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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화 /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작품 또는 사물

이선영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작품 또는 사물

  

이선영(미술평론가)


  

제 4회 박수근 미술상 수상자인 박미화의 작품들은 박수근 화백의 작품 속 작은 집들을 닮은 미술관과 잘 어울렸다. 이러한 조화는 나중이 아닌 처음부터였을 것 같다. 시대의 격차를 두고 있으며, 성(性)도 다른 두 작가의 이 같은 연결망은 절묘하다. 더구나 박미화는 국민 ‘화가’ 박수근처럼 화가라고도 할 수 없는 인물이다. 박미화의 ‘그림’을 그림쟁이의 기준으로 보면 어눌하기 그지없다. 빚다 만듯한 도예 작품도 그렇고, 이번에 서울 DDP에서 온라인 전시(5.6—5.31, 갤러리 문)로 대거 공개된 목조각들 또한 마찬가지 어법이다. 박미화는 최소한의 터치로 최대한 표현한다. 돌덩어리와 도예작품, 나무통과 목조작품에 큰 차이가 없다. 추상적 형식은 아니어도 내용은 미니멀리즘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예술보다는 사물의 방식을 택함으로서, ‘텅 빈 폐허나 연극의 무대같은’(마이클 프리드) 미니멀리즘을 체현했다. 예술은 사물이 아니지만 사물은 예술도 포함한다. 




모든 사진 출전; 박수근 미술관







예술과 사물의 구별이 모호한 대표적인 것이 오래된 유물일 것이다. 언제 누군가에 의해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지만, 오랜 시공간의 간격을 통해 자연화된 대상이 유물이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에서 붕괴된 대수도원같은 건축의 잔유물에서 자연에 가까운 문화를 본다. 낭만주의자들은 이러한 폐허를 좋아했다. 낭만적 폐허에서 자연과 문명이 같이 만든 경계 위의 대상을 만날 수 있다면, 유행이 급속도로 변하는 현대적 삶의 주기 또한 유물 못지않은 모호한 대상을 만나게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 근대]에서 말했듯이, 근대적이라는 것은 멈출 수 없다는 것, 가만히 서 있기는 더욱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간의 폭주는 예술적 저항을 낳았다. 20세기 초, 세계의 수도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유행에 지난 물건들을 발견하고 수집한 초현실주의가 대표적이다. 으젠 앗제의 사진이나 발터 벤야민의 단상들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박미화는 강화의 작업실에서 열심히 예술작품을 제작한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가 만든 것도 발견된 것처럼 연출한다. 막 만들어진 도예작품은 오랫동안 눈비 맞은 석상이나 물살에 닳은 돌멩이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작가와 자연이 함께 만든 것인 양 오랜 시간의 더께를 가진다. 예술가 주체의 미학적 의도나 능수능란한 기법만 가지고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일상적 대상을 특징짓는 기능을 기준으로 하자면, 예술은 기능이 없고 사물은 기능이 잊혀졌다. 그래서 예술과 사물은 유용한 물건과 달리 심미적 대상이 될 수 있다. 예술은 복잡하고 사물은 단순하다. 예술이 온통 의미로 무장된 묵직하고 심오한 대상이라면, 사물은 의미를 이루는 배경에 더 주목한다. 예술가는 심오한 의미의 발신자로 자처하며 그 주인이고자 한다. 사물은 주체가 모호하다. 만들어지기 보다는 발견되는 사물은 다소간 멀찍한 대상이다. 예술작품이라는 관념의 무게를 버거워 했던 이들은 작품 대신에 ‘텍스트’(바르트)라는 개념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텍스트, 또는 사물로서의 작품은 후기구조주의자들이 주목한 ‘거듭 쓰여진 양피지’처럼 중층적이어서, 텍스트 또는 사물에 내려앉은 수많은 겹 중 어느 층이 활성화 될지는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불확실하다.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불확정적이다. 철학적으로 비교하자면 예술은 동일자이고 사물은 타자이다. 예술가, 또는 창조자같은 강한 표현 대신에 작가(심지어는 ‘작가의 죽음’까지 거론)라는 단어가 자리 잡은 것도 우연은 아니다. ‘후기-’라는 접두어가 붙는 공통적인 흐름을 현대미술사의 흐름에 접목시킨 미술사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구별했듯이, 예술이 중심과 주변을 구별할 결정적 단면을 내장하고 있다면 사물은 중심이 부재한 끝없는 계열을 보여준다. 사물은 ‘실재의 중심에 있는 공백’(라캉)이기에, 의미의 실타래는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박미화 전의 전시실에는 텅 빈 단면이 노출된 동체들이 많다. 부드러운 알맹이가 어느 빠져나간 갑각류 화석같은 작품들은 어딘가 한 토막씩 부족한 불완전한 구조보다는 표면에 눈이 더 가게 한다. 


박미화의 작품에서는 종이든 빚은 흙이든 통나무든 드로잉의 바탕 면이 된다. 만만치 않은 재료의 저항과 상호작용하는 연결되거나 끊어진 선들이 중층적 표면을 만드는데 가세한다. 이러한 표면들은 감춰진 본질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가 아니라, 뫼비우스 띠처럼 차원을 변주시켜 본질이 될 것이다. 작가에게 본질은 처음이 아니라 나중에야 온다. 작가는 선험적 구조가 아닌 정처 없는 과정에 의지한다. 구조는 이성적 질서에 바탕 하지만 재단과 환원을 전제하며 곧 형식주의로 전락한다. 박미화의 작품에 깔린 또는 연출된 오래된 시간성은 모든 구조를 느슨하게 한다. 실재는 구조처럼 꽉 짜여있지 않다. 명료하게 분류되지 않는다. 남김없이 체계화되지 않는다. 흙으로 빚은 몸, 또는 의상으로 나타나는 몸의 흔적은 작가가 늘상 접속하고자 하는 실재계를 대표한다. 박미화의 작품은 원초적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실재와 모성의 연결고리, 그리고 이에 바탕한 미학과 윤리학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로렌초 키에자는 [주체성과 타자성; 철학적으로 읽은 자크 라캉](2012)에서, 라캉의 이론적 구조에서 상징화에 선행하는 잠재적 실재를 어머니의 젖가슴과 비유한다. 박미화의 작품에 깔려 있는 실재감은 모성적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사회의 지배적 질서인 상징계가 상투화시키는 모성과는 거리가 있다. 아이에게 어머니는 타자이고 임신과 육아 중의 어머니에게 아이도 타자이다. 특히 아이에게 어머니는 절대적 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시초부터 인간을 가능하게 한 절대적 희생과 사랑은 언어나 제도와 같은 상징적 질서에 의해 온전히 자리매김 되지 않는다. 키에자가 해석한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실재는 상징화될 수 없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상징계로부터 배척된 것들은 실재 안에서 회귀한다. 실재의 잔여물은 언제나 이미 상실된 통일성의 상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어떤 것이다. 물론 ‘실재(에너지)는 상징계(기계)와의 연관 속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에너지로서의 실재는 필연적으로 상징적 작용을 내포’(라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제는 인간의 성장과정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모든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기 위해 모성과 단절해야만 한다. 특히 남성적 주체에게 이 과정은 가혹하다. 모성, 즉 실재는 상실 된다. [주체성과 타자성]에 인용된 라캉의 실재에 대한 개념들, 즉 ‘실재적 대상은 주체로부터 분리된 한에서만 주체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상’이며, ‘실재적 대상은 욕망의 주체로부터 절단된(또는 누락된) 무엇’이고, ‘결여로서의 실재적 대상은 환상을 지탱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역설적 개념들은 결여와 상실에 기초한 인간의 무의식과 환상, 욕망과 사랑에 대한 현대 정신분석학의 해석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난해하면서도 허무하다. 그렇지만 복잡한 기제 속에 결국 인간의 욕망이 추동하는 사회의 메커니즘을 설득력 있게 해부한다. 그러한 과정들이 실재라면 예술에서 탐색되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술은 윤리와 마찬가지로 상징이 아닌 실재이다. ‘윤리는 주체가 실재와 맺고 있는 관계’(라캉)라는 점에서 박미화의 예술은 윤리를 포함한다. 태도 또는 형식으로서의 미니멀리즘은 구조의 강고함을 누수시키기 위해 ‘예술’이 아닌 것을 탐색하는 와중에 상징적 언어에 의해 형식화되기 힘든 실재를 제시하려 한다. 감당할 수 없는 폭력(죽음)이거나 이에 대응하는 무한정한 사랑은 제시될 수 있을 뿐 재현될 수 없는—미학자들이 ‘숭고’라고 개념화했던—실재에 해당된다. 박미화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죽음의 문화를 치유하는 모성적 사랑은 명료하게 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따스한 공기처럼 모든 작업의 산물을 감싸고 있다. 허구가 아닌 진실에 호소하는 작가는 ‘쟁이’가 됨으로서 잃어버리는 더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표현이지 완벽한 기법이 아니다. 이러한 방식과 태도는 여러 매체에 두루 관철된다. 그러나 예술은 우연도 자연도 아니므로, 미술관과 작품의 조화 또한 고뇌와 계산의 산물일 것이다. 


박수근이라는 거장의 무게와 별도로, 건축이 작품인 경우 작가로서는 중성적 공간이 아닌 이 특별한 공간과 어울리는 해법이 필요하다. 박미화의 작품은 입구와 출구가 많은 특유의 융통성 덕분에 의외의 수월성도 있었을 것이다. 본 전시장에서 떨어진 외딴 공간인 파빌리온에서의 전시는 작품을 무슨 물건처럼 그냥 갖다 놓은 것 같은 연출도 보인다. 중심과 주변의 관계 속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그냥 놔버린 것이다. 여기에서는 모두가 중심이고 모두가 주변이다. 강조와 강요가 아닌 암시와 제시이다. 그것은 작품의 소재 선택도 마찬가지여서, 작가는 굳이 찾아다니기 보다는 가다가 우연히 만나는 것을 선호한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계속 가고 있다는 필연성이다. 만남이란 추상적 정보가 아니라 실재의 차원을 전제한다. 벽에 걸어놓은 작품을 제외한다면, 수직성보다는 수평성을 따르는 배치들은 들판 같은 평화와 휴식을 주지만, 동시에 그것은 생산과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이다. 












유럽의 어느 수도원 복도에 쌓아 놓은 유물이나 빛이 새어나오는 지하 통로 등은 작품들이 질서정연하게 걸리는 화이트 큐브보다 더 큰 감흥을 주었는데, 이 전시에서도 중심이 아닌 주변적인 곳에 더 관심을 두는 작가의 경험이 십분 반영되었다. 박미화의 작품들은 특히 입체 작품이 그러한데 오래된 성당, 절터 등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될 법한 부분이 소실되고 표면이 낡은 사물들을 닮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낱낱이 흩어지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응집력을 가진다. 박미화의 작품들이 공간과 그리고 다른 작품들과 응집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각 작품에 있는 단면들이다. 단면은 쪼개진 징표처럼 잠재적인 연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완결된 의미나 자족적 형식을 지향하지 않는 박미화의 작품들에는 그러한 단면들이 산재한다. 단면은 어쩌다 자기가 앉게 된 공간과 우연인 듯 필연인 듯한 관계를 가진다. 미완성된, 또는 한때 완성된 것이었지만 부분이 소실된 것 같은 모습, 덮여있거나 지워진 상태, 미지의 짝패를 기다리는 단편들은 유아독존이 아닌 공존을, 독백이 아닌 대화를, 동일자가 아닌 타자를 향한다. 


전시장은 [어제는], [오늘은], [내일은](파빌리온 1,2,3 층의 전시부제)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미완성 문장은 관객들의 상상력에 의해 채워질 것을 요구한다. 제시된 화두가 너무 간단하여 엄청난 고민은 필요 없을 듯하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심오함과 거대함—마음만 작가인 부류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인—을 뺀다. 무거움도 뺀다. 물론 흙과 통나무로 만들어진 입체작품들은 무게가 꽤 나가지만, 형태나 색채의 처리 같은 조형적 방식을 통해 육중한 분위기를 덜어낸다. 이름 모를 풀부터 유명인의 죽음까지 다루는 박미화의 작품은 진지하지만 희망 또한 품고 있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과는 거리가 있다. 천과 실로 된 비문들은 색조차도 담담하다. 최소한의 터치만 가해진 듯한 형태는 재료의 물리적 무게만 생각하면 된다. 특히 파스텔 톤의 연한 색감은 고유색을 빼고 다시 덧입혀진 느낌이다. 빛바랜 듯한 색감은 종이, 흙, 나무 같은 자연적인 재질과 어우러져 따스한 느낌을 준다. 










빛이 바랠만큼 많은 빛을 오랫동안 받아왔으면 그것은 따스함을 내포할 것이다. 연대미상의 유물같은 외양을 하고 있는 박미화의 작품에서 시간성만큼은 심오하고 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의 그물망을 벗어나 있는 대상들은 시적이다. 그것들은 무엇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될 수 있다. ‘이다’ 보다는 ‘되다’에 호소하는 작품들에서 시간성은 중요하다. 흐르는 시간을 억지로 멈추지 않는다면 정확히 재현하기 힘들다. 박미화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사적 기억이나 공적 역사를 재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작품이 향하는 것은 오늘이나 내일, 즉 미지의 것이다. 재현주의와 거리가 있는 박미화의 작품에서는 어제 또한 미지의 차원에 있다. 이번 전시는 근 몇 년 동안 더욱 가속도를 내면서 전시회를 열어온 박미화의 주요 작품들이 대거 나왔지만, 회고전은 아니다. 입체와 평면 작품들이 모두 설치방식으로 펼쳐진 각각의 전시 공간들은 각 작품의 연대들이 무색하게 재맥락화 되었다. 


작품들은 방금 만들어진 것도 오랜 시간의 더께를 쓴 듯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으며, 예전에 만들어진 것도 현재와 조응하는 부분이 있기에 이러한 섞임, 또는 재맥락화는 자연스럽다.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든 새로 만들어진 것이든 동일한 비중을 가진 퍼즐로 작동한다. 목조와 도예 등을 포함한 다양한 형식이 많은 작품들이 혼란이 아닌 상호적 조응관계를 가질 수 있음은 그것들이 한 작가의 오랜 사유와 감성에서 나온 산물임을 알려준다. 그래도 좀 더 효과적인 소통 방식을 위해 작가는 수도 없이 지도를 그렸을 것이다. 중간에 땅도 밟고 통과해야 하는 관람 동선은 대략 정해져 있지만, 관객이 멈춰선 곳에 놓여진 것들은 딱히 보는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작품이 제시하는 서사 또한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작은 그림들은 군집 형태로 붙여 놓거나 죽은 자의 이름이 새겨진 수백 개의 패널이 벽면을 가득 채운 작품들이 그렇다. 










복도에 죽 늘어놓듯이 배열된 것들, 좌대도 없이 바닥에 뒹굴려 놓은 것들, 계단 형 진열대에 놓아둔 것들은 특별한 강조점이 없다. 어디부터 봐야할지 모름은 어디부터 읽어야 할지 모름과 같다. 예술보다는 사물, 배치보다는 방치 같은 전시방식은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이지 않을까. 아직도 아이처럼 세계에 대한 관심이 많은 작가는 미술작품 보다는 사진과 다큐멘타리를 즐겨본다. 작은 노트부터 스마트폰 기록 앱 등 작가가 우연히 만난 것들을 기억해줄 장치들은 손닿는 곳에 있다. 이 전시에서도 사진 작품이 몇 점 나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정보보다는 시적 분위기로 가득해서 그림같은 느낌이다. 작가는 원래의 대상은 빼고(불확실하게 하고) 대상을 둘러싼 공기와 빛과 감응한다. 자신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건에 대한 기록은 중학교 때부터의 습관이라고 한다. 흐릿한 기억의 보조자인 사진들은 빛에 대한 작가의 감수성과도 닿아있다. 


여러 소재와 재료들이 등장하지만 비슷한 색감과 재질이라는 공통점은 그 무엇이든 자신 안에 푹 담궜다가 나온 산물임을 말한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물이든 인물이든 고유색은 빠져있거나 빛이 바랬고, 다시 색이 입혀진다. 그렇게 현실에서 나왔지만 현실은 아닌 특유의 분위기를 유지한다. 유아기적 감성을 포함하는 박미화의 작품들은 환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리얼리즘에 바탕 한다. 어떤 변형을 거치든 일단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박미화의 작품은 윤리와 분리될 수가 없다. 불행히도 현실의 기조는 비극이고 그러한 비극이 있기에 기쁨도 조금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리얼리즘에 바탕 한 작품들은 비극을 깔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작가가 비극의 단면을 고발하는 식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온전한 것이 없고 상처가 가득한 작품들은 비극의 흔적이다. 간접적 흔적이기에 파장은 더 크고 오래간다. 












작가는 스스로 염세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파괴적 염세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나온 고통이다. 자기 파괴적인 폭주의 시대를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면 염세주의는 과장도 연민도 아닌 리얼리즘일 수밖에 없다. 은근하고도 소박하지만, 뿌리줄기처럼 연결된 작품들의 전체적 효과를 통해 말한다. 주요 작업은 작업실에서 이루어지지만, 소품의 경우 집에서도 꾸준하게 조금씩이라도 진행한다. 24시간 깨어있는 감각을 요구하는 작품들은 노동 하는 식으로 진행될 수 없다. 강한 주의 주장을 위해서는 형태와 의미의 완결성과 자족적이 필수지만, 작가는 의미의 방향타가 될 첫 단추만 꿰어줄 뿐이다. 오래된 사물이 그러하듯 손상된 형태, 단편, 결여, 부재의 흔적 등의 편재 속에서 퍼즐을 맞춰야 한다. 박미화의 작품에는 동물과 식물, 인물과 사물이 골고루 나온다. 그렇지만 각각은 완전체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부르며, 작품의 설치방식에도 이러한 상호 의존 관계가 드러난다. 


가령 네발 없이 누워있는 개, 그것을 위에서 포근하게 덮어주는 듯한 식물, 이를 슬프게 바라보는 듯한 인물이 일련의 관계망을 가지고 자리한다. 현대사회에서 동물은 광적인 소비시스템 때문에 희생되는 대표적인 타자이지만, 도구가 아닌 지극한 사랑을 받은 경우라 할지라도 인간보다 짧은 삶을 통해 죽음의 위력을 체감케 한다. 식물은 뿌리 뽑히고 건조된 상태조차도 따스함과 위로가 있다. 식물은 원기를 회복시켜주며 도취를 야기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식물은 재생의 상징으로 치유적 이미지를 가진다. 근처의 인물은 작가일 것이다. 작가는 의식하지 않아도 모든 인물상에 저절로 자신의 모습이 나온다고 말한다. 전시장 귀퉁이에 놓인 작은 식물 형상들은 시멘트 바닥에서 나온 또 다른 돌 생명체같은 이미지인데, 마치 그곳에서 돋아난 듯한 어울림이 있다. 한편 머리통을 양분삼아 자라는 뿔 또는 나무의 이미지는 죽음과 삶의 순환관계를 좀 더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무엇인가가 창조되었다면, 정작 창조자는 치약처럼 완전히 짜내어진 상태일 것이다. 작품이 성공적일수록 창조자는 남김없이 고갈된다. 창조자는 창조물 속에 자신을 감춘다. 동물과 결합된 인간상은 신화 속 키메라처럼 기괴하지 않고 왠지 친근하다. 원래 키메라는 여러 능력이 결합된 전능하고 초월적인 존재인데, 박미화의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다. 새 몸통에 사람 얼굴을 한 형상은 걷지도 날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로 바닥에 놓여있다. 인간이 동일자이기 위해 타자화 되었던 자연, 그 중에서 동물은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로 나타난다. 박미화의 작품에서 애도의 대상이기도 한 동물은 인간과 상하 관계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은 어떤 면에서 동물에 비해 열등하다. 그래서 인간은 ‘적응하지 못한 동물’(라캉)이라고 정의되기도 했다. 앞서 인용한 [주체성과 타자성]에 해석된 바에 의하면, ‘인간의 부적응은 모든 인간 존재가 미숙하게 태어난다는 사실’(라캉)에서 기인한다. 


입체 작품에서 인물은 중심에서 비껴나 있다. 받침대 위에 올린 작은 조상에서 조명은 옆을 비춘다. 빈 거울 같은 타원형 빛은 옆의 대상을 간접적으로 조명한다. 다른 전시장에서 지상에 내려앉은 별 형상은 한껏 조명을 받고 있다. 달처럼 환하게 조명 받는 떠있는 두상 또한 그렇다. 작가는 형태 뿐 아니라 조명이나 작품의 위치 또한 의미에 참여시킨다. 유일하게 당당하게 서있는 작품은 의상인데, 껍데기가 몸통을 대신한다. 테라코타 의상들은 부재의 흔적이지만 사람처럼 나이를 먹어가며 표면에 시간의 흔적을 남긴다. 의상은 옷의 실루엣을 과장하는 화려한 부속 기구와 결합하기도 한다. 계단에서 막 내려오는 듯한 모습은 박미화 작품의 기조를 이루는 소박함과 달리, 우아함과 카리스마를 결합시킨다. 생명을 낳고 보살피는 존재인 여성은 원래 강인하다. 바닥에 놓여 있곤 하는 작은 의상들 또한 부재하는 몸체를 팽팽한 흔적으로 남긴다. 








한쪽 겨드랑이에서 뭔가 꼬물꼬물 자라고 있는 의상은 날개를 연상시키는데, 그 날개는 잘린 것일까 돋아나는 것일까. 옷은 몸 없이도 스스로 서있다. 아이가 그렸을 법한 낙서가 3차원 상에 현실화되어 그림자를 떨구고 묵직한 중력 감을 가진 기념비가 되어있는 모습이다. 그리다 만 것, 미숙한 표현 등은 ‘교정’되지 않고 3차원화를 통해 더 증폭된다. 의상에는 그 주인이 있었을 테지만, 작가는 대상의 소유관계를 드러내지 않는다. 조직화되어 있지 않기에 더  주인 없이 보이는 대상들은 그것들을 예술작품보다는 사물에 가까운 것으로 만든다. 누군가의 소유물임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부담되고 부자유스러운 것은 없다. 뾰족 지붕모양이 살아있는 전시장 내부 좌대도 없이 바닥에 늘어서 있는 것들은 벽에 붙은 둥근 작품과 관계망을 형성한다. 바닥과 떨어져 있는 둥근 형태는 여러 가지가 연상된다. 그곳이 실내라면 창이나 조명이, 실외라면 달이나 태양일 것이다. 안팎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벽에 기대 놓은 작품들이나 바닥에 그냥 놓아둔 작품들 걸려있거나 서있는 수고로움 대신에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그것들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또는 명료하게 체계화 될 수 없는 모호한 대상들을 암시한다. 모든 것이 쓸모와 소용을 위해 체계적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현대에 이러한 모호한 것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버려지거나 유령화 되거나 아니면 아주 드물게는 물신화 된다. 층계 식 진열대에 작은 입체작품들이 놓여있고 그 옆에 커다란 소녀 입상이 서있는 작품에서 소녀 입상은 작은 상들의 주인인양 서 있지만 그 또한 작은 상들처럼 불완전하다. 사물이 익명적이라면, 벽면을 가득 메운 명패들은 이름이 선명하다. 같은 모양의 수틀에 새겨 수직수평으로 죽 나열한 방식은 사물의 방식이지만, 그 이름들은 호명된 것, 즉 불러 세워진 것이며, 핑계 없는 무덤 없듯이 다들 깊은 사연을 가진다. 앞으로도 가속화될 극도의 경쟁사회는 위험을 높여가고 억울한 죽음들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 더 불행이다. 








그렇지만 이 경고에는 그러한 불행을 조금이라도 저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담겨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수틀에 일기 쓰는 마음으로’ 제작했다고 말한다. 수 백 개의 명패들은 홀로코스트의 명패들을 떠올린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에서 유대인 강제수용소가 트라우마의 장소인 것은 그 곳에서 자행된 만행의 과도함이 인간적 이해력과 표현력을 넘어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스만은 ‘아우슈비츠 이후 서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우슈비츠를 그들 자신의 역사 속에 갖고 있다’(루트 클뤼거)는 말을 인용한다. 압축된 근대사 속에서 수많은 집단적 폭력 사태를 겪었던 한국도 도처가 추모지다. 박미화의 명패 작품은 앞으로도 계속 제작되는 열린 작품으로, 전시의 맥락에 따라 조금씩 호명이 달라진다. 여수에서 곧 열리는 전시에서는 ‘여순사건’의 억울한 사망자들이 호명될 것이다. 비문들 맞은편에는 푸른 평원 그림 앞의 토끼상이 놓여있다. 


이 초현실적 조합은 많은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수많은 시공의 축을 횡단하는 사자(死者)의 이름들은 넓은 운동장을 천방지축으로 뛰노는 토끼의 발랄함과 비교되면서도 대조된다. 특히 정권의 체계적인 무능력과 부패로 인해 한날한시에 한꺼번에 수장된 어린 영혼들이 안타깝다. 가령 세월호 희생자들은 누군가의 토끼같이 귀여운 자식들이자 제자들이었을 것이다. 명패는 유명인도 무명인도 있지만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한자리씩 차지한다. 작가의 호명은 수틀에 눈에 띄지 않는 색으로 조그맣게 수놓은 글자들처럼 잔잔하다. 그렇지만 사방에서 서로를 맞대면서 무시할 수 없는 기념비로 확장된다. 전시장 바닥에 엎어져 있는 소녀는 애통하기 그지없다. 소녀는 사소한 다른 일로 슬퍼하는지 모르지만, 우선은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서 근 몇 년 새 집중적으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엎어진 소녀 근처의 식물 형상과 작은 별은 비극 속에도 희망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평면이나 입체 작품 속 인물상들은 애도와 희망의 행위에 인간적인 표정을 준다. 소녀부터 중년까지 다양한 모습의 여성상은 작가 본인을 닮았으며 꿈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꿈은 상실과 희망을 내포한다. 서울 DDP에서 온라인으로 열린 전시의 목조상들도 비슷한 분위기다. 흙의 경우 작가가 칠하기와 그리기의 방식을 통해 시간의 흔적을 담는다면, 나무는 그자체로 시간의 흐름을 각인한 재료이다. 거의 만화 캐릭터처럼 3등신상이다. 머리의 비중이 줄면 어른에 가까운 모습이 된다. 두상이 없는 경우가 가장 현실에 가까운 비례를 보여준다. 모든 상들이 치마로 다리를 가려 여성임이 암시된다. 여성 입상은 박미화가 오랫동안 해왔던 아이템이지만, 박수근 화백의 소녀상에도 비슷한 비율의 인물상이 나온다. 나무를 가공하기 보다는 관찰했을 시간이 더 길었을 작품들은 나무의 결, 나이테, 옹이 등을 잘 살려있다. 통나무의 투박함이 내향적인 인간상과 어우러진다. 


작가는 나무를 깍고 조합하고 그리기도 하지만 나무 자체에서 형상을 찾아낸다. 가령 분지된 튀어나온 부분은 젖가슴이 된다. 인물상의 움직임도 최소화되어 있다. 나무껍데기를 남긴 부분과 깍아내서 속살을 드러낸 부분 간의 명암 및 색상의 대조는 작가가 입체에 늘 회화적 처리를 해왔음을 알려준다. 마치 맷돌처럼 나무통 두 개를 겹쳐서 인물상을 만들기도 한다. 이때는 조각적 처리보다는 표면을 긁어 이미지를 만드는 회화적 처리가 두드러진다. 가장 적극적으로 형태를 만들어간 작품은 날개달린 여성상이다. 팔 부분에 붙은 묵직한 날개는 비행보다는 명상적 표정과 포즈와 결합한다. 나무의 나이테를 하나 가득 담은 별은 도마나 의자로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단촐한 사물처럼 제작되었다. ‘별이 되었다’는 일상적 표현처럼, 별들이 인물상들과 함께 있다면 불가피하게 죽음을 연상시킨다. 땅속에 깊은 뿌리를 내렸던 나무는 천체의 빛을 품은 채 또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중이다. 

 

출전; 박수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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