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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건진 역사]<1>도굴꾼, 주꾸미 그리고 발굴

편집부


어부가 건져 올린 신안 해저보물선 한국 水中고고학 첫 발
반도에 위치한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바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운 융성기에는 바닷길을 통해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를 일본과 중국 등으로 전파했고, 쇠퇴기에는 바다를 통해 밀려오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난을 겪기도 했다. 반만년 역사의 고비마다 민족의 영욕을 묵묵히 지켜본 바다다. 최근 이 바다의 유물과 유적을 발굴해 선조들의 생활과 문화를 연구하는 수중고고학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연구진이 수중 탐사를 통해 드러난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에 대해 고찰하는 ‘바다에서 건진 우리 역사’ 시리즈를 격주로 게재한다.
바다는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자 외부로 향한 교류와 소통의 공간이었다. 지구의 수많은 생물의 모태가 되는 바다는 많은 혜택과 함께 거친 파도, 숨겨진 암초 등으로 인간 활동에 제약이 되기도 한다. 바다를 오가던 배들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조난을 당하거나 좌초했는데, 이러한 선조들의 불행이 수중발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날 때 그것은 특정 시기를 오롯이 담은 역사적 그릇이자 타임캡슐이다.
옛 사람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을 통해 지난 시대 인류의 활동과 그들이 생산한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 고고학이다. 그중 바다나 갯벌, 강, 습지 등 물속에 있는 유적, 유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수중고고학이다.
수중발굴은 어로작업 중 유물을 발견한 사람들의 신고가 대종을 이루지만, 몇 번의 수중발굴은 도굴꾼의 활약(?)으로 시작됐다. 때로는 주꾸미와 같은 바다 생물이 바다 깊은 곳 유물의 존재를 알려주기도 했다. 2007년 5월18일 충남 태안군 안흥항 대섬 앞바다에서 주꾸미를 잡던 어부 김용철씨는 청자 대접으로 앞이 막힌 소라 통발을 건져 올렸다. 봄철 산란한 주꾸미는 외부로부터 알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의 조개껍질 등으로 입구를 막는 습성이 있는데, 조개껍질 대신 바다에 있던 청자를 사용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섬 인근 해역에 대한 수중발굴조사 결과 2만3000여점에 이르는 고려청자와 그것들을 싣고 있던 고려시대 선박을 인양하는 성과를 올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발굴이라고 하는 신안해저유물은 어부의 신고가 계기가 됐다. 1976년 1월 행정당국에 수중 유물 신고가 접수됐으나 담당자는 바다에서 이런 것들이 나올 리가 없다며 소홀히 했다. 그런 와중에 시중에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의 도자기가 밀거래되고 있다는 정보가 수사기관에 알려진다. 당국의 수사가 진행돼 도굴범 일당이 검거되면서 신안해저유물의 존재가 알려지게 됐다. 어부의 신고와 도굴꾼의 활개로 1976년 10월부터 신안 수중발굴이 착수됐다.
신안선이 묻혀 있던 조사해역은 물살이 너무 센 곳이라 정조시간대 1시간 정도만 작업이 가능하다. 또한 바다 밑은 개흙으로 뒤덮여 있고,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해군의 베테랑 심해잠수사도 위치를 찾는 데 한계가 있었다. 수감돼 있던 도굴범을 현장에 투입해 위치를 확인하고서야 발굴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느닷없이 찾아든 수중발굴 시작의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1977년부터 1984년까지 8년간 진행된 신안 보물선 발굴 성과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비교적 양호한 상태의 원양무역선 ‘신안선’ 선체와 용천요, 경덕진요 등 중국의 유명 가마에서 생산한 도자기 등 2만5000여점의 유물이 인양됐다. 배 바닥에는 28t의 중국 동전과 1000여개의 열대산 자단목도 실려 있었다. 또한 이 배가 1323년 6월 중국의 영파(경원)를 출발, 일본을 향해 항해 중이란 사실을 화물표인 목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신안선의 발굴로 우리는 원대 도자기의 최대 보유국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신안해저 유물발굴은 조사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도굴사건이 수시로 언론에 보도됐다. 압수된 도굴품만 2300점이 넘을 정도이니 도굴의 폐해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도굴의 자행이 심할 때 수사기관에서는 신안유물의 수사에 대한 기피현상도 있었다. 우연이라 하더라도 도굴꾼은 물론 수사관까지 손을 대는 사람마다 액운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신안 해저에서 인양한 유물 전시를 위해 1978년 12월 국립광주박물관을 개관했다. 광복 이후 지방에 국립박물관을 세운 것은 광주가 처음인데 신안해저유물발굴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바다에서 인양한 나무 선체는 스펀지처럼 연약해져 있는 상태로 가까운 곳에 보존처리를 위한 시설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목포에 보존처리장을 건립했고, 얼마 후 목포보존처리소로 정식 발족하면서 우리나라 목재유물보존처리의 산실이 됐다. 신안선 보존처리가 마무리되자 전시를 위한 시설을 건립하게 됐는데 이것이 국립해양유물전시관(현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출발이다. 신안해저유물 발굴은 두 개의 박물관시설 건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신안 해저발굴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대 사건이었음에도 선적된 유물이 우리 것이 아닌 중국 송·원대 유물이란 점에서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측면도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서막을 화려하게 장식하였음에도 수중고고학 전문가를 키워내지 못하고, 실질적인 발굴 작업을 오로지 해군에 의존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또한 인양유물에 대한 심층연구도 발굴기간 동안 잠시 반짝하다가 이후 오랫동안 침잠했던 원인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연구역량 부족과 함께 전문인력 배양에 소홀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일 것이다.
신안 해저발굴로 첫걸음을 내디딘 우리나라의 수중고고학은 30년을 훌쩍 넘기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둬 왔다. 이제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은 그동안 16건에 이르는 수중발굴과 수많은 고려청자, 고려시대 선박, 목간, 생활도구 등 옛 사람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많은 유물이 인양되었다. 언론에 통해 잘 알려진 태안해역에서의 고려 청자보물선과 고려 조운선 발굴성과는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갯벌 발굴이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우리나라 해안의 갯벌은 수많은 바다 생물들의 서식처로 오랜 옛날부터 선조의 중요한 삶의 기반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갯벌에서 1992년 중국 통나무배가 발견됐고 2006년에는 고려 후기 선박인 대부도선이 발굴됐다.
-세계일보 20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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