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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국보순례] [41~50] 2010.01.01~03.11

유홍준

[41] 지증대사 적조탑비
세밑에 새 국보가 탄생했다.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智證大師) 적조탑비(寂照塔碑)'가 보물 138호에서 국보 315호로 승격된 것이다. 지증대사(824~882)의 일대기를 담은 이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최치원이 짓고, 분황사의 83세 노스님 혜강이 쓰고, 새겼다. 최상의 비석돌로 손꼽히는 보령 오석(烏石)에 새긴 것이어서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획 끝 하나 변하지 않고 윤기 나는 까만 돌 속에 글씨가 하얗게 드러나고 있다. 여초 김응현은 남한에 있는 금석문 중 으뜸이라고 했다.
대사의 본명은 도헌(道憲)이다. 불과 아홉 살 때 어머니의 만류를 무릅쓰고 부석사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는 운수행각의 고행에 나섰다. 그런 중 숲길을 지나는데 나무꾼이 나타나 '먼저 깨친 사람이 그 깨달은 바를 나중 사람에게 나눠줌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며 사라졌다. 스님은 그 뜻을 받아 계람산 수석사에서 법회를 여니 대중이 대밭처럼 빽빽이 들어찼다고 한다. 스님의 명성이 높아지자 경문왕이 '새가 자유로이 나무를 고르듯이' 찾아와 달라고 초대했지만 '진흙 속에 편히 있는 나를 화려한 강물에 띄우지 마십시오'라며 응하지 않았다.
어느 날 문경에 사는 심충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희양산 봉암(鳳巖)계곡의 자기 땅에 절을 지어 달라고 하자 가보고는 '여기에 스님이 살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되리라' 하며 절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봉암사다. 헌강왕이 등극하면서 '좋은 인연은 같이 기뻐하고, 먼지구덩이는 온 나라가 같이 걱정해야 한다'며 스님의 가르침을 구하자 서라벌 월지궁(月池宮;안압지)으로 가서 한차례 설법을 베풀었다.
그리고 다시 봉암사로 돌아가고자 하니 왕은 눈길이 미끄럽다며 한사코 붙잡다가 결국 가마 한 틀을 내주었다. 그러나 스님은 지팡이를 짚고 가며 병자가 생기거든 태우라고 했다. 그런데 도중에 자신이 병에 걸려 그 가마에 실려 절집으로 돌아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이 가져온 슬픔을 최치원은 이렇게 적었다.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에 빠졌도다.'(星回上天 月落大海) 나라에서는 '지증'이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사리탑에는 '적조'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래서 이 비의 이름이 '지증대사 적조탑비'로 된 것이다.
[42] 이인상의 설송도
눈이 많이 내렸다. 생활에 불편은 많았지만 눈다운 눈이 내렸다는 즐거움도 있었다. 세상엔 눈꽃보다 아름다운 꽃이 없다고 한다. 고궁으로 눈꽃 구경 갔다가 백설을 머리에 인 소나무를 보니 저절로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의 '설송도(雪松圖)'가 떠올랐다. 바위 위에 솟아 있는 두 그루 노송이 눈에 덮인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한 그루는 낙락장송으로 곧게 뻗어 올라가고 한 그루는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단순한 소재이지만 화면 상하 좌우를 대담하게 생략하여 소나무의 늠름한 기상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동양화로는 드물게 여백 전체를 엷은 먹빛으로 채워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 점 속기(俗氣) 없는 고아(古雅)한 그림이다.
연암 박지원의 '불이당기(不移堂記)'에는 이공보와 능호관 사이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가 들어 있다. 어느 날 이공보가 능호관에게 잣나무 한 폭을 그려달라고 청하자 얼마 뒤 '눈이 내리네(雪賦)'라는 시를 전서체로 써서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부탁한 그림은 좀처럼 보내오지 않아 독촉했더니 능호관은 이미 주지 않았냐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공보가 '그때 준 것은 글씨였지 그림이 아니었네'라고 하자 능호관은 웃으며 '그 글씨 속에 그림이 다 들어 있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그림에는 문인화만이 지닌 높은 차원의 미학이 들어 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외형적인 형태보다 내면적 진실성을 중시했고,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는 품격(品格)을 담아내는 데 무게를 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능호관 그림의 진수를 잡아내기 힘들다. 당대의 안목들은 우리에게 그의 예술에 감추어진 비밀을 말해주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그의 그림에서 진실로 주목할 것은 문기(文氣)라고 했다. 김재로는 능호관 그림의 묘처(妙處)는 농밀(濃密)함이 아니라 담백(淡白)함에 있고, 기교의 빼어남이 아니라 꾸밈없는 필치에 있다며 '오직 아는 자만이 알리라'라고 했다.
올해로 능호관 이인상은 탄신 300주년을 맞이한다. 머지않아 그의 예술을 기리는 기념전이 열릴 것이니 그때 우리는 명화 중 명화로 손꼽는 이 '설송도'를 보면서 격조 높은 문인화의 세계를 한껏 만끽해 볼 일이다.
[43] 금강산 금동보살상
고려시대 불상이라고 하면 으레 관촉사(灌燭寺) 석조관음보살상, 속칭 은진미륵(恩津彌勒)을 떠올리면서 통일신라보다 조각 솜씨가 떨어진다고 말하곤 한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진미륵은 이 지역에 있었던 예외적인 작품의 하나일 뿐, 왕실에서 발원(發願)한 불상은 더없이 정교하고 화려하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의 '금과 은' 특별전(3월 28일까지)에 나온 '금동세지보살상'(보물 1047호)은 상감청자를 빚어낸 고려인들의 솜씨를 남김없이 보여 준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나왔다는 이 보살상은 아담한 크기(높이 18cm)로 보관(寶冠)엔 세지보살(勢至菩薩)의 상징인 정병(淨甁)을 새겼고, 오른손으로는 연꽃에 감싸인 법화경 일곱 책을 살포시 잡고 있다. 날렵한 몸매를 휘감고 도는 아름다운 영락(瓔珞) 장식은 세 겹 연화대좌까지 길게 늘어졌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앳된 얼굴엔 명상의 분위기가 조용히 흐른다.
이런 스타일의 불상은 원나라 라마교에 연유한 것으로 장안사가 기황후(奇皇后)의 원당(願堂) 사찰이었다는 사실과 긴밀히 연관된다. 기황후는 명문가 여인으로 고려 출신 환관인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원나라 순제의 황후로 된 분이다. 기황후는 고국 장안사에 거액의 내탕금(內帑金: 판공비)을 내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고 많은 불상을 봉안했다고 하니 그때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국립춘천박물관에는 이와 쌍을 이루는 '금동관음보살상'이 한 점 있다. 보관에 화불(化佛)을 새긴 것이 다를 뿐이다. 이번 특별전에 함께 전시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지만 고려 조각예술의 자존심을 보여 주는 불상을 모처럼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안복이 아닐 수 없다.
[44] 새 보물 서예작품 40점
한석봉의 글씨를 비롯한 서예작품 20건, 40점이 보물로 새로 지정됐다. 안동 진성 이씨 종가의 퇴계 이황 필적, 강릉 오죽헌의 황기로(黃耆老) 초서, 안성 칠장사의 인목왕후 칠언시, 그리고 숙종·정조의 어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기왕에 국보·보물로 지정된 서예작품은 11점에 지나지 않아 국가지정 동산문화재(1287점)의 0.8%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어 가게 되었다. 조선시대 4대 명필인 안평대군, 양사언, 한석봉, 김정희의 작품 한 점 이상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는 '일괄 공모' 지정이 낳은 성과다.
그동안 문화재 지정에는 절차상의 모순이 있었다. 국보가 되려면 먼저 보물이 되어야 하고, 보물이 되려면 소장자가 지방자치단체에 신청해야 한다. 신청되지 않은 유물은 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아직 신청조차 하지 않은 보물급 문화재가 많다. 또 신청된 문화재는 일단 광역시도의 문화재위원회 심의부터 거치는데 여기서 억울하게(?) 지방문화재로 머문 경우도 없지 않다. 또 지금 같으면 보물도 되기 힘든 유물이 국보로 지정된 경우도 있다.
이에 연전부터 '일괄 공모' 방식이 도입되었다. 일정 분야의 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심의하는 것이다. 이미 백자달항아리 5점, 조선시대 초상화 33점, 조선시대 고지도 35점이 보물로 지정됐고, 그중 두어 점이 국보로 승격됐다. 이번에 실시된 서예작품 일괄공모는 '조선 전기(15~16세기) 대표적인 명필 11명의 작품 및 왕과 왕비의 글씨'였다. 100건, 184점이 출품됐고, 신청되지 않았지만 이미 중요한 유물로 알려진 18건, 55점이 직권 조사로 함께 심의됐다.
이와 같은 '일괄 공모'를 통한 지정 방식은 공개되지 않던 문화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고, 또 합리적인 상대 평가를 내릴 수 있게 했다. 새로 지정된 보물들이 특별전을 통해 일반에게 공개되고, 보고서를 겸한 도록과 자료집도 나오며 이에 따른 학술대회와 강연회도 열린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보·보물은 소장처의 자랑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함께 향유하는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번 '일괄 공모'는 과연 어떤 장르일까 자못 기대된다.
[45] 고려비색(高麗翡色)
박물관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다. '얘야. 고려청자는 우리 문화유산의 큰 자랑거리란다. 아름다운 빛깔로 유명하단다.' 아들이 묻는다. '아빠, 중국 청자는 빛깔이 다른가요?' '아마 비슷하겠지….' '그러면 어떤 점이 유명한 거죠?' 아버지는 '나는 잘 모르지만 전문가들은 그렇다고 한단다'라며 말꼬리를 내린다.
이런 광경을 볼 때면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 책임감과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 고려청자의 자랑은 한마디로 맑게 빛나는 비취색에 있다. '비색(翡色)'청자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청자는 유약의 빛깔이 푸른 것이 아니다. 유약 자체는 유리질로 맑게 빛날 뿐이다. 투명한 유약을 통하여 드러나는 바탕의 빛깔이 푸른 것으로 여기서 푸른빛이란 파랑(blue)이 아니라 초록(green)이다.
청자는 바탕흙 속에 들어 있는 아주 적은 양의 철분이 산화제1철(FeO)로 환원되면서 일으킨 녹변(綠變)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산화제2철(Fe₂O₃) 상태로 남아 있으면 황변(黃變)현상을 일으켜 노란빛을 띠게 된다. 그래서 같은 청자라도 초록빛, 노란빛, 고동빛, 진흙빛, 올리브빛, 연둣빛, 쑥빛 등 천태만상을 보인다.
청자는 4세기 중국 월주요(越州窯)의 초보적인 누런 청자에서 시작되어 10세기 송나라 때 완벽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연둣빛에 가까운 이 청자를 '비색(秘色)'이라고 했다. 그리고 12세기 휘종 때 관요(官窯)인 여요(汝窯)에서 만든 자기는 중국청자 중에서도 가장 질이 우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1123년(인종 원년)에 휘종의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徐兢)은 귀국 보고서로 '고려도경(高麗圖經)'을 펴내면서 '고려자기는 근래에 제작 기술이 아주 발전하여 색택(色澤)이 뛰어나다. 마치 여요의 것과 비슷한데 고려 사람들은 이를 비색(翡色)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중국의 최고 수준과 맞먹더라는 얘기다.
송나라 여요 청자는 약간 뿌연 빛이 감도는 청회색인 데 반하여 12세기 고려청자는 여지없는 비췻빛으로 맑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그래서 송나라의 태평노인(太平老人)은 '천하제일론'이라는 글에서 '고려 비색이 천하제일'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고려 비색 청자의 자랑이다.
[46] 歲畵 虎鵲圖
설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설날 옛 풍속 중에는 세배(歲拜), 세찬(歲饌), 세비음(歲庇蔭:설빔)과 함께 세화(歲畵)라는 것이 있었다. 설날 새벽에 잡귀가 들지 못하도록 대문에 액막이로 붙이는 벽사도(�J邪圖)를 말한다.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를 보면 설날의 방매귀(放枚鬼) 행사를 설명하면서 '이른 새벽 대문간에 처용(處容), 종규(鐘�s), 닭, 호랑이 등을 붙인다'고 했다. 이 전통은 오랫동안 이어져 19세기에 풍속을 기록한 김매순의 '열양세시기'에서는 '도화서(圖畵署)에서 세화를 그려 올린다. 금(金)장군, 갑(甲)장군을 그린 것은 궁궐의 대문에 붙이고 신선 그림이나 닭 그림, 범 그림을 벽에다 마주 붙인다. 때론 왕의 친척이나 가까운 신하에게 하사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서 도화서 화원(畵員)들은 세밑이면 이 세화를 그리느라고 매우 바빴다. 1867년에 반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화원의 임무 중 세화에 관한 사항이 별도로 나와 있다. '차비대령(差備待令: 비상대기) 화원(26명)은 각 30장(張), 도화서 화원(30명)은 각 20장을 섣달 스무날까지 그려 바쳐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궁중의 풍속은 자연히 민간에게도 전파되었다. 궁중의 세화는 권위적인 내용을 정통화가가 정통화법으로 그린 것이었지만 민간 세화는 모든 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중 인기 있는 그림이 '호랑이와 까치 그림(虎鵲圖)'이었다. 여기서 호랑이는 온갖 잡귀를 막아주는 벽사(�J邪)의 의미를 갖고,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는 보희(報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민화의 화가들은 이 호랑이를 아주 재미있게 변형시켜 까치가 호랑이를 골려주고 있는 유머를 담고 있는 것도 있다. 그래서 호랑이는 권세를 가진 양반과 관리, 까치는 서민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궁궐 대문부터 관아, 양반 저택, 민간에 이르기까지 세화를 붙이는 것은 설날을 축제의 분위기로 만드는 데 한몫했음이 틀림없다. 시각 매체가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 집집마다 색채 화려한 그림들을 붙여 놓았으니 마치 거리의 전시장 같지 않았겠는가. 경인년 설을 맞이하자니 서민의 세화였던 '호랑이와 까치' 그림이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47] 백자 망우대 잔받침
설에 지내는 차례를 비롯하여 제의(祭儀)의 기본은 술을 한 잔 올리는 것이다. 이때 사용되는 술잔의 형태는 연회석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세종대왕 때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오는 잔을 보면 한 쌍의 가느다란 손잡이가 단정하게 달려 있어 흔히 귀잔이라고 불린다. 잔에는 잔받침이 따로 있어 공손히 받들게 되어 있다. 흔히 전접시라고 불리는 이 잔받침에는 가는 전이 둘려 있어 자못 진중한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유교적 절제미와 제의적 엄숙성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 중종 연간에 만든 낭만의 술잔에는 조선적인 멋이 한껏 살아나 있다. 16세기 중엽에 광주 번천리 가마에서 구워 낸 '청화백자 망우대(忘憂臺) 잔받침'(리움 소장)은 백자 자체가 청순한 백색인데다 밝은 코발트빛 청화(靑花)로 들국화 다섯 송이와 그 위로 날고 있는 벌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스스럼없는 필치로 가을날의 스산한 시정을 남김없이 담아냈다. 마치 신사임당의 '초충도' 한 폭을 보는 것 같다.
대담한 여백의 미와 받침 가장자리에 성글게 돌린 동그라미 무늬에는 한국미의 중요한 특질로 꼽히는 무작위성(無作爲性)이 은연중 배어 있다. 이 시기는 바야흐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조선 성리학이 꽃피고 송강 정철, 면앙정 송순의 가사문학이 등장하던 때이다. 그런 국풍화(國風化)된 문화적 성숙이 있었던 것이다.
이 잔받침이 소품(지름 16㎝)임에도 보물 1057호로 지정된 것은 한가운데 쓰여 있는 '망우대'라는 세 글자 때문이다. 잔받침 위에 올려져 있는 술잔을 드는 순간 '근심을 잊는 받침'이라는 글자가 나타나게끔 디자인된 것이다. 이런 멋과 여유가 있을 때 우리는 저것이야말로 조선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무릎을 치게 된다. 그래서 이 잔받침을 보고 있자면 송강의 '장진주사(將進酒辭)'가 절로 떠오른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48] '백자 넥타이 술병'
조선 백자에서 병(甁)은 기본적으로 술병이다. 제주병(祭酒甁)은 엄숙한 분위기를 위해 순백자를 사용했지만 연회용 술병에는 술맛을 돋우기 위해 갖가지 무늬를 그려 넣었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과 십장생 그림이 단연 많다. 그러나 아마도 사대부들이 사용했을 술병에는 매화나 난초가 품위 있게 그려져 있고, 청초한 가을 풀꽃(秋草紋)을 아주 운치 있게 그려 넣은 멋쟁이도 있다. 그림 대신 목숨 수(壽)자나 복 복(福)자를 써 넣기도 했는데 거두절미하고 술 주(酒)자 하나만 쓴 것도 있다.
그런 중 기발하게도 병목에 질끈 동여맨 끈을 무늬로 그려 넣은 '백자 끈 무늬 병'(보물 1060호)이 있다. 이는 옛날엔 술병을 사용할 때 병목에 끈을 동여매 걸어놓곤 했던 것을 무늬로 표현한 것이다. 경기도 광주 도마리에 있는 15세기 백자 가마터에서는 술잔 받침에 이태백의 '술을 기다리는데 오지 않네'(待酒不至)라는 오언절구가 쓰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술병에 푸른 끈 동여매고/ 술 사러 가서는 왜 이리 늦기만 하나/ 산꽃이 나를 향해 피어 있으니/ 참으로 술 한 잔 들이켜기 좋은 때로다.'
이 술잔 받침과 쌍을 이루면 딱 알맞을 술병이다. 특히 무늬를 갈색의 철화(鐵畵) 안료로 그려서 마치 노끈이 달린 것처럼 실감이 난다. 이런 발상이야말로 한국인 특유의 멋과 유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남대 교수 시절, 시험문제로 '한국미를 대표하는 도자기 한 점을 고르고 그 이유를 설명하시오'라고 출제했더니 인문대생은 달항아리를, 미대생은 이 끈무늬 병을 많이 골랐다. 그 중 한 학생은 유물명칭은 잘 모르겠다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샘(선생님), 저는 백자 넥타이 병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맞았다! 이 끈무늬가 갖는 조형효과는 바로 넥타이와 같은 것이다.
[49] 청화백자 매죽문 항아리
현재까지 국보로 지정된 조선백자는 모두 19점이다. 그중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국보 219호 '청화백자 매죽문 항아리'(높이 41㎝)는 조선 초기 청화백자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거의 모든 도록에서 청화백자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그릇의 형태를 보면 어깨가 풍만하고 굽은 둥글게 밖으로 말려 있어 당당한 느낌과 함께 안정감을 준다. 백자의 빛깔은 아주 따뜻하고 차분하다. 몸체에 가득 그려진 매화와 대나무는 장식도안이라기보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당시 유행하고 있던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에서 매죽만을 청순한 분위기로 그려냈는데 필치와 농담의 표현이 아주 능숙하다. 일반 도공의 솜씨가 아니라 전문화가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성현의 '용재총화'를 보면 도화서 화원들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백자 가마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청화 안료도 페르시아산(産) 고급 회회청(回回靑)을 사용하여 밝고 맑은 푸른빛을 띠고 있다. 도자의 3요소인 기형, 유약, 문양 모두에서 완벽에 가깝다.
그런데 이 항아리는 조선시대 다른 청화백자와 달리 여백이 거의 없다. 항아리 아래위로 변형된 연판문(蓮瓣文)이 띠로 돌려 있고 목에도 꽃과 동그라미 무늬가 정연히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얼핏 중국도자 같은 느낌도 있다. 실제로 명나라 경덕진(景德鎭)가마의 청화백자와 유사한 점이 많다.
우리는 체질적으로 조선적인 멋이 한껏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만 조선 도자의 세계는 아주 다양하여 이처럼 국제적인 양식을 따르면서 완벽한 도예미를 추구한 작품도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항아리가 30여 년 전 처음 선보였을 때 혹 중국 도자 아닐까 의심한 이도 있었지만 광주 도마리 가마 백자임이 판명되었고, 얼마 후 서울 북촌의 어느 집 공사장에서 어깨 부분만 남은 똑같은 항아리 파편이 출토되어 한 쌍을 이루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라에선 국보로 지정한 것이다.
[50] 백자 철화 포도문 항아리
대한민국 우표로도 발행된 바 있는 국보 107호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는 사실상 조선 백자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작이다. 18세기 영조 때 금사리 가마에서 빚어낸 이 항아리는 높이 53.8cm의 대작으로 조선백자 중 가장 큰 키에 속한다. 백자대호가 대개 45cm임을 감안하면 그 볼륨감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풍만한 어깨에서 급격히 좁아지며 길게 뻗어 내린 곡선이 아주 유연한데 항아리 전체에는 늠름한 기상이 서려 있다. 엷은 푸른 기를 머금은 우윳빛 백색은 고아한 기품을 자아낸다. 거기에 항아리 전체를 한 폭의 화선지로 삼아 철화(鐵花)로 두 가닥의 포도줄기를 그린 구도의 배치부터가 일품이다. 필치도 능숙하여 굵은 줄기와 어린 넝쿨손의 표현에는 선의 강약이 살아나고, 동그란 포도송이와 넓적한 이파리에는 짙고 옅은 농담이 나타나 있다. 당대 일류 화공의 솜씨가 분명한데 아직은 짐작되는 화가가 없다.
이런 항아리는 흔히 장호(長壺)라고 해서 궁중 연회에서 술항아리로 사용했던 것으로 대개는 청화(靑花)로 그렸다. 그런데 유독 이 항아리는 희귀하게도 철화백자로 빚어졌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영조 26년(1750)조에 '값비싼 페르시아산 청화 안료는 용(龍)항아리 외에는 일절 금하니 철화로 그리라'고 명을 내리는 기사가 나온다. 필시 이런 사정으로 이와 같은 희대의 철화백자 명작이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항아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철도주식회사 전무였던 시미즈 고지(淸水幸次)라는 수장가가 비장(秘藏)하고 일절 세상에 공개한 바가 없던 유물이었다. 그러다 8·15해방 이후 일본인 귀국 때 문화재 반출을 금지시키자 집안일을 돌봐주던 사람에게 맡겨 두고 돌아갔던 것이다. 그 후 고미술상에 흘러나온 것을 당시 수도경찰청장으로 한때는 컬렉터로 유명했던 장택상의 소유로 되었다가 1960년에 김활란 총장이 구입하여 지금은 이화여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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