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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 on Drawing 전 / 시간 속에서 생멸하는 선(線)

이선영

시간 속에서 생멸하는 선(線) 

Dream on Drawing 전(2017. 1. 9 ~ 1. 31, 자하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Dream on Drawing’전은 드로잉을 주제로 한 단체전이지만, 출품된 작품의 면면은 전형적인 드로잉이 아니라 꼴라주나 페인팅을 포함한 다양한 매체들이 포함되어 있다. 모노톤의 선적인 표현이 많다는 점만이 전시부제에 속한 키워드인 드로잉을 떠올릴 뿐이다. 거기에는 느슨하고 자유로운 선부터 바늘 틈 하나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꼼꼼하게 그어진 선들이 있다. 선을 만드는 재료 또한 가늘게 오린 한지부터 머리카락까지 다양하다. 거기에는 완성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허물고 드로잉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현대미술의 흐름을 포함하여, 드로잉의 외연을 넓히려는 미술계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다. 가령 근대예술의 시점을 인상파로 보는 관점에는 드로잉이 차지하는 몫이 인정된다. 한 지점으로부터 출발하는 선은 그것이 연속적이든 불연속적이든 먼 곳에서 바라본 흐르는 강물처럼 어떤 시간성을 내포한다. 한해가 다시 시작되는 즈음에 열린 이 전시는 시간 속에서 생성되고 변모하며 사라지고, 다시 또 다른 주기를 시작하는 시간을 생각하게 한다. 


임춘희, 김명진, 유재연, 허윤희, 김범중 다섯 작가의 작품은 다양한 가운데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유로운 드로잉이라는 형식을 통해 재현주의적 사고를 벗어난다는 점이다. 추상적인 형태는 물론,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이 등장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대상의 정확한 정체성에 못 미치는 또는 초과하는 과정중의 형태가 두드러진다. 그 과정은 명확히 예견된 경로를 거치지 않는다. 재현주의에 깔려있는 이해와 소유라는 합리적인 틀을 빠져나가는 미완의 형상들은 불안정하게 지속한다. 지속의 시간 속에서 동일자를 이루는 타자들은 활성화 된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서 말하듯이, 타자는 동일자를 불안정하게 한다. 시간은 동일자 안의 타자이다. 참여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선적 여행은 시간과 타자의 관계를 전면화한다. 시간 속에서 펼쳐지고 접혀지는 과정 중의 형상들은 대답이 아닌 끝없는 질문이다. 대부분 명확히 대답될 수 없는 그 질문들을 추동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끝없는 욕망이다.  

  

임춘희,밤 산책-두 남자, gouache on paper, 19x12cm, 2014



임춘희, 꼬리, hair on canvas, 170x130cm, 2006



임춘희의 작품은 그림을 안 배운 것처럼, 또는 배운 것을 애써 잊어버리려는 듯이 보인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에는 인물화들이 많은데, 그 인물들은 어느 선에서 완성이라고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간략하다. 그리다 만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신과 지인을 포함한 인물들은 그 생김새나 성격, 또는 당시의 상황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종이 위에 과슈와 오일 파스텔로 쓱쓱 그려진 작품 [부부초상화](2014)는 누가 불러서 뒤돌아보는 듯한 부부의 모습인데, 남자의 어깨에 걸친 여자의 한쪽 손이 붉게 물들어있다. 그것은 가깝고도 먼 부부사이의 감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작품 [밤 산책-두 남자](2014)는 한명은 여자 같은데 두남자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심상이 반영되어 있을 바탕은 칠해 졌다기 보다는 얼룩져 있다. [부부초상화]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재료로 그려진 이 작품 또한 부부로 추정된다. 두 사람의 손은 이상하게 비틀려 있고, 같은 곳을 바라볼 뿐 마주 보지는 않는다. 


같은 자세로 같은 곳을 응시하는 두 사람은 제목처럼 단지 ‘두 남자’라기 보다는 같은 일을 하는 동료 같다. 화가로서의 자의식은 작품 [낮선 여행](2002)에서도 나타난다. 해가 뜨는 또는 지는 듯한 장면 앞에서 작가로 간주되는 한 여자가 눈을 지긋하게 감은 채 붓을 쥐고 둥근 형상과 논다. 그녀에게 그리기는 대상의 재현이 아닌 상념의 표현이자 놀이이다. 캔버스에 머리카락을 붙인 작품 [꼬리](2006)는 잘린 머리카락을 선적 요소로 삼았다. 꼬리, 아니 장기들이 몸을 빠져 나와 뒤얽혀 있는 듯한 군상들은 머리카락처럼 몸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이러한 경계의 와해는 깊은 슬픔을 표현하는데도 적절하다. 목탄으로 캔버스의 올이 드러날 정도로 엷게 그러나 반복해서 칠해진 부분은 표정을 알 수 없을 만큼 짙게 그린 작품 [위로](2015)에서 슬픔은 깊은 바다만큼이나 깊다. 임춘희의 작품에서 감정과 상황을 표현하는 언어는 압축적이다. 압축은 정곡을 찌르는 지름길이 될 수도 수수께끼가 될 수도 있다. 작가는 깨달음과 모호함 둘 사이에서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진다.  




김명진, 떨어진 열매, 캔버스에 한지, 재, 안료, 콜라주 162 x 130cm, 2015 



김명진,모기장,캔버스위에 한지,먹,안료,콜라주,,53x45.5cm,2015



김명진은 나무껍질을 탁본한 얼룩덜룩한 한지를 잘게 파쇄 된 서류같이 잘라 꼴라주한다. 바탕은 우주적 심연이다. 동양화에 바탕 한 작업에서 이 우주적 심연은 동양화에서 중시하는 여백에 해당될 것이다. 하얀 여백은 반전되어 있다. 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는 작품 속 인물들은 허공에 매달려 있는 실존적 상황이다. 여기에서 앞과 뒤, 위와 아래 같은 좌표적 맥락은 지워져 있다. 이 맹목적 상황에 던져진 존재는 무엇에 의지하여 무엇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어두운 만큼 빛의 존재도 선명하다. 오려진 종이는 어둠 속에서 가늘게 빛나는 선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모기장이나 모빌 같은 구조로부터 온 선은 그것을 들고 있는 어떤 거대한, 그러나 감춰진 존재를 전제한다. 모기장이나 모빌같은 구조 속의 인물들은 갇혀있는 것일 수, 보호 받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은 타자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다. 종교적 제의에 관련된 인물인 [소녀 복사](2015)의 몸통을 이루는 것도 이러한 선들인데, 이 선들은 펼쳐지고 접혀지는 주름처럼 보인다. 


들뢰즈가 말하듯 주름이 펼쳐지면 세상이고 접혀지면 신이다. 그러나 현대예술가에게 신적 존재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이전의 신학적 가설로부터 자유롭다. 분신이나 쌍둥이 분체처럼 보이는 소녀들은 원본의 복제로서의 재현이 아니라, 원본/복제 사이의 위계적 서열을 무화시킨다. 맞닿은 머리들은 행성 같다. 그것들은 스러진 별로부터 만들어진 먼지로부터 재탄생한 것으로, 인간 또한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 졌다. 작품 [떨어진 열매](2015)는 우주적 거인이 별처럼 보이는 열매들을 모은다. 일상적 체험은 우주적 사건으로 거듭난다. 칠흙같이 어두운 바탕에 빛처럼 드러나는 꼴라주는 사건의 무대를 구조화한다. 사건 속 인물들은 보이지 않는 힘에 영향을 받는다. 우주적 어둠은 무한하다. 유한한 삶의 근본적 바탕은 무한이며, 무한은 죽음을 떠올린다. 어둠과 빛이 서로에게 속하듯이, 무한/죽음은 유한/삶의 관계 또한 그렇다. 그의 작품은 죽음이라는 근원적 시간 속에서 명멸하는 생명을 표현한다.  

  


유재연, Gregory Spiral, 종이에 붓펜, 190×146cm, 2012



유재연,크라프트지에 붓펜_60×60cm_2011



종이에 붓펜으로 그린 유재연의 작품은 형상 속에 또 다른 형상들이 숨어있다. 얼룩으로 하는 심리테스트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우글거리는 형상들 속에서 무엇을 꺼내는지는 관객의 심리상태에 달려있다. 심리는 육체와도 관련된다. 그의 작품에서 심신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시 붙기 위해서 단편화된다. 그의 작품은 배경과 형태가 분명히 구별 지어지지 않고, 배경에서 전경이 나오고, 다시 전경은 배경으로 돌아가는 변화무쌍한 과정의 연속이다.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스케치 북에 그려진 형상들은 큰 화면에서 하나로 융합된다. 융합을 위해 각 개체들은 경계를 풀고 끝없이 촉수를 출렁인다. 작품 [Gregory Spiral](2012)은 나선형으로 말린 면에 동물, 식물, 괴물, 인간 등의 이미지들이 압축되어 있다. 차이와 반복 속에서 원환을 그리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단선적 시간은 해체된다. 2011년 크라프트지에 붓펜으로 그린 초상화는 아르침볼도의 [채소 기르는 사람]처럼 형상 안의 또 다른 형상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기이한 초상이다. 


세포가 분열하는 듯한 역동적 형태를 모으는 것은 얼굴 실루엣이다. 2010년에 비슷한 스타일로 그린 [자화상]이 있는 것을 보면, 개체들 간의 경계가 불분명한 이 초상은 동일자를 이루고 있는 타자들이다. 내 안에 나로 환원되고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이질적 타자가 웅성거리고 있다. 분열적인 초상이긴 하지만, 고정된 얼굴이야 말로 죽음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자는 끝없는 질문으로 인해 그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서, 질문함 속에서 의식적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고 거기서 주체는 분열된다고 말한다. 이 틈사이로 타자들이 명멸한다. 유재연의 작품에는 타자가 야기하는 뒤흔듦이 존재한다. 즉 그것은 ‘나 자신의 한가운데서 지탱 불가능한 타자가 동일자에게 가하는 분열’(레비나스)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의한 동일자의 이러한 찢김’을 윤리적 방식으로 생각했지만, 예술가는 다름을 생성하는 미학으로 생각한다.

  



허윤희, 발-산길, 57 x 76 cm, 2016



허윤희,새-경계를 넘어서,Charcoal on paper, 76 x 107 cm, 2016



형태를 이루는 선의 경계가 툭툭 끊어져 바깥으로 한껏 열려있는 허윤희의 작품은 자연의 외형과 동시에 과정을 표현한다. 선들은 하나의 형태로 완결되지 않고 불안하게 망설인다. 적극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자연을 본질이 아닌 요소로 표현하는 것이다. 요소로서 자연을 볼 때 삶과 죽음의 경계 또한 해체될 것이다. 레비나스가 존재와 무(無)는 생성 속에서 동일하다고 했듯이 말이다. 대립된 것들의 동시성이 생성이다. 허윤희의 작품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길이나 날아가는 새, 새싹이 움트는 모습 등은 서서히, 또는 빠르게 진행되는 자연의 과정이다. 허윤희에게 그리기 또한 그러한 자연적 과정에 속해 있다. 작품 [발-산길](2016)은 산길을 맨발로 걷는 느낌이 있다. 산, 수풀, 길, 등산하는 사람 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 가득히 포착된 내딛는 발안에 산길을 걸으면서 시시각각 다가왔던 다양한 지각이 포함되어 있다. 투명하게 그려진 맨발 안에 있는 나뭇가지와 잎들, 그리고 수없이 그려진 선들은 자연의 과정과 가장 유사한 걸어가는 과정을 표현한다. 


여러 번 그어져 불명확해진 외곽선은 자연과 얽히고 섥혀 있는 존재이다. 인간을 자연과 떼어놓으려 할수록 자연은 맹렬히 복귀한다. 허윤희가 잘 사용하는 종이나 목탄 또한 자연에 가까운 재료이다. 작품 [새-경계를 넘어서](2016)에서 새가 통과한 경계 또는 행적은 흐릿한 배경으로 처리되었다. 지나간 시공간은 미지의 시공간을 예견 한다. 그 시간은 예측 가능한 기계적 시간이 아니라, 도약과 비약을 거듭하는 지속이다. 새의 머리와 몸통에 비해 많은 선이 가해진 날개부분은 예술에 있어서 자유의 몫을 강조한다. 동시에 자유는 불안하다. 두텁게 얽혀있는 날개의 선들은 가벼운 비상보다는 중력을 연상시킨다. 어두운 색 때문인지 기름에 오염된 새가 힘겹게 날아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새는 눈도 없고 발도 없다. 새는 어디로 가는가. 새가 내려앉을 지상은 어디인가. 나는 것으로 방향 지워진 존재는 내려앉기 힘들 것이다. 마치 자전거가 신나게 달릴 때만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김범중_Stereodium 2015 160x120cm pencil on Korean paper




김범중, Eigen Frequency, 장지에 연필, 112×160cm, 2015



김범중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일련의 단위나 그 단위를 채우는 방식은 규칙적이다. 그는 자신만의 규칙을 설정하고 그것을 일관성 있게 관철시킨다. 장지위에 연필로 그은 작업 때문에 바닥으로부터 긁혀 나온 종이의 섬유질은 집요한 편집증적 기운마저 발견된다. 그것은 뜨거운 열기가 아니라, 극도로 차가운 것에서 기화하는 에너지처럼 보인다. 뜨겁든 차갑든 이 열기는 작품 특유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에서 드로잉의 자유로움을 찾기는 힘들다. [Eigen Frequency](2015), [Stereodium](2015) 등으로 붙여진 작품 제목에는 청각성이 깔려 있다. 시각이 공간이라면 청각은 시간이다. 원근법으로 결정화된 공간이 있듯이 기계적인 수치로 단선화 된 시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각예술에 청각성이 강조될 때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수많은 관점이 생겨난다. 소리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들려오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이 근대의 시각중심주의를 극복하려 했을 때 청각성, 구술성, 시간성은 다시 주목되었으며, 가족유사성을 가지는 그것들은 연극성으로 종합되었다. 


공간예술의 관점에서 시간성은 교란적 요소이다. 시간은 변화를, 나쁘게는 변질을 야기한다. 시간은 동일자와 타자가 일치할 수 없음을 예시한다. 실존주의자들을 비롯해, 비관적인 사람에게 시간은 죽음까지도 상징한다. 이데아의 세계처럼 정적인 것을 선호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에서 시간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시각에 시간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작품에서 일상적 상식과 형이상학에 깔린 견고한 동일성은 흔들린다. 김범중의 작품에는 진동과 울림, 흐름과 지속이 있다. 사물에 있는 고유의 진동수를 표현한 작품 [Eigen Frequency]는 일정한 간격으로 나뉘는 화면과 그 안을 채우는 선들이 있다. 그것들은 진한 가운데로부터 소리나 향이, 어떤 밀도와 강도가 가장자리로 퍼지는 듯하다. [Stereodium]은 밥알 같은 타원형들이 두 개의 중심으로 배열되고, 움푹 패인 듯한 원근감을 가진다. 그것들은 제각기 돌면서 또 다른 흐름 속에서 파동 치는 단자(monad)들이다. 

 

출전; 미술평단 201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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