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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25] 키아로스쿠로와 근대의 불안: 키아로스쿠로와 근대의 불안

이주헌


마녀사냥·집단적 사디즘·과학적 세계관과의 충돌…
에로스마저 잠들어 버리니 불안은 점점 깊어만 간다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첫날에 대한 묘사다. 빛과 어둠, 그것은 창조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미술의 시작을 의미한다. 빛과 어둠이 있어 형상이 있고 조형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서양의 경우 기원전 5세기 말 그리스 아테네 출신의 학자 아폴로도로스가 처음으로 음영 처리법을 창안했다고 한다. 로마시대의 빛과 그림자 묘사는 수많은 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완벽하지는 않아도 의식적으로 빛과 그림자의 현상을 관찰하고 표현하려 애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중세에 들어 이콘(아이콘·성화)이 부상하면서는 그림자의 묘사가 매우 약해진다. ‘천상의 빛’을 그리다 보니 물리적인 명암의 표현이 그만큼 등한시됐다. 그래도 중세 말까지 과거의 전통이 어렴풋이 이어지는데, 15세기 르네상스가 도래하자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사실적이고 과학적인 명암 처리가 시도되기 시작했다. 하이라이트와 음영을 포괄하는 이런 사실적인 명암 처리법을 서양미술사에서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고 한다. 키아로스쿠로는 이탈리아어 ‘밝다’(chiaro)와 ‘어둡다’(oscuro)의 합성어다. 서양화 특유의 고도로 사실적인 빛과 그림자의 묘사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키아로스쿠로는 16세기 매너리즘 시기에 더욱 또렷해진 뒤 17세기 바로크 시대로 넘어오면서 극단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 어두운 부분이 거의 검정색 일색이다. 디테일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극적인 대비로 명암을 처리하는 테크닉을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고 불러 따로 구분한다. 하지만 오늘날 키아로스쿠로 하면 단순한 명암법보다는 일반적으로 이 테네브리즘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곤 한다.
17세기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잠자는 에로스>를 보자. 어둠 속에서 한 소년이 깊이 잠들어 있다. 그가 에로스인 것은 날개와 바닥에 깔린 활과 화살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일단 하이라이트 부분을 빼고는 날개 대부분이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어 얼핏 형태조차 알아보기 어렵다. 아이의 몸도 빛이 떨어지는 부분만 제대로 인지된다. 그로 인해 아이의 몸이 검은 물 위에 떠 있는 부유물 같다.
상징의 측면에서 잠든 에로스는 일반적으로 사랑이 식어 버렸음을 의미한다. 에로스 주위에 남녀가 그려져 있다면 두 사람의 사랑은 이제 종장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그런 남녀가 보이지 않는다. 그로 인해 특정한 누군가의 사랑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랑 자체가 죽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 느낌이 들어서일까, 귀여운 에로스를 그린 그림임에도 그림은 들여다볼수록 관자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여기서우리가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이 불안의 감정이다. 빛과 그림자의 극단적인 대비는 대립과 충돌의 감정을 일으켜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빛과 그림자로 세상을 표현하는 게 숙명인 영화 가운데서도 <노트르담의 꼽추>(1939)나 <스토커>(1979) 등 회화 미술의 키아로스쿠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영화들에서 이런 원초적인 불안의 감정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왜 이처럼 불안을 자극하는 조형기법이 16~17세기에 고도로 발달했을까?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를 구교와 신교로 갈라놓았다. 이후 유럽은 종교전쟁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신구교도들은 서로를 사탄의 앞잡이로 보고 극단적인 적개심을 불태웠다. 자신은 빛이고 상대는 어둠이었다.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었다. 정신의 세계에서 강렬하게 대립한 이 빛과 어둠의 가치는 화가들로 하여금 강렬한 키아로스쿠로의 표출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당시는 또 광기의 시대였다. 1580~1660년에 정점에 이른 마녀사냥은 아무런 근거 없이 수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마녀사냥의 희생제는 구교 지역과 신교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단적인 사디즘은 인간 정신의 칠흑 같은 어둠을 드러낸 것이었다. 반면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이후 유럽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자 창조의 의미와 목적이라고 생각한 초월적 세계인식으로부터 자연법칙의 보편타당성에 기초한 합리적 세계인식으로 점차 넘어가게 된다. 이와 같은 자연과학적 세계관의 도래는 인간 정신의 빛을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기와 과학적 인식의 이런 공존 또한 키아로스쿠로에 대한 선호와 공명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그 어느 시기보다 빛과 어둠이 강렬히 교차한 이 시대에 사람들은 자연히 존재의 불안을 크게 느꼈다. 그 변화가 종교적·초월적 세계인식을 과학적·합리적 세계인식으로 대체하는 과도기적 현상과 맞물려 있었다는 점에서 이 불안은 근대의 불안이었다. 키아로스쿠로는 그렇게 유럽의 근대적 불안을 생생히 보여주는 징표였다. 키아로스쿠로 외에 이 시대의 화가들이 대상을 앞으로 확 잡아당겨 표현하는 ‘클로즈업’ 기법을 선호한 것이나 화면에 심한 경사각을 주는 단축법을 즐겨 사용하게 된 것 또한 불안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17세기 서양미술의 거장 렘브란트는 키아로스쿠로가 지닌 이런 근대적 불안을 한층 깊은 인간 이해의 수단으로 삼은 위대한 대가다. 렘브란트는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온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선배들이 이탈리아에서 배워 온 키아로스쿠로를 그가 표현한 것만큼 풍부한 울림으로 표출한 화가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카라바조의 키아로스쿠로와 렘브란트의 키아로스쿠로가 다른 것은 대비 속의 풍부함이다. 카라바조의 음영은 먹 그 자체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음영은 톤이 풍부하다. 어둠이 강렬히 엄습해 오지만 그 안에서도 각각 움직임과 마찰·조화·충돌이 존재한다. 그림자의 그런 유동성이 등장인물의 내면을 대변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림은 자연히 근대의 불안을 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근대인의 복잡 미묘한 심리까지 전해준다.
렘브란트가자화상을 많이 그린 데는 갈등하고 고뇌하는 근대인의 표상으로서 자신만큼 적절한 사람도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구교권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신교도의 나라 네덜란드 출신이다. 개인적으로는 낙천적인 성격에 세련되고 부유했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심각한 비운과 가난에 시달렸다. 그의 삶은 시대의 빛과 그림자와 개인사의 빛과 그림자가 중첩된 강렬한 키아로스쿠로의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는 결국 그뿐만 아니라 모든 근대인의 운명을 포괄해간 시대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드라마의 고갱이를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 가장 선명히 표출할 수 있었다.
이렇듯 근대인의 불안한 실존을 표현한 렘브란트와 관련해 조지프 헬러가 쓴 <자신을 그리는 렘브란트>의 에피소드는 그 불안이 오늘날 우리의 불안이기도 함을 잘 보여준다.
어느 날 렘브란트의 모델 한 사람이 화가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그린 인물들은 왜 그렇게 슬퍼 보입니까?”
“그들은 걱정을 하지.”
“무엇을요?”
“돈!”

» 카라바조, <잠자는 에로스>, 1608, 유화, 71×105cm, 피렌체, 팔라티나 미술관.
»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부분), 1605~06, 유화, 125×100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죽은 골리앗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음으로써 키아로스쿠로의 강렬함을 배가시키고 있다.
» 렘브란트, <이젤 앞의 자화상>, 1660, 유화, 111×90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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