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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미공 20주년을 축하하며

이선영

인미공 20주년을 축하하며

  

이선영(미술평론가)


  

늘 당면한 현재에 급급한 나는 계획이나 회고를 회피하고 있지만, 오래된 자료를 뒤적거리는 것은 더 싫기 때문에, 인미공 20주년과 관련된 나의 생각은 굵은 기억 이외의 누락된 부분들이 많다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여러 사람의 기억을 종합하면 인미공 20년에 대한 대략의 윤곽이 나오지 않을까. 인미공과 더 밀접했던 이들이 많았지만, 나에게까지 발언 기회가 돌아온 것은 멀리서 본 관점도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간의 생산자가 있다면 난 소비자에 해당된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인미공은 미술계의 기대를 가득 담고 오랜 산고 끝에 탄생했다. 그것은 미술인만의 의지만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에 나는 인사미술공간이라는 이름부터 별로였다. 뭔가 이것저것 절충된 나머지, 아무 특성이 없어진 이름을 다른 사람들도 싫어했는지, 축약어인 ‘인미공’으로 훨씬 더 많이 불렸다. 왜 이렇게 길게 명칭 이야기를 하냐면, ‘인사+미술+공간’을 뜻할 어정쩡한 명칭이 국가가 조성한 대안공간이라는 약간은 모순된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인미공은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공적 기관이면서도 자유로운 현대미술의 산실이어야 한다는, 평행선을 이루는 가치 안팎에 자리한다. 여기에 미술계 내의 계파들과 공무원까지 얽힌 복잡한 정치 지형도에 따라 부침이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조직생활을 해본적은 없지만, 공공기관의 관리자격인 ‘늘 공무원’과 미술인 출신의 ‘어쩌다 공무원’이 공존하는 조직의 긴장감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창작과 비평이 전부가 아닌 상황에서, 미술을 이해해주는 공무원을 기다리기 보다는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는 미술인이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미공을 주관하는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은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 약간은 비밀에 싸여 있는 곳이라는 느낌도 받은 적이 있다. 공적 영역은 투명함을 요구하지만, 미술은 그다지 투명하지 않은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안공간들이 미술계에 던진 신선한 바람은 누가 주도를 하든 대안공간이 하나쯤 더 있는 것도 좋을 것이라 기대가 있었다. 


거기서 열리는 전시는 다소간 관성에 따라 돌아가던 인사동의 수많은 화랑들과 다른 질을 담보하고 있었다. 인미공을 비롯한 대안공간의 전시는 아름다움, 미술, 예술가에 대한 기성세대의 생각과 달랐다. 대안공간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루고 있던 젊은 미술인들이 하고 있는 것이 미와 미술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들의 단절적 태도는 예술은 좋았지만 미술계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그래서 지금도 잘 모르는) 나의 성향과 맞았다. 인미공이 출발했던 시점은 웹진 [미술과 담론]의 전시 평을 중심으로 글을 썼던 시절이다. 웹진의 성격을 살려서 전시기간 안에 평을 올리기 위해 매주 인사동 사간동 대학로 홍대 앞 등을 돌아 다녔다. 그때 버릇이 여태 남아서 일정기간 동안 일정한 개수의 평문을 업데이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인미공 또한 인사동이나 홍대 앞의 다른 대안공간들과 더불어 전시 비평의 1순위였다. 각 대안 공간 별로 성격은 달랐지만, 예나 지금이나 미술계의 구경꾼에 불과했던 나는 그곳에서의 작품만 보려고 노력했다. 


남들은 전체(정치)를 보는데, 난 부분(예술)만 본 셈이다. 그러나 부분도 꾸준히 보면 맥락을 형성할 수 있다. 그때 썼던 짧거나 긴 평문들은 무심한 시간의 시험대 앞에서 지금은 유실되고 없지만, 당시 대안공간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내 의지는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물론 대안공간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있었지만 말이다. 인미공은 처음에 지금의 인사아트센터에 자리 잡았다. 당시로선 잘 지어진 신축 건물에 현대미술을 전시하기에 적절한 높은 천고에다가 대중들의 접근성도 최고였다. 그러나 지금도 인사동에서 최고 수준인 비싼 임대료나 점차 돛대기 시장처럼 변해가는 인사동 분위기를 탈피해, 창덕궁 길가의 한적한 곳으로 옮긴 것은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높은 임대료에 돈을 쓰느니 작가나 전시, 프로그램에 더 투자하는 것이 맞다면, ‘골목길’은 말 그대로 대안적 장소였던 셈이다. 특히 요즘은 후미진 곳에 있어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가며 찾아오니, 위치보다는 콘텐츠가 중요하다. 


거의 인사동 중심에 있었던 인미공의 이동은 이후 주요 미술공간의 탈 인사동 바람의 신호탄이 되었다. 동시에 인미공이 대중과 멀어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그냥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미술은 관심 있는 이들과 집중적으로 소통한다. 요즘 코로나로 관광객이 빠진 텅 빈 인사동 거리와 가게들을 보니, 공간의 경제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냉혹한지 체감한다. 인미공 오픈 몇 년 후 인사아트센터의 메인 공간은 비워주었지만 인사동 다른 곳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던 시기가 얼마간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때의 전시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안정된 자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당시 담당자들도 곤혹스러웠을 그 과도기를 무사히 넘겼기에 올해 20주년을 맞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때 미술의 중심이었던 인사동에서 차를 타고가기에도 걸어 가가에도 애매한, 다소간 외진 주택가에 자리한 인미공은 대중적이기 보다는 실험적인 젊은 미술의 산실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아카이브라는 개념이 별로 없던 시절, 동네 연립주택을 개조한 넓지 않은 장소 위층을 통째로 할애하여 빼곡하게 채운 자료들도 미술계의 자산이었다. 예술의 기본은 창작과 비평이지만, 창작도 비평도 말처럼 쉽지는 않으므로, 자료라도 잘 모아 놓는 것은 기본이다. 모든 미술기관이 화려한 전시와 담론으로 훨훨 날고 싶었겠지만, 기본적인 인프라 구축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에너지가 분산되었을 것이다. 답답한 미술계를 벗어나 대안의 연결망을 짜려는 시도는 언제 그 결과가 나올지 모를 아득한 과업이라는 것이 문제다. 대안을 찾기 위해서 미술인들이 친하고 싶었던 타 분야의 인재들이 현대 미술을 잘 모른다는 것도 큰 부담이다. 타 분야와의 연계는 미술과의 접목이 얼마큼 성공적이냐가 관건이다. 이상적 접목은 미래의 몫으로 남겨졌다. 인미공에서는 주로 실험적인 미술이 선보였는데, 난 실험적인 미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첫눈에 반하듯이 다가와야 하는데 실험적인 미술은 대부분 복잡하고 난해하며 그 형식적 내용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퍼즐을 맞춰봐야 하는 노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때 평문은 자연스러운 감상이 아니라 도전해야할 과제가 된다. 물론 학적 연구의 산물로서의 평문은 인상과 필력(筆力)에만 의존하는 느슨한 감상문보다는 가치 있다고 보지만 말이다. 또 하나는 실험에 대한 나의 학창시절 개인적 경험과 관련된 것이다. ‘실험’하면 미지의 새로움이라기 보다는, 어떤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예측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썰렁한 실험실에서 죽치고 기다리던 때가 생각난다. 과학적 실험은 재현이다. 물론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구성적인 재현이다. 과학적 실험은 타인이 실행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와야만 객관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엉터리 과학자는 이를 위해 데이터를 조작하기도 한다. 예술에서의 실험도 재현적일 수 있다. 다른 분야에서 그냥 끌어온 것, 심지어는 다른 작가를 모방한 것 등이 실험적이라면 재현주의를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점철된 현대미술의 흐름을 역행하는 셈이다. 


인미공에서도 수년전 모작가의 외국작가 표절 논란이 지우고 싶은 흑역사로 남아 있다. 그것은 전시중단 사태까지 낳았지만, 공적기관이라 사건을 투명하게 처리하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할만했다. 미술잡지 등을 보면 온통 실험적인 작품에 대한 담론(그러나 의미보다는 기표로만 도배된) 일색인데, 나 하나쯤의 취향이 대수겠는가. 현대미술 관련 전시장이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관객들이 별로 없는 한산함도 인미공에 대한 인상의 하나로 남아있다. 내가 만약 이 전시에 대한 글을 쓴다면, 이렇게 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몇 명과 공감하겠나 하는 원초적인 회의감이 안들 수 없다. 그렇지만 소수의 목격자로서 증언할 의무감도 생긴다. 실험적인 미술가들이 던져준 화두 때문에 비평적 연구도 가능해진다는 점, 그리고 아직 충분히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잠재성이 풍부한 씨앗, 그것을 가능케 하는 토양이 필요함은 당연하겠다. 이러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창경궁 골목길 쪽으로 옮긴 다음에는 인사동 때만큼 자주 가지는 않았다. 웹진 [미술과 담론]을 떠나고 나서 매주 써서 업데이트했던 전시 평에 대한 동력을 잃었던 것도 한 이유다. 


2010년 전후로는 전시보다는 아르코미술관과 함께 하는 젊은 작가와 기획자 양성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면서 다시 그 공간과 친해졌다. 그 프로그램들은 전시회를 통해 작품이라는 결과만 봤던 내게 과정을 볼 수 있게 했다. 물론 점차 나이가 벌어져 가는 젊은 작가들에게 접근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계속 만나다 보니 그들과 대화하는 법을 체득된 기회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 다시 미술계에서 인연이 닿은 작가들이 많지 않았음을 볼 때, 교육 내지는 양성의 과정이라는 것이 정말 긴 호흡으로 가야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때도 프로그램이 끝나면 짧게라도 그 과정을 정리해서 미술포탈 싸이트에 업데이트했다. 쓰지 않으면 피차 서로의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자잘한 기록을 남겨 두었기 때문에, 나와 인미공과의 인연이 많은 듯하지만, 인미공은 다른 곳보다 더 자주 가는 곳도 안 가는 곳도 아니다. 앞으로 그곳에 갈 기회가 많아져 30주년쯤에는 인미공에 대한 내 기억이 더 두터워져 있길 바란다.   


출전; 인사미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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