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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28] 인상파와 미디어

이주헌


강렬한 빛의 화폭 뒤에는 뉴미디어 있었다
간편한 튜브물감·사진기·철도
화가들 어두운 화실에서 해방
바깥빛 담으려 야외로 야외로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해 미술 분야는 글을 쓰거나 책을 낼 때 상대적인 이점이 있다. 글의 대상을 거의 제 모습 그대로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 평론가는 음악을 글에 실어 들려줄 수 없다. 영화 평론가는 영화를 글에 실어 보여줄 수 없다. 하지만 미술 평론가는 작품 도판을 글에 실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독자는 작품의 실체를 접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자연히 독자는 상상이 아니라 도판을 근거로 글의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 작품을 잘 모를 경우 작품 자체에 대해 상상해야 하는 다른 예술 분야의 독자와는 처지가 다른 것이다.
이는 미술이라는 예술이 무엇보다 물질로 표현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술창작의 최종 결과물은 항상 물질이다. 이 물질은 인간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미디어이며, 미디어의 발달은 언제나 미술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를테면 청동기 문명의 탄생은 브론즈 조각을 낳았고, 텔레비전 문명의 탄생은 비디오 아트를 낳았다. 미술의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미디어의 역사가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를 보면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했다. 단순히 미디어를 어떤 목적과 방법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변화는 미디어 자체가 새로운 사회관계와 문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생겨난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자동차를 사용했는가 하는 것보다 자동차라는 미디어가 생겨났다는 것 자체가 인류의 삶과 문화를 얼마나 바꿔놓았는가를 돌아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석기, 청동기, 철기, 캔버스, 사진, 비디오, 레이저, 컴퓨터, 인터넷 등 새로운 미디어가 탄생할 때마다 이를 창작 수단으로 적극 활용해온 미술은 새로운 양식이나 사조가 그랬던 것 못지않게 이 미디어들의 진보에 의해서도 그 진로가 크게 바뀌어왔다. 아니, 양식이나 사조조차도 미디어의 변화에 크게 영향 받는 그런 역사를 밟아왔다. 대중들이 가장 선호하는 미술 사조의 하나인 인상파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인상파는 흔히 ‘빛의 화파(畵派)’로 불린다. 이전에 그려진 서양화들과 달리 태양빛이 날것 그대로 담긴 듯 밝고 화사한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기법상으로 보면 이는 명도가 높은 색상과 원색을 많이 쓰고 검정색보다는 보색으로 어둠을 처리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면 인상파 화가들은 왜 이렇게 밝고 화사한 색을 즐겨 쓰게 되었는가? 이전 화가들과 달리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자연과 화포에 쏟아지는 밝은 빛은 화가들로 하여금 붓으로 빛의 잔치를 벌이도록 만들었다. 이전 화가들은 풍경화를 그려도 주로 어두운 아틀리에에서 그렸다. 물론 간단한 드로잉 도구를 이용해 야외 스케치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본 작품은 대부분 아틀리에에서 그렸다. 그렇다면 이런 선배 화가들과 달리 왜 인상파 화가들은 굳이 야외에 나가 본 작품을 제작했는가? 여러 사회적·문화적 이유가 있겠지만, 미디어의 발달 측면에서 보자면 무엇보다 튜브 물감의 발명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튜브 물감은 영국에 살던 미국화가 존 란드가 1841년에 발명해 1850년대부터 상용화되었다. 튜브 물감의 발명 이전에는 화가들이 야외에서 유화를 그릴 때 돼지 방광에 물감을 집어넣어 사용했다. 그러나 돼지 방광 물감은 부피가 크고 번거로운 데다 물감을 짜려고 송곳으로 잘못 찌르면 터지는 경우가 있어 매우 불편했다. 튜브 물감은 이런 제약으로부터 화가들을 일거에 해방시켜 주었다. 가뿐하고 간편하게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튜브 물감의 발명이 인상파의 탄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가는 “튜브 물감이 없었다면 모네도, 세잔도, 피사로도 없었을 것”이라고 한 르누아르의 언급에서 잘 확인된다. 인상파의 탄생은 이처럼 양식사적 전개의 논리적 귀결이기 이전에 미디어의 발전이 낳은 물질적 변화의 산물이었다.
인상파에 끼친 미디어의 영향과 관련해서는 사진기의 발명도 빼 놓을 수 없다. 최초의 카메라라고 할 수 있는 다게레오타이프는 1839년 파리에서 처음 시판되었다. 어두운 아틀리에에서 나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들은 외광의 강렬함을 체험했지만 이를 과학적인 근거로 확인해준 사진을 보며 더욱 확신을 갖고 빛을 표현했다. 야외를 찍은 사진은 확실히 밝았다. 게다가 사진기가 이미지를 포착하는 과정이 바로 빛을 포착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화가들은 사물보다도 빛을 표현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빛의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붓질은 거칠어졌고, 그만큼 형태도 해체되었다.
모네가 <루앙 대성당> 연작을 제작했을 때 정치가이자 비평가인 그의 친구 클레망소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모네는 이 성당을 50점, 100점, 1000점이라도 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성당을 그린 그림들이지만, 오전과 오후, 사시사철의 빛이 다 달라 전혀 다른 그림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모네의 진정한 소재는 이렇듯 성당이 아니라 빛이었다. <루앙 대성당> 연작이 보여주는 빛의 그 천변만화하는 표정은 사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그릴 수 없는 표정이다.
드가는 사진의 스냅성에 특히 매료됐다. <르피크 자작과 딸들>을 보면, 주인공인 자작은 화면 중심에서 한참 벗어나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고, 맨 왼쪽의 키다리 신사는 몸이 화면 가장자리에 의해 세로로 잘렸다. 자작의 딸들은 화면 하단에 허리가 끊겨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것 같다. 고전 회화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이런 불안정한 구도는 막 움직이는 사람을 촬영한 스냅 사진에서나 나타나는 것이다. 드가는 누구보다 사진 촬영을 즐겼고, 이처럼 사진의 스냅성을 그림에 적극 이용했다.
인상파의 탄생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미디어는 기차다. 1825년 세계 최초의 철도가 영국 스톡턴~달링턴에 놓여 증기기관차의 시대를 연 이래 1870년 프랑스의 철도망은 총 1만9200 킬로미터에 달했다. 사람들은 여가를 즐기기 위해 기차를 타고 먼 교외까지 나갔으며, 이런 레저 시대의 도래는 가뜩이나 외광 표현에 목을 맨 화가들로 하여금 더 좋은 풍경을 찾아 밖으로 돌게 했다.
기차를 타고 행락객들과 함께 야외로 나간 화가들에게 자연의 풍경은, 푸생의 그림에서 보듯 신의 손길이 스친 정연한 그 무엇이거나 밀레의 그림에서 보듯 농부의 애환이 어린 그 무엇이 아니라, 그저 소풍의 즐거움에 물든 휴양지거나 행락지였다. 철도의 탄생과 더불어 이렇듯 미술사상 처음으로 풍경이 단순한 행락의 무대로 형상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뱃놀이>에는 풍경을 행락의 대상으로 보는 이런 도시인의 시선이 무척이나 또렷이 담겨 있다. 여전히 실재하고 있던 농촌의 고통과 어려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풍경과 농촌의 의미가 이렇게 변해 버렸다.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한 매클루언의 언급은 미술에서도 변함이 없는 진실인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주헌
원본 : http://www.hani.co.kr/arti/SERIES/201/353296.html
1.모네, 아르장퇴유의 뱃놀이, 1872, 유화, 48x7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2.드가, 르피크 자작과 딸들, 1875, 유화, 79x118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
3.모네, 루앙 대성당(햇빛 속의 서쪽 정면), 1894, 유화, 100x66cm,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 드가, 르피크 자작과 딸들, 1875, 유화, 79x118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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