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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아 / 마나, 생명이 유래하고 죽음으로 소환되는

고충환

마나, 생명이 유래하고 죽음으로 소환되는


두툼하게 발라올린 물감 층과 그 질감이 손끝에 감촉돼 오는 질박한 마티엘, 아마도 호흡에서의 들숨과 날숨을 조율하는 것이며 숨고르기와도 무관하지가 않을, 느릿하게 머무는 듯 빠르게 흐르는 격렬한 붓놀림과 유기적인 곡선, 현란한 원색의 대비와 흘러내리다 맺힌 물감 자국, 때론 어두운 화면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색채들. 

이시아의 그림은 격렬하고 거침이 없다. 몸이 이끄는 대로 그린, 몸이 부른 대로 그린, 몸이 그린 그림 같다. 편의상 그림을 머리그림(개념미술)과 손 그림(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을 따라 그리는 재현적인 회화) 그리고 몸 그림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이 가운데 작가의 그림은 몸 그림 같다. 화면이 좁다는 듯 화면을 온통 가득 채우며 육박해오는 비정형의 유기적인 덩어리들이며 질박한 표면과 물성이 바이오리듬을 따라 그린 그림 같다. 그 만큼 분방하고 생생하고 직접적이다. 흔히 추상을 차가운 추상 내지 기하추상과 뜨거운 추상 내지 서정추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면 이 가운데 작가의 그림은 뜨거운 추상 내지 서정추상에 가깝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앵포르멜 내지 추상표현주의의 변주 내지 심화를 연상시킨다. 격렬한 내적 파토스를 비정형의 추상적 표현에 담아낸 그림들이며 경향들이다. 이 가운데 특히 추상표현주의는 다르게는 액션페인팅이라고도 하고, 이 말은 그대로 몸 그림을 의미한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온통 정념을 부려놓은, 한바탕 정념이 휩쓸고 지나간, 그런 몸 그림을 닮았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추상인가. 다만 추상일 뿐인가. 회화의 자율성을 추구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논리를 따라 그린 그림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작가의 그림은 형식적이고 논리적이고 개념적이지 않다. 그러기에 작가의 그림은 지나치게 격렬하고 뜨겁고 서정적이다. 그렇게 작가의 생리며 체질은 모더니스트보다는 표현주의자에 가깝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뭘 표현한 건가. 뭘 표현하기라도 한 그림인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추상이 그 자체로 그 무언가를 암시하지 않는다면, 그 추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최소한 무의미하다고 했다. 다만 형식적이기만 한 순수추상을 거부한 말이기보다는, 모든 그림은 심지어 순수추상을 지향할 때조차 사실은 언제나 그 무언가를 암시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를테면 서정추상이 정념을 암시하고, 기하추상이 내적 질서를 암시하는 것과 같은. 어쩜 그림은 암시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과 같은. 

그렇다면 다시, 작가의 그림은 뭘 재현하고 표현하고 암시하는가. 그저 현란한 원색대비와 격렬한 붓놀림 그리고 그 질감이 손에 잡힐 듯 감촉돼오는 마티에르와 물성으로 그린 그림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그림 속에서 이러저런 형상이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인다. 이를테면 뇌 같기도 하고 심장 같기도 한, 장기의 단면을 클로즈업해 확대시켜놓은 것 같은, 자궁 속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 같은, 만개한 꽃잎의 속살을 보는 것 같은, 현미경으로 확대해 본 세포 내지 정자를 그린 것 같은, 피가 흐르는 혈관 내부를 확장해 단면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장기의 단면을 절개해 보여주는 것 같은 신체의 일부며 단면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무지갯빛을 머금은 생명나무(?) 같은, 안료의 지층 밑에서 빛 알갱이가 포말처럼 일렁이고 수런거리는 것 같은, 어둠 속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빛 알갱이며 광점들 같은, 내적 에너지를 직접 표현한 것 같은, 그런 심상 이미지도 있다. 그런가하면 버섯의 단면을 양식화해 그린 것 같은, 물을 차고 올라오는 아님 물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해파리 같은, 그런 그림이며 이미지며 형상도 있다. 

이 모든 그림이며 이미지며 형상들은, 다 뭔가. 마치 자기를 보아달라고 하기라도 하듯, 그림 속에서 꿈틀대며 용솟음치는, 이것들은 다 뭔가. 여기서 00같은 내지는 00같아 보이는, 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일이다. 작가의 그림은 재현적인 그림이 아니다. 암시적인 그림이다. 추상적 형식을 빌려 감각적 실재를 암시하는 그림이다. 자연도감이나 생물도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로지 작가의 감성만으로, 몸의 본성이 부르는 대로 따라 그린 그림이다. 참고한 것이 있다면 그저 몸에 기억으로 각인된(메를로 퐁티라면 의식의 지향호라고 했을) 형상들이 반사적으로 표출된, 그래서 다분히 무의식적인, 어쩜 의식과 무이식이 그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넘나들어지는, 그런 경지며 차원이 열어준 비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재현적인 그림이 아님에도, 오히려 재현적인 그림 이상으로 직접적이고 생생하고 살아 움직이고 꿈틀댄다. 마치 날것들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이 날것들의 그림이 일종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무의식의 풍경이며 심상풍경을 연상시킨다. 신체의 장기들이며 부분들이며 단면들이 어우러진, 마치 생명과 생리와 생태 현상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 같은, 그런 그림을 연상시킨다. 몸을 일종의 소우주로 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몸 안쪽으로 또 다른 우주가 열리는 것 같은, 이런 소우주로서의 몸이 우주와 교감하는 것 같은, 그리고 그렇게 호흡을 상호 교환하는 것 같은, 그런 그림을 연상시킨다. 한마디로 내적 에너지의 분방한 흐름이며 표출을 연상시킨다. 내적 에너지? 이는 그대로 기며 생명이 아닌가.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흐르다가 맺히는, 머물다가 흐르는, 느리게 흐르다가도 격렬하게 분출하는, 그리고 그렇게 생성과 소멸을 반복 순환하는, 그런 기의 분방한 흐름이며 약동하는 생명을 그린 그림이다. 

이렇게 전재하고 보니 비로소 작가의 주제가 보이고, 작가의 주제의식이 손에 잡힌다. 바로, 생명이며 생명력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 나아가 모든 존재하는 것들 고유의 본성으로서의 생명력을, 작가는 그리고 싶은 것이다. 생명이란 특히 여성성의 본질이며 본성이다. 작가는 그 본질이며 본성을 그리고 싶은 거다. 생명은 여성성의 본질이며 본성이라고 했다. 여성은 생명을 주관하는 자이며, 생명의 주체이다. 생명과 관련된 신화적 에피소드들, 이를테면 땅을 관장하는 신을 지모 내지 대모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한편으로 생명을 관장하는 신은 죽음도 관장한다. 땅이 생명을 낳듯 주검을 거두어들이기도 한다는 사실인식(생명은 흙으로부터 나서 흙으로 되돌아간다)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이처럼 생명과 죽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생명에도 속하고 죽음에도 속하는, 생명으로 하여금 죽음을 직시하게 하고 죽음으로 하여금 생명을 예비하게 하는, 그리고 그렇게 생명과 죽음을 하나로 관장하는 존재로 치자면 무당이며 마나며 리비도를 떠올려볼 수가 있겠다. 주지하다시피 무당은 예술의 본성과도 관련이 깊고(감각적 실재와 허구적 실재 그리고 관념적 실재의 경계를 넘나드는), 마나는 인간의 인식으로는 알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생명의 우주적 차원 내지 생명력 자체를 의미하며, 리비도는 주체에 속한 것임에도 주체마저 어쩔 수 없는 맹목적인 힘(생명으로 내달리고 죽음으로 치닫는, 그래서 생명충동과 죽음충동의 원인이기도 한)을 뜻한다. 

작가는 그렇게 무당을 그리고, 마나를 그리고, 리비도를 그리고 있었다. 무당이며 마나며 리비도가 밀어올린 생명을 그리고 있었다. 어쩜 그 자체 비결정적이고 항상적으로 이행하는, 그래서 뭐라고 규정할 수는 없는, 인식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그저 감동하고 감격할 수 있을 뿐인, 그런 생명을 그리고 생명 자체를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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