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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주 / 삶에서 일어나는 반복적 기적

이선영

삶에서 일어나는 반복적 기적

  

이선영(미술평론가)


  

타자와의 접촉이 극도로 금기시되는 시대, 최근 조영주의 작품에는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행위가 영상과 음악에 담긴다. 같은 체험을 원천으로 하고 있지만, 영상은 보다 직접적이고 음악은 다소간 추상적이다. 장르간의 차이를 반영하는 양자는 상보적으로 작동한다. 전시 기간 중의 한시적 공연은 영상에 담겨 상영되기도 하고, 설치는 공연이 이루어지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연주라는 오래된 행위예술은 악기를 겸하고 있는 설치물과 함께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그 모두가 랜선 투어로도 가능 할 만큼 각 영역 간의 상호 번역은 융통성이 있다. 몸을 매개로 하는 행위는 여러 매체를 통과하면서 의미를 변환시킨다. [코튼 시대 Cotton era]로 묶인 작업의 최초 발상은 육아라는 밀접 접촉으로부터 발생했으며, 작가는 그 원초적 경험이 휘발되지 않도록 정교한 형식화에 골몰한다. 두 육체가 맞붙어 엎치락뒤치락 하는 작품이나 관악기 연주가 등장하는 작품은 숨을 부각시킨다. 여기에서 숨은 생명이고 예술이다. 그리고 관계이다.



[Feathers on lips 입술 위의 깃털] 스크린 샷 중에서



[Three breaths 세 개의 숨] 스크린 샷 중에서



의사 출신의 저자 앙드레 지오르당의 [내 몸의 신비;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우리가 하루에 약 1만 리터의 공기를 호흡하고,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평균 잡아 50 만 번 호흡한다는 통계치를 인용한다. 숨쉬기처럼 자명하게 실행되는 생리현상도 이렇게 숫자로 변환되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숨 이외에도 몸에 대한 여러 가지 통계치를 설명하는 저자의 주장은 우리의 몸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몸을 낳고, 최소한 삶의 결정적 시기 동안 생존하도록 보살피는 행위 또한 기적 아닐까. 아이가 어머니의 몸 안팎에서 상당기간 양육되는 과정은 그자체가 격세유전적인 기적이다. 조영주 또한 자신이 맡아서 해야 했던 돌봄 노동의 버거움과 행복함에 대해 과학자들처럼 거리를 두고 관찰하며 기록하고 의미화 한다. 우리는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무슨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숨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돌봄 노동에 대해서도 페미니즘이 문제제기를 하기 전까지는 숨 쉬는 것처럼 자명하고 당연한 그녀들만의 의무로 간주되었다. 


동물과 달리 오랜 보호기간이 필요한 아이의 생사를 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은 어머니다. 생명을 주는 자인 어머니는 그것을 거두어 갈수도 있다. 그로부터 모성, 또는 여성에 대한 이중적 이미지가 생겨난다. 어머니/여성은 자상하다/무섭다.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아이에게 어머니는 신과도 같은 절대적 타자인 것이다. 어머니에게 아이 또한 임신과 보살핌의 기간 내내 자기 안의 타자나 분신과 같은 존재이다.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을 접목시킨 저자 낸시 초도로우가 [모성의 재생산 The Reproduction of Mothering]에서 강조하듯, 유아는 결코 독자적일 수 없다. 모성적 보호 없이 유아는 살아있을 수 없으며, 실제로 유아는 자신을 분리된 인간으로 경험하지 못한다. 낸시 초도로우에 의하면, 어머니와의 원래 관계는 자기 보존을 위한 것이고 리비도적 애착은 이 가운데서 발달한다. 이렇듯 모든 것을 주는 존재에 의해 유아는 전능성을 느끼며, 이러한 관계는 평생 동안 이기적인 사랑의 방식을 지속하게 한다. 








여성의 돌봄 노동에 대한 것은 페미니즘 분야에서 ‘그림자 노동’ 등의 개념으로 사회학적 분석이 이루어져 왔지만, 영혼 및 육체와 관련되는 숨을 통한 접근은 특이하다. 그것은 모성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조명이다. 이 세상의 모든 주의주장이 그러하듯이, 페미니즘 또한 당위만으로 설득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조영주의 색다른 시도는 의미 있다. ‘코튼 시대’는 아이의 돌봄에 필요한 자연 섬유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몸 안팎에서 흐르는 것들을 닦아내며, 외계로부터 몸을 포근하고 따스하게 보호해주는 면소재의 물건들에 상품물신주의에 특유한 성을 부여한다면 여성 아닐까. 닦아내는 행위에는 더러움과 깨끗함의 경계를 오고가는 양가성이 있다. 아이와 바깥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피부에 닿는 코튼 제품들은 영상작품 제목인 [입술 위의 깃털] 같이 민감하다. 작가는 이러한 섬세함을 운동경기나 무용을 연상시키는 보다 큰 액션으로 번역했다. 


[입술 위의 깃털]은 몸의 일거수일투족이 계산되어 있다는 점에서, 운동경기나 무용의 방식과 다를 바 없지만, 다양한 체구와 분위기의 조합으로 대결하는 몸의 이미지는 미묘하다. 거기에는 모녀 관계부터 동성애 관계, 애무부터 폭력에 걸치는 모호한 행위들이 보는 이를 난감하게 한다. 앞서 인용한 [모성의 재생산]에서는 정신분석학의 전통에 따라 아이들의 성애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아이는 처음에는 양성애적이었다가 나중에 이성애적 지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의 가부장적 한계를 지적하는 저자는 양성애 이전의 또 다른 단계를 언급한다. 그것은 아이의 여자성애적(gynesexual)이거나 어머니성애적(matrisexual) 지향이다. 크리스테바를 비롯한 여성 저자들은 아이와 어머니의 시원적인 관계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여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뱃속에 든 존재와도 수행한다. 그래서 여성은 유아독존적 주체가 아니라 ‘과정중의 주체’(크리스테바)로 간주된다. 이러한 모호한 주체는 양육 뿐 아니라 예술에서도 큰 몫을 차지한다. 










섹슈얼리티는 특정한 성감대에 자리 잡는다. 그런데 성감대의 통로는 공격충동의 통로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은 사랑과 증오라는 모순적 감정의 동일한 기원을 말한다. 로렌초 키에자는 [주체성과 타자성; 철학적으로 읽은 자크 라캉]에서, 내가 타자 안에서 보는 것은 나 자신의 이상적 이미지인데, 이것을 나는 사랑도 하고 증오도 한다고 하면서, 나르시시즘과 공격성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매저키즘과 사디즘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주체성과 타자성]에 인용된, 라깡의 ‘애증’에 대한 관념은 ‘박애주의자, 이상주의자, 교육자, 그리고 심지어 개혁가의 활동의 근저에 놓여있는 것’(라깡)이 바로 공격성임을 밝힌다. 예술가도 이 대열에서 빠지면 안 되는데, 아방가르드는 가장 잘 알려진 예일 것이다. 작가도 참조하는 롤랑 바르트는 레슬링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에서 실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지만, 조영주의 작품은 같은 성 간의 행위이기에, 사회가 인정하기 꺼려하는 모호한 성, 즉 소수자의 섹슈얼리티를 연상시킨다. 


성적 역할에 있어서의 불분명성, 그리고 성기에 집중되지 않은 몸 전체에 퍼져 있는 성욕의 교환에 대해 지배적 사회는 퇴행이나 도착이라고 분류한다. 하지만 지배적 사회가 떠받들고 있는 모성이 당사자에게는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호한 상황이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조영주는 육아의 고통만 말하지 않는다. 고통의 이면은 희열이다. 주체 안에 타자를 배태하는 임신 뿐 아니라 출산 후, 여성의 돌봄 노동 자체가 어떤 경계도 있을 수 없는 전면전이다. 작가는 육아와 예술의 유사함을 말한다. 예술이든 육아든 자신이 좋아서 시작한 것이며 물질, 정신, 마음, 몸 모든 것이 동원돼야 하는 총체적인 일이다. 그런데 총체성이 불가능한 시대에 총체성에 대한 요구는 희생과 헌신에 기댈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고난을 이겨낸다면 고통은 향락이 될 수 있다. 애증처럼 고통과 향락도 한 몸에서 비롯된다. 아이나 작품이나 자신의 분신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된다. 










작품 [세 개의 숨 Three breaths] 또한 양가감정을 자아내는 경계 파괴가 있다. 존 케이지나 백남준의 궤적과 겹쳐지는 음악작품은 선율과 화음 같은 음악적 요소 외에, 사물과 침묵이라는 이질성을 개입시킨다. 이러한 이질성의 난입으로 생겨나는 현대 음악의 난해한 분위기를 이 작품도 공유한다. 이질적인 것은 자동적으로 실행되는 관습을 단절시킨다. 단절을 위한 단절이 아니라, 이 간극에서 무엇인가를 생성하기 위해 경계는 허물어진다. 숨은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삶의 노고에서 면제되는 유기체는 별로 없다. 이러한 노고는 한숨을 쉬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놀랍게도 어머니의 한숨을 따라한다. 아이의 모방행위는 자연적 존재가 아닌 사회적 인간이 되기 위한 학습이다. 언어학이나 정신분석, 특히 양자를 결합한 영역에서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본다. 


사상 초유의 세계적 감염병 시대에 된서리를 맞은 공연예술의 형식을 끌어들인 것은 조영주의 작품이 밀접 접촉 없이는 인류의 재생산 자체가 불가능한 어머니와 아기의 원초적 관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출산과 육아를 가능하게 했을 인간들 간의 내밀한 관계는 언젠가는 인류의 추억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생태계의 전망은 불확실해졌다. 요즘 우리는 그것을 무슨 추상적인 당위가 아니라, 매순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매주 단위로 발표되는 정책에 따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앉아있을 자리조차도 달라지곤 하는 촘촘한 관리의 시대에, 자연은 자연 그자체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조영주의 작품이 출발하는 육아의 체험 및 그 근간에 깔린 모성에 대한 관념과 관습 또한 거의 자연의 영역으로 간주될 만큼, 다른 문화적 분야에 비해 정체되어 있었다. 공적/사적 영역을 분리시켰던 근대 이래로, 이 문제에 관한한 남성은 제 3자였다. 그들은 예술적 창조의 과정에서나 그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여성의 ‘작품’이 아이 낳고 키우는 것에 한정된 시대를 넘어서자 미지의 영역이 열렸다. 이 영역은 이중의 고통/희열을 감내하는 작가/여성에 의해  수면으로 올라올 것이다. 모성은 이제 외적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모성에 기대되는 바의 자연스러움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였기에, 누군가는 그러한 ‘순수함’이 영원히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성/어머니/작가의 출현은 이러한 ‘자연’을 상징적 영역으로 끌어내서 담론 화 한다. 자연으로 포장된 불편한/미묘한 진실들이 대화의 장으로 불려 나온다. 출산과 육아에 대한 말 못 할 고통/희열에 대한 조영주의 대화법은 감상주의나 폭로와는 거리가 멀다. 형식주의는 아니지만, 예술 특유의 거리두기가 철저하게 관철되어 있다. 끈적한 문제일수록 절도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작가는 모성에 대한 유사이래의 감상적 태도를 지양하고 실험적인 냉담함으로 다룬다. 자신의 직접적인 문제에 대한 관찰은 분열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말이 사물을 다루는 방식이기도 하다. 


10여분 분량의 단채널 작품 [입술 위의 깃털]은 아이와의 신체적 접촉과 관련된 작품으로 개체들의 살과 살이 맞닿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신체적 훈련을 받은 배우/무용수와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 체격이나 분위기의 차이가 있는 사람 등의 조합으로 밀접 접촉 행위가 벌어진다. 배경은 하얗게 처리되어 오로지 가쁜 숨을 내쉬며 행위 하는 두 사람에게만 집중하도록 했다. 작가는 비틀기와 누르기 등이 실행되는 레슬링 같은 운동경기를 참조했으며, 참가자들과 많은 워크숍을 거치면서 행위는 안무에 가깝게 조율되었다. 폭력적이면서도 성적인 느낌이 동시에 드는 서로를 치대는 동작들은 양자의 관계가 서로 멀지 않음을 알려준다. 폭력과 사랑은 개체 간의 침입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서로는 서로에 의해 터지기도 하고 섞이기도 한다. 자신의 동일성을 지키면서도 타자와의 관계가 필요한 인간의 사회적 상황이 그러한 심신의 상태를 낳았을 것이다.  






12분 정도 분량의 사운드 설치 작업 [세 개의 숨]은 거대한 아나콘다같은 함석 배기관 안팎으로 연주자들이 배치되어 호흡의 조절이 중시되는 관악기 중심의 현대 음악이 연주된다. 3개의 관악기와 연관되는 [3개의 숨]은 숨을 유지하기 위한 한숨이 포함된다. 이 작품을 위해 작곡된 곡은 작가가 기록한 육아일지를 근간으로 한다. 돌봄 작업은 코드로는 쉽게 나누어질 수 없는 풀타임의 실제이며 그만큼 관련 기록도 연속적이다. 아기와 관련된 매일의 기록을 악보로 간주하여, 숨소리를 소재로 한 연주가 탄생했다. 안무 작업 때와 마찬가지로 협업자인 음악가들과의 지속적인 소통이 요구되었다. 대상화나 소재주의를 넘어선 공유와 소통은 이전 작업에도 발견된다. 조영주에게는 이미지가 아니라 이야기가 중요했던 것이다. 수년전 자신과 세대차이가 있던 50-70대의 여성들과 작업을 함께 하기 위해서 작가는 미용술과 화장술을 배우고, 테라피와 자서전 수업을 진행했으며, 심지어는 합창단 등을 꾸리기도 했다. 


프린터로 뽑으면 수 십 미터도 넘을 육아의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각종 수치들이 어떻게 작곡의 과정에 포함되는지는 또 다른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음악가의 영역일 것이다. 말단에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구불구불한 설치물은 육적 현실에 근접한다. 퍼커션 주자가 타악기로도 사용하는 긴 배기관은 관악기를 닮았음과 동시에, 산도를 타고 탄생하는 인간이나 긴 탯줄을 떠오르게 한다. 어릴 적에 터널이 많은 동네에서 살았던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고 긴 터널같이 끝이 안 보이는 돌봄 노동에 대한 막막함도 담겨있다. 오랜 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던 시기와 겹친 늦은 출산과 양육은 전쟁 같은 삶을 야기했다. 2016년에는 아이를 낳고 한 달 만에 개인전을 할 정도였다. 생활인으로서 돈도 벌어야 했다. 물론 조영주는 그 과정을 아직 완전히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아이를 가졌던 다른 여성/작가의 체험을 공유하는 작업을 장기적 과제로 진행하고 있다. 










다수가 격어 왔지만 여전히 미지의 암흑대륙으로 남아있는, 희생과 헌신, 또는 죄책감 등으로 얼룩진 이 실재적 영역은 여성/작가의 지속적인 탐구영역이 될 것이다. ‘아줌마’를 소재로 한 조영주의 잘 알려진 작품들이 풍자적인 가운데 진지했다면, 요즘 작업들은 자신이 맞딱뜨린 현실에서 직접 발원하며, 자신의 현실을 관통하는 화두와 관련된다. 어머니/작가/생활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을 쉬게 됐는데, 이제 4살 된 아이가 그것을 따라하는 기막힌 상황을 접한다. 다른 아이들보다 언어습득 과정이 빠른 편인 아이가 잘 흉내 내면서 말하는 단어인 ‘hope’, ‘wish’를 비롯해서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의성어 등이 연주에 포함된다. 거기에는 소리와 음악, 숨과 말의 관련성이 있다. 아이는 타자(어머니)의 목소리로 말을 배운다. 기표는 선재한다. 언어를 통해 비로소 주체가 되는 인간화의 여정에서 억압과 분열은 불가피하다는 정신분석적 가설은 일방적 보살핌만 받던 딸아이의 미래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을 예시한다.   


작품 캡션


1. Feathers on lips 입술 위의 깃털


Single channel video (10mn 30sc), color, sound, 2020

단채널 영상(1030), 컬러, 사운드, 2020

Choreography & Co-direction: Min Kyoung Lee

안무 & 연출: 이민경

Performer: Hyee un Kwak, Ji hye Myeong, Seul kee Jang, Eunjoung Im

퍼포머: 곽혜은, 명지혜, 임은정, 장슬기

Filming & Editing: Sunyoung Lee

촬영 & 편집: 이선영

Sound: Garam Heo

음향: 허가람

Sound Assistant: Shin Won Park

음향 보조: 박신원

 

  

2. Three breaths 세 개의 숨


Video/ sound installation (12mn 37sc), Steel metal ducts, 2020

영상/ 사운드 설치(1237), 함석 배기관, 2020

Composition: Eun-Ji Anna Lee

작곡: 이은지

Performer: Uk Kim (bass clarinet), Subok Seo (percussion), Donghwan Lee (tuba), In-Hyun Jung (alto saxophone)

퍼포머: 김욱(베이스 클라리넷), 서수복(타악기), 이동화(튜바), 정인현(알토 색소폰)

Filming & Editing: Sunyoung Lee

촬영 & 편집: 이선영

Camera: Jeonghun Lee, Junha Choi

카메라: 이정훈, 최준하

Sound: Garam Heo

음향: 허가람

Sound Assistant: Shin Won Park

음향 보조: 박신원

   

   

 

출전; 금천예술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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