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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⑨기적의 이콘 - 거룩한 존재를 나타내는 ‘성상화’

이주헌

첨부파일 : 6000136444_20081202.JPG


인간과 절대자의 영적 통로·기적의 매개체로 ‘공경’
아름다움에 신앙 겹쳐져…정교회선 “신비체의 현시”
오늘날 우리는 모든 미술작품을 다 감상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많은 미술작품이 순수한 감상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목적과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동굴벽화를 그린 것은 사냥을 잘하기 위한 주술적 목적 때문이었고, 고대 이집트인들이 조각을 만든 것은 미라처럼 죽은 사람의 영혼이 거할 용기(容器)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비잔틴문명에서 발달한 이콘도 하늘과 땅을 영적으로 이어주는 소통 수단이자 공경의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오늘날 많은 관광객들이 미술관에서 이콘을 단순한 미술작품으로 감상하는 동안,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이콘을 여전히 거룩한 성물(聖物)로 공경하며 실제 예수와 성인들을 대하듯 그 앞에서 경건한 태도로 기도를 드린다. 심지어 이콘에 따라서는 기적을 일으키는 이콘이라 하여 그 미스터리를 인정하고 기적의 체험을 추구한다. 따라서 이콘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조형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이런 종교적 태도와 신앙을 함께 이해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 콘스탄티노플파 화가 <블라디미르의 성모> 1100~1130년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콘은 그리스어 에이콘(eikon)에서 왔다. 에이콘의 뜻은 ‘상, 꼴’(image)이다. 그러니까 상을 그린 그림이라는 얘긴데, 상의 대상은 예수나 마리아, 성인 같은 거룩한 존재와 십자가 같은 성물이다. 이콘의 기원은 초기 기독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6~7세기에 제작된 게 30여점 전해져온다. 물론 이콘이 제작되기 시작한 시기는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 조형의 측면에서 그 뿌리를 찾아가면 기독교 이전 지중해 일대의 이교도 성상화에 이른다. 이집트나 시리아에서 발견된 다산의 신이나 군신(軍神)을 묘사한 2세기 말경의 나무판 그림들이 그 예다.
하지만 동방정교회에서는 이런 학술적인 기원과는 다른 기원론을 이야기한다. 정교회의 시각에서 볼 때 이콘은 사람이 손으로 그린 데서가 아니라 신이 직접 자신의 상을 드러낸 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콘이 <손으로 그리지 않은 구세주의 상>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성상화가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그려진 이 이콘의 기원을 알아보면 이렇다.
예수 생존 당시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라는 중병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편지를 써서 예수에게 보냈다. 그때 화가를 딸려 보내 예수의 초상을 그리게 했는데, 불행하게도 화가는 예수의 초상을 정확하게 묘사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예수는 아마포를 들어 땀에 젖은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그러자 그의 이미지가 그대로 천에 새겨졌다. 신하에게서 이 천을 건네받은 에데사의 왕은 그 자리에서 씻은 듯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손으로 그리지 않은 예수의 상이 세상에 전해졌고 이것이 이콘의 기원이 되었다.
동방정교회의 이런 설명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이콘과 관련한 교회의 두 가지 중요한 생각을 전해준다. 첫째 이콘은 신으로부터 기원해 이콘을 공경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될 수 없으며, 둘째 이콘은 때로 놀라운 기적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교회의 신학적 견해로는, 모든 이콘은 거룩하고 신비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그 가운데 특별히 신의 선택을 받은 그림이 있다. 신은 그 이콘을 통해 기적의 역사를 베푼다. 이런 이콘은 성유를 발산하거나 병든 이를 치유한다. 혹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해 주고 백성들을 지켜 준다. 그 대표적인 이콘의 하나가 <블라디미르의 성모>다.

이 이콘은 콘스탄티노플 화파의 한 화가가 그린 것으로, 1131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크리소베르게스가 키예프 러시아의 대공 유리 돌고루키에게 선물한 것이다. 돌고루키의 아들 보골륩스키 대공이 1155년 블라디미르로 가져와 <블라디미르의 성모>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이콘이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1395년 티무르의 모스크바 침입 때다. 이콘을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급히 옮겨온 뒤 대공 바실리 1세는 그 앞에서 밤새 울면서 기도했다. 그러자 티무르 군대가 전투 한 번 치르지 않은 채 퇴각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기적에 놀란 모스크바 사람들은 이 이콘을 블라디미르로 돌려주기를 거부했고, 결국 모스크바가 계속 간직하게 됐다. 이 이콘을 통한 성모의 보호 역사는 1451년과 1480년 타타르 무리의 침입 때도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심지어는 1941년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해 왔을 때 스탈린이 이 이콘을 비행기에 실어 주변 상공을 비행하도록 하자 며칠 뒤 독일군이 퇴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교회는 이런 기적이 하나의 그림으로서 이콘 자체가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이콘을 공경하는 것은 그림 속의 성인을 영예롭게 하기 위한 것이지 그림을 영예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기적이 나타나는 것도 성인들의 기도를 통해 신이 역사한 것이지 그림 자체가 역사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블라디미르의 성모>를 끝내 돌려주지 않은 모스크바 사람들의 태도가 시사하듯 이콘은 단순한 기적의 매개 수단을 넘어 그 자체가 기적의 중요한 근거가 되곤 한다.

» 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블라디미르의 성모> 사례에서 보듯 다른 이콘을 놔두고 굳이 특정한 이콘에 집착하는 것은 그만큼 그게 더 ‘영험’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콘을 향한 신도들의 열정은 그림 속의 예수와 성모, 성인들을 향한 열정일 뿐 아니라, 이 험하고 불안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 줄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증표에 대한 열정이기도 한 것이다.
정교회 못지않게 교회를 성상들로 장식해온 가톨릭교회 역시 성상 공경이 성상 자체가 아니라 예수와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다만 성상의 기능과 관련해 기적보다는 교육적 역할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성서”라는 가톨릭교회의 표현이 시사하듯 성화나 성인 조각상은 글을 읽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한 훌륭한 교육 수단이었다.
기적의 매개물로는, 가톨릭의 경우 성상보다 성인들의 유해를 비롯한 성유물을 훨씬 더 중요하게 다루었다. 유럽의 성당이나 수도원은 예부터 예수의 수의, 십자가 조각, 못, 아기 예수의 음경 포피, 모세의 지팡이, 성인들의 유해 등 갖가지 성유물을 적극적으로 수집했다. 그 열기의 과격성은, 중세부터 서유럽 시장에 넘친 예수의 십자가 조각들을 다 합하면 로마 거리를 포장하고도 남을 거라는 주장이나 1231년 튀링겐의 성 엘리자베트가 죽었을 때 마르부르크 시민들이 유해 쟁탈전을 벌여 성녀의 머리카락뿐 아니라 손톱, 손가락, 귀, 젖꼭지까지 잘라 갔다는 기록에서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이콘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감동을 낳는다. 사람들이 이콘으로부터 기적을 기대하는 것은 신앙적 열정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감동에 의해 강한 정서적 자극을 받은 탓이 크다. 이런 이콘을 앞에 놓고 기적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 모른다. 그보다는 거기에 쌓인 수많은 영혼들의 간구와 소망, 눈물이 우리가 응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그 무엇이 아닐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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