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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 아름답지만 우울한 초상

이선영

아름답지만 우울한 초상

  

이선영(미술평론가)

  

꽃은 그자체가 아름답기에 그림의 가장 인기 있는 소재 중의 하나가 되어왔다. 아마추어 화가들을 포함한 수많은 작가들이 꽃을 그리기 때문에, 사진과 같은 재현에 충실한 작품이 아닌 한, 한 작가의 특성을 가늠할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이때 그림은 반복 속의 차이가 일어나는 장이자, 매해 다시 피어나는 꽃처럼 영원히 회귀하는 사건들의 무대가 된다. 그러나 김미영의 작품에서 꽃은 아름답지만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색감에도 불구하고, 지문 같은 선이 가득한 꽃송이들은 징그러운 면도 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둥글거나 사각형의 캔버스는 자유롭게 자라야할 식물의 입지를 제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이에 대해 ‘최근에 작업하는 주제는 식물원에 갇힌 식물들이다. 식물원 안에 갇힌 꽃, 선인장들을 왜곡 및 변형하여 캔버스에 갇힌 모습으로 재현한다. 커다란 틀에 갇혀 재단당하는 식물들 모습에서 쳇바퀴 도는 일상에 매몰 된 채 삶에 대해 조망 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미대 졸업 후, 몇 년 간 남성 패션 복 회사에 다니면서 틈틈이 작업해온 독특한 이력과도 관계된다. 지금은 오산문화재단 레지던시에서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지만, 20대의 중요한 시기에 수년간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는 일을 하면서 많은 괴리를 느꼈을 것이다. 전업 작가로서의 삶이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돈이 되는 일과 아닌 일 사이의 괴리감은 특정인의 고민에 국한되지 않는다. 퇴근 후 자신의 방에 들어 앉아 펜으로 수없이 그은 선들은 몰입할 수 없는 직업의 세계에 대한 치유적인 행위이기도 했다. 물론 같은 행위가 상품 개발이나 판매촉진을 위한 일에도 다소간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당시 김미영은 펜으로 그린 것을 확대하여 캔버스에 출력해 매장의 쇼윈도에 걸기도 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단순히 장식이나 편리성을 넘어서, 드로잉에 기반 한 작업에 확장성을 줄 수 있는 부분이다. 복제를 통한 확대는 그려진 선의 무의식적 차원을 드러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회사에서의 업무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한 일은 아니다. 파편화된 분업의 사회에서 전 존재를 걸고 하는 작업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김미영에게도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생업을 위해서 벽지 위에 그렸던 꽃과 ‘퇴근 후’ 자신 만의 화폭에 그린 꽃의 차이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과 작업을 병행하거나 양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의 갈등에서 수없이 반복된다. 작업은 디자인과 달리 고객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나와의 소통을 타자와의 소통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문화와 예술의 차이로도 반복된다. 융복합이니 창조경제니 하면서 떠들어대던 각종 ‘문화융성’ 사업들이 예술을 빙자해서 사익을 채우는 거대한 사기행각으로 이어진 최근의 사건이 말하듯, 예술은 그러한 지배적 문화로 환원될 수 없는 면이 존재한다. 



예술은 형식적이면서도 화려한 지배 문화, 즉 관료주의와 상업주의 바깥에 있다. 예술의 이러한 주변적 입지는 근대 이후 예술이 안고 있었던 지속적인 문제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직업과 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가. 누군가는 명백한 목적이 설정된 행위에 매진하여 쟁취해야 하는 것에서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바로 작가 일 것이다. 김미영의 작품 속 식물은 스스로 나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고 개발되고 판매되는 등, 거듭되는 목적이 설정되어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김미영의 작품 속 식물의 줄기는 쭉 뻗어있지 못하고 살짝 비틀려 있고, 어디선가 뽑혀 와서 한시적인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는 듯 그 토대가 생략되어 있는 것도 있다. 잎은 푸른색과 관계없이 칠해지기도 하고, 아이가 그린 것처럼 이상한 각도로 비틀려 붙어있기도 하다. 화면 가득히 그 얼굴을 내밀고 있는 꽃송이는 마치 증명사진처럼 누군가의 초상처럼 보인다. 


아마도 수많은 소재 중에서 그것만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는 작가의 초상일 것이다. 관객과 마주하고 있는 화면 안의 것은 얼굴로 보인다. 그것은 그림이라는 거울 안의 얼굴이다. 그 얼굴은 대체로 예쁘게 나타나지만, 다른 요소들과의 조화를 결여한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비추지 않는다. 상상은 거울 안에서 조각난 신체들이 붙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미영의 작품에서 분리된 것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끝없이 요동치는 선들이다. 식물이라는 소재 또한 그러하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태양을 쳐다보는 식물은 지하와 지상과 천상을 이어주는 매개적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매개자로서의 식물이라는 소재에 담긴 신화적 측면은 식물 자체가 가지는 환각적 측면과도 관련된다. 김미영의 작품 속 선들이 만들어내는 어른거리는 환영은 환각적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환각적인 선과 비현실적인 색채, 그리고 식물의 결합이 있다. 


피터 퍼스트는 [환각제와 문화]에서, 고대 아즈텍 시인들에게 있어서 ‘꽃’은 신성한 환각제를 뜻하는 은유라고 지적한다. 머리에 꽃을 꽂고 다녔던 1960년대 하위문화의 어법으로는 의식의 확장을 야기한다. 도취를 야기하는 식물의 환각적 인 힘은 고래의 신화나 종교 그리고 현대의 하위문화 뿐 아니라, 담배나 술, 향수 같이 일상적 차원에서도 확인된다. 김미영의 환각적 선들은 식물이라는 소재와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자아낸다. 작품 속 힘을 주는 선인장은 남미의 인디언들에게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피로와 두려움을 잊게 해주던 환각 식물인 페요테 선인장을 떠올린다. 꽃에 자연적으로 있었을 엽맥은 더 강조되어 있다. 어떤 상황에서 지각은 평소보다 더 확장될 수 있다. 선의 흐름은 꽃의 객관적인 형태와는 상관이 없다. 그것들은 대부분 참조대상과는 무관하게 자체적으로 휘몰아치는 선들이며 재현적이기 보다는 장식적이거나 표현적인 역할을 한다. 


미술사에서 야수주의와 표현주의를 구별할 때 ‘장식인가 표현인가’하는 기준이 있기도 하지만, 양자는 앙리 마티스의 경우처럼 하나로 수렴되기도 한다. 김미영의 작품에서 따스하고 화사한 파스텔 톤의 색은 장식적이고, 때로 괴기스럽게 휘몰아치는 선들은 표현적이다. 식물은 이 둘을 적절하게 버무리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꽃을 참조만 할 뿐, 결국 마음속의 꽃을 그린다는 점에서 형태와 색은 참조 대상으로부터 자율적인 차원에 놓인다. 꽃이 있는 배경은 마치 블루 스크린을 친 것처럼 평평하고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완전한 추상은 아니다. 추상이 아닌 이유에 대해 작가는 거기에는 자신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입체감은 명암법 대신에 선으로 수행된다. 작가는 꽃보다는 선에 더 집중한다고 말한다. 선이 출렁거리다가 꽃이 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래서 꽃은 한시적인 주제일 수 있다. 꽃이라는 대상보다는 꽃을 포함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조형언어가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작품 제목은 꽃이나 꽃과 관련된 어떤 내용이 아니라, 마치 숫자로 된 암호처럼 기재되어 있다. 작가는 제품 품 번을 생각했다고 한다, 김미영의 작품에서 선과 꽃의 관계는 보다 내재적이다. 선은 생물체처럼 스스로 자라나는 것이다. 꽃은 무한정 자라나는 선들에 일정한 한계를 부여한다. 물론 그러한 한계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길을 잃게 되는 미로를 만들곤 하지만 말이다. 이 미로에서 길 찾기에 도움이 되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제공되지 않는다. 지시대상과 완전히 일치되지는 않는 선은 꽃의 향기나 소리에 대한 추상적인 표현처럼 보인다. 선들은 꽃향기처럼 퍼져나간다. 누군가의 은유인 꽃은 제자리에 붙박혀 있지만, 자신이 뿜어내는 기호들을 통해 주어진 환경과 상호작용한다. 지구상 최초의 생명체가 식물이었으니만큼, 자연 상태에서의 식물에서 주변과의 상호작용은 생태계를 좌지우지할 만큼 크다.


그러나 식물원이나 식물원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에서 자연의 왕성한 생명력은 여러 단계를 통해 순화되어 있다. 조형언어는 그러한 자연력을 조련한다. 작가에게 ‘무아지경의 몰입’을 자아내고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은 특정 식물이 아닌 어떤 이미지이며 이미지를 가능케 하는 조형요소이다. 김미영의 작품에는 선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선은 펜으로 할 때 더 조밀해지며, 붓으로 할 때 더 굵어진다. 꽃의 주름들은 추상적인 차원에서 볼 때 생명이 주름 잡히고 펼쳐지는 양방향의 관계 속에 존재함을 말한다. 작품 속 선인장은 표면의 굴곡들과 뒤덮인 가시들이 주름 잡힌 선의 유희를 극대화한다. 작품 [선들의 침묵, 그린 선인장]은 양 귀와 양 팔이 있는 듯한 선인장으로 의인화된 모습이다. 선인장은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야 하는 듯 불끈 힘을 주고 있다. 선인장을 표현한 다른 작품에서는 가혹한 환경을 뚫고서 꽃을 피운다. 




작품 속 식물들은 대부분 들판이나 거리에서 자라는 야생화나 잡초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의해 잘 개발된 그런 종류의 식물이다. 자연의 어떤 한 특징은 상품화의 회로 속에서 강조되기도 한다. 그것이 극단화되면 자연과 인공의 구별은 무의미해진다. 실제 꽃과 다름없는 정교한 조화(造花)가 있는가하면, 인간의 취향에 의해 이리저리 가공되어 자연에서는 존재할 수 없을 법한 색과 형태를 지닌 꽃들도 있다. 대체로 관상용 식물은 인간의 기호에 맞는 특정 부분만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 인간이 개발한 동식물은 자연 상태에서 수정할 수 없는 불구의 것들이 많다. 구물구물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선으로 채워진 김미영의 작품 속 식물은 동물성을 띈다. 그리고 간혹 등장하는 동물은 식물과 같은 방식으로, 식물처럼 선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털로 뒤덮인 동물은 선적인 방식과 잘 어울린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식물에는 동물성이 내재해 있다. 


식물의 가장 화려한 국면인 꽃은 여성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꽃은 양성이다. 하나의 꽃에는 암술과 수술이 같이 있다. 생물학자 최재천은 ‘꽃은 남성에서 출발해 차츰 여성이 된다. 그래서 식물학자들은 꽃의 상태에 따라 그 식물이 현재 52퍼센트 남성에 48퍼센트 여성이라고 측정하기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젠더는 남녀 두 가지로 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성을 자연과 비유하는 것은 여성을 매우 숭고한 존재로의 격상과 비천한 존재로의 격하를 광폭으로 오고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꽃으로 간주된다면, 그리고 꽃이 여성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이 바로 왜곡이다. 꽃을 앞에 놓고는 그리지만 굳이 그것을 보고그리지 않는 화가에게 왜곡은 여러 차원에서 일어난다. 꽃그림이 많아서 마치 꽃밭에 온 것 같은 김미영의 작업실에는 말 그대로의 왜곡, 즉 곧아야할 줄기가 구부러진 채 있는 꽃 이미지들이 많다. 




그것들은 마치 자신에게 비춰지는 빛의 양이 충분치 못한 듯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식물의 축소모델로서의 분재는 이러한 왜곡을 심미적인 차원으로 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작품 속 식물은 대지와 태양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화장을 한 듯 뽀얗지만 얀 작품 속 식물들은 우울하고 슬픈 느낌이다. 꽃은 식물로서는 쇠퇴기에 접어든 것을 알려주는 기호이기 때문일까. 꽃으로서의 여성은 사실과 다르기에 불편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꽃은 단지 아름답기만 할 수 없는 것이다. 화사하고 부드러운 색과 정제된 환경 속에 잘 안치된  꽃들이 다소간 불편해보이고 심지어는 괴물 같은 양상을 보이는 것은 여성이, 그리고 작가가 누군가에 의해 자신과는 무관한 특정 목표에 의해 만들어지는 피동적인 존재일 때의 상황이 자의식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김미영의 작품에서 자신의 상황과 겹쳐지는 꽃들은 휘몰아치는 선을 따라 다층의 상징으로 뻗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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