 이름 없는 이천 시민들의 전위정신이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작가들을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대로에서 산 동물을 도살하는 습속의 ‘전근대성’. 군부대의 이전으로 입을 이해의 손실을 타산하는 삭막한 ‘근대성’,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예술로 승화시키는 ‘탈근대성.’ 이 세 요소로 짜여진 별자리는 그 동안 퍼포먼스의 제왕으로 군림해왔던 ‘누드-반공-할렐루야’의 엽기를 가볍게 능가한다. 이 사건은 아마도 21세기 복잡한 한국 사회의 단층을 보여주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문명화 과정
양식(良識) 있는 시민들은 이 몰취미를 “야만적”이라 불렀다. 문명화 과정은 공개처형이든, 공개도살이든 잔혹성의 연출을 공공의 영역에서 감추어 버린다. 잔혹극을 포기한 인성은 이른바 ‘취미’(taste)의 섬세함을 갖게 된다. 그런데 현대예술은 어떤가? 문명화를 거슬러 취미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려 한다. 왜 그럴까? 이미 확립된 질서 너머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다. 취미가 없었던 문명화 ‘이전’과 취미를 포기하는 문명화 ‘이후’가 언뜻 비슷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둘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돼지 도살 퍼포먼스의 잔인성을 비난한다. 그들의 말대로 이 퍼포먼스는 문명화에 대한 야만적 테러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정작 사형제도 자체의 잔혹성은 의식하지 못할 게다. 잔혹한 범죄의 범인이 잡힐 때마다, 인터넷 공간은 17세기의 공개처형장이 되어 온갖 끔찍한 봉건적 처형방법을 제안하는 아우성으로 가득 찬다. 돼지도살 퍼포먼스가 그저 고립된 예에 불과할까? 혹시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에 널리 깔려있는 이 잠재적 폭력성의 단편적 드러남이 아닐까?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고 돼지는 희생되었다. 같은 이유에서 십자가에 달려 고기 덩어리로 생을 마감했던 한 사내의 말이 생각난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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