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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연, 푸쉬 풀 드래그 전 / 인생이라는 무대 안의 또다른 무대

이선영

인생이라는 무대 안의 또다른 무대

푸쉬, 풀, 드래그 전 (8.30--11.13,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유목연 전 (9.7--10.8, 두산 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강남과 강북에 소재한 두 전시장에서 만난 작품들은 젊은 작가들의 생태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생태계란 비유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은 실제로 놀이터나 공원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어떤 전시장은 ‘잘못 들어왔나’ 하는 착각이 들 수도 있다. 인생이라는 무대 안의 또 다른 무대인 전시장은 잠시 색다른 유희의 장이 되었다. 그러나 젊은 세대를 직접 비추고 있는 장들은 다소간 어둡다. ‘헬조선’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처지는 그들만의 상황은 아니지만, 어느 세대보다도 빛나야 하는 시기이기에 시대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느껴진다. 사회가 좀 더 체계화 되었다 함은 좀 더 체계적으로 착취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음식, 성형, 패션, 최신 스마트 폰 등 고만고만한 소비생활이 더 뻔해진 노동에 대한 작은 보상이 되어주고 있을 뿐이다. 








젊은이인데다가 작가라면 어려움은 배가된다. 이 두 갤러리는 젊은 작가 지원에 힘쓰고 있는 만큼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작가가 누구나 이런 기회를 얻기는 힘들고, 그 기회를 충만히 채워서 그다음 기회들로 계속 이어 가기는 더욱 힘들다. 예술은 고질적인 문제인 경제적인 압박 외에, 자체의 어려움을 내장하고 있다. 작업이란 매번 새로이 시작되는 것이어서, 뭔가 연속적으로 쌓이지 않고 발표를 거듭할수록 급속히 고갈된다. 예술은 직업일 수 없기에 아무리 오래 해도 능숙해지지 않는다. 그들의 ‘전문성’을 사회가 이해하기도 힘들다. 예술에 내재한 이러한 막막한 불확실성을 자유와 창조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푸쉬 풀 드래그’와 ‘나뭇가지 세우는 사람’이라는 생경한 제목을 가진 두 전시의 공통점은 예술에 대한 젊은 예술가들의 상념과 행위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예술에 대한 예술인 셈이다. 만약 그들에게 예술이 삶이라면 비록 그것이 ‘예술에 대한 예술’이라 할지라도 그 지평은 협소하지 않을 것이다. ‘푸쉬 풀 드래그’는 비좁은 입지 안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젊은이들이, ‘나뭇가지 세우는 사람’은 무모한 행위를 반복하는 젊은이가 등장 한다. 이들의 작업에는 공통적으로 미로 속을 헤매는 또는 자유롭게 유목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어디든 기회가 닿는 곳을 향해 끝없이 이동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감각과 기억이라는 최소한의 자원만을 가지고 다니며, 이동 중에 맞딱뜨린 타자들과 유대하고 대화하는 열린 태도가 발견된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억지로 이동해야 하는 가난한 유목민도, 권태로운 일상을 탈피하려 여행하는 부유한 유목민도 아니다. 짧은 휴가를 즐기는 일시적 유목민도 아니다. 그들은 예술을 하는 삶 자체가 유목임을 자각하고 있을 뿐이다. 유목은 그것이 비록 제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일지라도 삶의 층을 두텁게 한다.


  




정세영, Deus ex Machina, 2015(사진출처;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푸쉬, 풀, 드래그 Push, Pull, Drag’라는 동사의 모음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인 것들을 강조한다. 끌고, 당기고, 미는 세 개의 동사는 탁 트인 투명한 공간에서의 예측될 수 있는 목적을 향한 움직임이 아니라, 없는 자리를 만들어나가는 의지적 행위를 떠올린다. 삶에 있어서 예술의 자리가 그렇지 않은가. 사회의 시스템은 예술에 냉정했다가도 예술가들에게도 잠시 기회를 준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들이 지속가능한 것은 아니다. 무익한 장식으로 삶의 한켠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관성적인 것이 아니라면, 예술은 매순간 새로이 생겨나야 한다. 기존의 질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생성의 과정은 예술 뿐 아니라 예술가적 주체를 특징짓는다. 그때그때의 작품에 맞는 주체가 있을 뿐이지, 고정된 정체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작품들은 2층과 3층, 그리고 무려 18미터를 내려가야 하는 건물 최하단부 지하 기계실까지 사진과 드로잉, 영상과 설치, 퍼포먼스 등으로 펼쳐져 있다.


2층 전시장 입구의 배헤윰의 드로잉 설치 작업에 담겨 있는 것은 식물들이다. 식물이지만 화려한 꽃이나 강건한 나무같은 전형적인 식물상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채 말려버린 것들처럼 바스라질 듯 존재한다. 벽과 바닥의 구조물에 여러 겹 겹쳐진 식물 이미지는 공기처럼 편재하면서 지구적 삶을 시작하고 지탱해온 식물의 강인함과 예술작업을 중첩한다. 그 옆의 공간에서 상영되는 이윤이의 영상작품은 학부에서 한국 현대시를 공부한 이력이 드러난다. 영상들은 자전적 경험으로부터 나온 시적인 대사들과 어울린다. 영상의 내용과 편집에는 음악적 리듬이 있다. 작가의 분신처럼 메아리치는 영상 속 인물은 작가의 오랜 친구인 90년대 인디밴드의 멤버로, 영상은 그들의 심신을 푹 담궜을 하위문화의 감각이 녹아 있다. 3층 전시장 벽에 걸린 김익현의 작품은 금광 내부를 찍은 사진들이다. 지금은 버려진 장소가 되었지만, 원래의 채굴 작업은 명확한 좌표에 의해 진행된 고된 노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장으로 나열된 얇은 금광 내부의 이미지들은 미지의 길로 계속 이어질 것 같은 설렘이 가득하다. 막다른 길에 몰린 삶을 ‘막장 인생’이라고도 표현하지만, 김익현이 포착한 막장들은 서정적인 별빛이 새어나오기도 하는 기이하면서도 매혹적인 장소다. 정세영은 전시장을 가로질러 설치된 길쭉한 단에 냉장고를 하나 올려놓았다. 유리가 끼워진 냉장고는 예상과 달리 따뜻하다. 열면 김까지 무럭무럭 나는 것이 불안하다. 연극적 공간 속에 놓인 소품이자 장치인 뜨거운 냉장고는 배우 출신 작가의 이력을 알려준다. 그가 연출한 연극적 공간에서 일상의 물건은 낯선 사물이 되어 관객의 지각을 활성화시킨다. 조익정의 작품이 전시되고 공연 또한 열렸던 장소는 하염없이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깊은 지하공간으로, 말 그대로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화려한 건물의 지하 기계실에 꾸며진 놀이터이자 무대는 유토피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헤테로피아 같은 시공간이다. 공연이 끝난 후 아무도 없을 때도 계속 돌아갈 공연 영상들은 무대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유목연 전 설치 전경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유목연 전은 전시장을 숲처럼 꾸며놓았다. 이 어두컴컴한 공간은 도심 속 작은 휴식 공간이라기에는 의심스러운 면이 있지만, 여기저기 의자들도 가져다 놓은 것이 이곳에서만이라도 쉬면서 뭔가 생각해 보자는 메시지가 전달되기에는 충분하다.  한국 여러지역의 수목원에서 구해와 전시장에 도톰한 흙을 깔고 심어놓은 나무들은 전시기간 동안 생육하며, 전시가 끝나도 살아남은 것은 다시 심어질 예정이다. 그것들은 깊이 뿌리 내리기보다는 전시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관리를 받는 ‘큰 규모의 꽃꽂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각 영역에 생육하던 것들은 작가의 호출에 의해 한 곳에 모여 잠시 또 다른 삶을 산다. 이는 마치 전시가 이루어지는 과정과도 같다. 작가의 개념에 의해 선택된 것을 집중적인 가시성의 장에 세우는 것이다. 물론 젖은 흙과 나무에서 나오는 축축한 기운이 있는 작은 오솔길을 걷게 되는 전시장은 시각 뿐 아니라 오감이 활성화 된다. 


나무들은 자신이 처한 새로운 환경을 겨울로 받아들여 잎을 최대한 떨어뜨려 바닥은 푹신푹신하다. 어떤 나무는 새로 싹을 틔우기도 한다. 그런데 전시장 한가운데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잎이 없는 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보도블록이 담긴 포대에 기대어 세워져 있다.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나뭇가지는 자신의 뿌리에 의해 서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질적 나뭇가지는 영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포대 속 보도블록은 바깥의 ‘작업 공간’들에서 하나씩 주워온 것이다. 윈도 갤러리에도 돌과 나무가 설치되어 있어서, 마치 선문답처럼 지나가는 이들에게 ‘이게 뭔고’하는 식의 화두를 던진다. 숲으로 연출된 전시장 한 벽은 5개국 8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나뭇가지를 세우는 행위를 기록한 영상이 흘러나온다. 꽂지 않는 이상 절대 세워질 수 없는 나뭇가지 세우기는 실패가 예견된 행동이다. 고립된 공간이 아니라 지하철, 광장, 공원 등 열린 공간에서 행한 행위는 그 무모함을 배가한다. 




유목연, 나뭇가지를세우는사람,2016,싱글채널비디오,1시간



윈도 갤러리 전경(사진출처; 두산갤러리)



그러한 ‘바보같은’ 행동은 누구하나 봐주지 않는 냉랭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이 벌어지는 작은 영역을 피해가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멀리서 보다가 다가오기도 하고 곁눈질 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한번 해 볼래 하는 이도 있다. 가장 최악은 작가의 행위를 기록하던 카메라를 통째로 도둑맞은 경험이다. 그의 부조리한 행동이 야기한 이런 저런 반응은 작품을 보는 관객의 반응과 중첩된다. 숲 한가운데 놓인 이 나뭇가지가 그 옆에 있는 나무들처럼 살아있는 존재가 되려면 어떤 기적이라도 일어나야할 판이다. 작가에게 예술행위는 삶의 중력과 대결하는 무모한 행동의 연속이며, 예술을 통해 자생력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으로 제시된다. 그러한 희망사항이 너무 멀리 있다면 유목연의 작업은 냉소적일 것이다. 그의 숲은 일견 고즈녁해 보이지만, 예술의 존재방식과 작업하는 삶에 대한 신랄한 은유들로 소란스럽다.

   

출전; 아트 인 컬처 201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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