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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안 / 자연과 정신에 편재하는 빛

이선영

자연과 정신에 편재하는 빛

  

이선영(미술평론가)

  

허지안의 최근 몇 년간의 개인전은 색들이 전면에 나와 있다. ‘with colors’(2009) ‘talk in colors’(2014) ‘echo of colors’(2015)라는 전시부제들은 그녀의 작품 속 색의 위상을 알려준다. 그 사이에 있었던 ‘감각의 기억’(2013)전은 색이 키워드로 나와 있지 않지만, 전시 작품의 면면은 색에 대한 감각의 기억이라 할만하다. 여기에서도 추상적인 구조를 통과하는 색이 주도하기 때문이다. 허지안의 작품에서 추상적인 구조들은 창들을 연상시킨다. 그것들은 그림이라는 창속의 또 다른 창들이다. 그것들은 때로 십자가 모양으로 배열하기도 한다. 이번 영천 스튜디오에서의 전시 ‘세상의 빛’(Lux Mundi)은 색이 빛으로 승화한다. 이전 작품에서도 색은 빛으로 충전되어 있었지만, 최근 작품에서 색 속의 빛은 전면화 된다. 색은 창처럼 보이는 구조들과 그 사이에서 비쳐 나오는 빛처럼 제시된다. 구조들 안팎으로 나란히 또는 자유롭게 떠있는 색은 이 세상에 편재하는 빛을 표현한다. 




untitled,Acrylic on Canvas,80.3x116.8cm,2016



빛으로 충만한 자연은 온 생명에게는 축복의 상황을 말한다. 색들은 대개 따스하고 화사하며, 생명의 온기로 가득하다. 작품 속에 충전된 색의 기운들은 계절로 치면 울긋불긋한 봄 같다. 그러나 단순한 자연 예찬은 아니다. 명시적/암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뾰족한 지붕이나 작은 창문들로부터 시작된 사각 형태들은 정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면모를 드러낸다. 빛으로 화한 색과 형태는 세상 구석구석을 환하게 비춰준다. 산란하는 빛의 입자처럼 보이는 둥그스름한 형태들은 사각 형태들과 함께 어우러져 마치 세포 속까지 들어찬 빛 에너지를 표현한다. 그것은 내부로부터 발산되는 빛이다. 허지안의 작품에서 빛은 상징적 우주의 여러 차원을 횡단하며 비춰진다. 화면에 떠있는 것들은 사각형과 원을 원형으로 하여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는 동질이상(同質異像)의 것들이다. 그것들은 추상적이지만 원근감을 가지고 있다. 크거나 밝은 것은 앞쪽에 있는 것이다. 


사각형태가 내부로부터의 발산력이나 반사력이 강화되면 모서리가 둥글려지면서 다양한 도형으로 변화될 것이다. 작품에 퍼져있는 사각형과 그 변주들은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뾰족 지붕의 구조와 연관되어 빛이 쏟아지는 창이 된다. 그것들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처럼 빛이 색을 입은 상태다. 전시부제 ‘세상의 빛’(Lux Mundi)은 예수가 한 말인 ‘Ego sum lux mundi’(나는 세상의 빛이다)와 관련된다. 신이 빛이라면 작품 속 빛 또한 그러하다. ‘세상의 빛’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화이트가 많이 들어간 색들을 썼다. 화이트는 빛들을 섞을 때 나오는 색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금색, 은색, 형광색 같이 직접적으로 빛의 느낌을 주는 자체 발광적 색도 있다. 이러한 색들은 소리나 빛이 공간에 퍼지는 느낌으로 배열된다. 특히 소리와 색의 공감각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노래한 마태 수난곡과 관련된 작품에서 잘 나타난다. 




untitled,Acrylic on Canvas,162.2x130.3cm,2015



untitled,Acrylic on Canvas,97.0x130.3cm,2015



허지안,untitled,Acrylic on Canvas,97.0x130.3cm,2015



허지안의 작품에서 빛은 특정 시점이 아니라, 이미 사방팔방으로 쏟아져 나온 상태이다. 빛을 상징하는 화이트는 틈 사이로 비춰지다가 올해 작품에서 전면화 된다. 창들은 확 열려졌다. 빛에 대한 관심은 언덕 위에 있는 창작스튜디오에서 볼 수 있는 별빛과도 관계되지만, 이러한 시각적 상황은 상징으로 전화된다. 가령 성당을 상징하는 뾰족 지붕들 안팎으로 배치된 창들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종교적 울림을 준다. 작품들에는 카톨릭을 모태종교로 가진 작가가 최근 수년간 매일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다녔던 체험이 녹아있다. 종교적 세계관에서 빛은 세상의 탄생과 함께한다.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는 천지창조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밤에는 낮과는 다른 빛이 존재한다. 장 베르동은 [중세의 밤]에서, 밤이 되면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좀 더 잘 포착할 수 있다고 하면서, 유태 기독교 전통에서 인간이 신과 만나는 때는 바로 이때라고 말한다. 


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조를 가리키지만, 세상이 죄에 의해 어두워졌을 때 영혼은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찾아 나선다. 신앙의 시대인 중세는 빛이 높이 평가되었다. [중세의 밤]에 의하면 중세는 인간의 밤이 신의 빛으로 밝혀지고 있었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하면 신은 순수한 상태의 빛이다. 이상적인 빛에 이를 수 없었던 중세인들은 빛과 대립하는 어둠을 줄이려고 애썼다. 고딕양식은 수직을 지향할 뿐만 아니라, 빛의 명암대비 효과를 노리는 뤼미니즘(luminism)을 추구한다. 중세인들은 대성당처럼 높은 창으로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것을 선호했으며, 밤을 늦게 찾아오게 하는 귀한 유리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허지안의 작품에서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대한 감수성은 지고한 실재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성스러운 장소와 연관된다. 빛이 쏟아지는 성당이 있는 그림들은 종교적 체험을 추체험하는 과정으로서의 작업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빛은 조형적 요소이면서 상징이다. 




Untitled,Acrylic+on+Canvas,145.5x112cm,+2016



untitled,Acrylic+on+Canvas,90.9x72.7cm,2016



untitled,Acrylic+on+Canvas,90.9x72.7cm,2016+(2)



종교를 포함한 형이상학적 사고에서 빛은 진리의 출현을 상징한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빛이라는 개념은 원래 이원론적 세계관에 속했다고 말한다. 절대적 타자인 신은 인간과 구별되는 것이다.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진리는 존재 자체에 비춰지는 빛이며, 빛으로서의 존재이다. 그는 플라톤의 동굴비유를 든다. 거기에는 존재의 빛으로서 모든 것을 비추는 태양으로 형상화되는 선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선은 다른 모든 것들에 가시성과 대상성을 부여하지만, 그것 자체로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빛은 그것이 가시적이게 한 것들을 통해서만 보여 질 수 있다. 즉  빛의 은유는 이미 그 안에 빛의 형이상학을 함축하며, 진리는 초월에서 자신의 장소를 얻게 된다. 허지안의 작품에서 빛 뿐 아니라 하늘을 향하는 뾰족한 지붕, 그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뭔가를 보게 하는 창 등의 비유는 초월적 기미를 띠고 있다. 세상 속 인간에게 초월이란 곧 초월에의 의지나 욕망을 말한다. 


일상에 속하기보다 일상과 평행한 존재인 예술은 이러한 초월적 의지와 관련된 것일 수 있다. 예술 뿐 아니라 종교의 힘에 의지해 이겨낸 삶의 고난들은 초월을 단순한 정신의 유희에 머무르지 않게 한다. 허지안의 작품에서 색을 포함한 풍부한 상징을 담고 있는 빛은 부분적이지 않고 편재한다. 이러한 편재성은 단순히 추상적인 화면의 특성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추상은 참조대상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저런 명암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추상예술은 조형언어의 자율화에 큰 걸음을 내디뎠지만, 그 초창기 역사를 보면 종말론에서 신지학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그리스 종교에는 자연신이 풍부하게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의 신은 없음을 말하면서, 그것은 빛이 신으로 포착되기에는 너무나 포괄적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빛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이 존재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즉 편재(omnipresence)한다. 



untitled,Acrylic+on+Canvas,162.2x130.3cm,2016



Untitled,Acrylic+on+Canvas,145.5x112cm,2016



untitled,Acrylic+on+Canvas,90.9x72.7cm,2016



그러나 신화적, 종교적 사고는 결국 근대적 사고에 자리를 내준다.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의하면 계몽(enlightenment)과 함께 빛은 행해져야할 대상의 영역 쪽으로 비춰진다. 근대의 계몽주의 또한 빛의 은유가 있었지만, 이제 진리가 스스로 빛을 발하면서 침투한다는 생각은 변화한다. 이제 진리는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근대의 극적인 명암법은 이러한 사고의 변화에 기초한다. 특히 전기의 발명 이후 인공적인 빛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 그대로 편재하게 되었다. 빛은 길들여지고 통제되었다.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의하면 베이컨과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방법의 이념에서 빛은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사고된다. 시점(원근법)의 제약성 및 이에 대한 의식, 나아가서 이 시점 선택의 자유가 이제부터는 본다는 개념을 규정한다. 근대의 과학사 뿐 아니라 미술사 역시 만물을 지배하는 매체로서의 빛이 목표가 정해져서 주사되는 조명으로 변화하는지를 보여준다. 근대에 빛은 재현되어야할 대상을 확증하는 어떤 국부적인 요소로 변모된 것이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이 연출했던 극적인 명암법은 항상 자연적인 상태로서의 어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의도적으로 목표하는 빛의 가능성인 조명(illumination)은 인공적인 빛을 강조한다. 이러한 빛의 조작은 주위를 둘러보는 자유를 배제시키며 강제적인 시각이 지배하는 상황을 만든다.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은 시선의 고정, 시각의 조립이 지배하는 근대 세계는 그 구조상 다시금 동굴과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조명이라는 기술적인 빛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인간으로부터 타자적인 시각을 추방한다면, 그 인간은 고대의 저 ‘하늘을 명상하는 자’와 그가 갖고 있던 관조의 자유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추상적인 패턴처럼, 때로는 풍경처럼 보이는 허지안의 작품에는 국부적인 빛이 아니라, 편재하는 빛을 표현한다. 그것은 많은 진보와 더불어 많은 퇴보도 낳았던 근대에 대한 반작용을 말한다. 작가는 그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 진리의 자연적인 발산력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빛의 탄생처럼 세상이 시작되었던 순간의 신선함을 되찾고 싶은 것이다.  

  

출전; 영천 예술창작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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