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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석 / 텍토닉에서 루키즘으로, 기능만능주의에서 외모지상주의로

고충환

장원석 / 텍토닉에서 루키즘으로, 기능만능주의에서 외모지상주의로


사람들이 머리에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온몸을 비닐봉지로 감싼 사람도 있다. 그렇게 머리에 쓰고 온몸을 감싼 비닐봉지로는 흔한 검은 비닐봉지도 있고 이러저런 색깔의 속이 비처보이는 투명한 비닐봉지도 있다. 이게 다 뭔가. 사람들은 왜 머리며 온몸에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있는가. 우의화(알레고리)인가. 그렇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실제로 비닐봉지를 뒤집어 쓸 일은 없다. 여기서 작가는 특별한 경우를 일반적인 경우로 바꿔놓고 있다. 그래서 친근하고 낯설다. 작가의 그림이 친근한 것은 알만한 주변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낯선 것은 하나같이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렇듯 친근한 일상을 낯선 정경으로 바꿔놓고 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의 소외 내지 소격효과와도 통한다. 왜 멀쩡한 일상을 낯설게 하는가. 멀쩡한 일상이, 멀쩡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일상이 사실을 알고 보면 멀쩡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멀쩡하지 않은 일상을 멀쩡하다고 느끼는 건 사실은 막연한 느낌이며 착각일 때가 많고, 자기반성적인 과정을 결여한 관성과 선입견으로 내재화된 이데올로기인 경우가 많다. 



KISS_70-98cm_Fomex cut_2014


작가는 이처럼 특별한 경우를 일반적인 경우로, 친근한 일상을 낯선 정경으로 바꿔놓는 과정을 통해서 일상이 은폐하고 있는, 아님 일상에 잠복된, 그래서 일상을 온통 흔들어놓을 수도 있는(자크 라캉이라면 실재계의 돌발적인 출현이라고 했을) 이데올로기에 주목하게 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비닐봉지를 매개로 억압적인 현실을 폭로하고, 현대인의 집단무의식을 드러내고, 그리고 그렇게 현대인의 삶의 우의화를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사람들이 머리에, 온몸에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왜 쓰는가. 비닐봉지는 나를 숨겨준다. 그렇게 비닐봉지 속에 아님 뒤에 숨어서 나는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가 있다. 그럼, 비닐봉지 뒤에 숨지 않으면 온전한 나를 보존할 수가 없는가. 비닐봉지를 벗으면 나의 어떤 부분(이를테면 결점 같은, 그래서 오히려 더 나 자신에 가까운)이 적나라해지기라도 하는가. 


주체는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나뉜다. 페르소나는 사회에 내어준 주체, 사회화된 주체며 제도화된 주체, 내가 봉지를 벗었을 때의 주체다. 그리고 아이덴티티는 그렇게 사회화되고 제도화되기 이전의 주체며, 내가 여전히 봉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의 주체며, 봉지 뒤에 숨은 주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정한 나의 아이덴티티를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아이덴티티는 이렇듯 다른 사람들에게 낯설고 심지어는 나 자신에게마저 낯설다. 사람들이 나로부터 보고 싶은 모습 곧 타자들의 욕망에 나 자신을 맞춘 삶을 살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내 삶이 그렇고 네 삶이 그랬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타자인 삶을 살았고, 나아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마저 타자인 삶을 살았다. 서로에게 소외된 삶을 살았고, 나아가 자기소외를 내재화한 삶을 살았다. 그렇게 나는 네게서 사실은 내가 욕망하는 모습을 보고, 너는 나로부터 네가 욕망하는 모습을 본다. 이건 무슨 묵언의 계율 같아서 누구도 위반할 수가 없고, 만약 위반한 경우에는 어김없이 처벌이 뒤따른다. 이를테면 어쩌다 페르소나 뒤에 숨은 아이덴티티를 들키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장이다. 이와 관련해 작가가 머리에 봉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그려놓고 있는 하회탈이 의미심장하다. 하회탈은 알다시피 웃는 모습 그대로 굳어진 표정을 보여준다.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너는 나에게 하회탈처럼 끝내 웃는 모습만을 보여주어야 한다. 어쩌다 그렇게 화석화된 얼굴 뒤에 숨은 살아있는 얼굴을 들키기라도 하면 그대로 아웃이다. 


이런 삶 곧 서로를 소외시키고 나아가 자기소외를 내재화한 삶, 타자에게 낯설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마저 낯선 삶이 왜곡된 것임은 어쩜 당연한 일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왜곡이 결정적인 키워드로 부각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봉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왜곡돼 보이고, 무슨 만곡거울에 반영된 상처럼 휘어진 모습이 왜곡돼 보이는 연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림으로 드러나 보이는 왜곡상은 사실은 내면이 밀어올린 왜곡상이었음이 판명되며, 작가는 바로 그런, 저마다의 내면의 왜곡상을 그리고 있었고, 그리고 그렇게 현대인의 일그러진 초상을 그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사람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기계를 그렸었다. 그러나 그 기계는 다만 기계만은 아니었다. 마치 기계처럼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를 기계에 빗대어 그린, 일종의 우의화였고 알레고리였다. 여기서 사람들은 마치 영화 모던타임스에서처럼 기계부속에 비유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맞은바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어김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기계도 잘 돌아가고 사회도 잘 돌아간다. 이처럼 사람을 한낱 기계부품으로 전락시킨 사회가 소외를 피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경제효율성의 법칙이 만든 준칙이며 결과이다. 일을 세분화하고 노동력을 단순화시켜, 이런 세분과 단순이 어우러져 생산성을 높이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개인과 개인의 관계마저 기계에 맞춰 세분화되고 제도에 맞춰 단순화된다. 기계화된다는 것은 곧 제도화된다는 것이며, 그런 기계화며 제도화의 기획에 맞춰 사람이 기계화되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기계화되고, 사회가 기계화되고, 삶이 기계화되고, 의식이 기계화되고, 무의식이 기계화되고, 존재 자체가 기계화된다.  



네가 원하는게..._100-70cm__Fomex cut_2014


이런 숨 막히는 현실이 소외를 부르고 억압을 부른다. 그리고 그렇게 불러들인 소외와 억압이 잠수를 탄다. 그러므로 의식의 수면 밑에는 언제나 이처럼 잠수를 탄 소외와 억압이 무의식의 지층을 이루면서 호시탐탐 수면 위로 부각될 순간만을 목 놓아 기다린다. 프로이트라면 억압된 것들이 귀환될 순간을 기다리고, 융이라면 집단무의식이 자기를 실현할 순간을 기다리고, 라캉이라면 실재계가 상징계의 균열을 뚫고 상징계를 온통 위험에 빠트릴 순간을 기다린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기계를 통해서 사실은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를 표상했다. 돌이켜보면 그 표상이 사람들이 머리에 봉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근작에서의 숨 막히는 현실을 예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일관성이며 논리의 비약이라고 할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작가가 그린 전작에서의 기계와 근작에서의 사람,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부품과 서로를 소외시키는 인간관계, 정교한 기계와 숨 막히는 현실, 기계지상주의(Tectonic)와 외모지상주의(Lookism)는 분명 논리적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더욱이 전작이나 근작 모두 마치 기계처럼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어떤 사람은 봉지로도 모자라 심지어는 상품포장용 랩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그런 숨 막히는 현실이라는 우의화 내지 알레고리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마지막으로 판화 이야기를 해보자. 내용분석에 이어 형식 분석에 해당하는 대목으로서, 알다시피 작가는 이 모든 이미지며 상황을 판화로 그렸다(찍어냈다?). 특히 근작에서 산업용 재료로 알려진 포맥스 판을 애용하는 편인데, 그 표면질감이 소프트해서 종전의 고무판 곧 리놀륨 판과 함께 전통적인 목판화 대용으로 널리 쓰인다. 작가는 이 포맥스 판을 판재로서 도입해, 여기에다 소멸법을 적용해 판각을 하고 판화를 찍어낸다. 문제는 소멸법이 유독 작가의 경우에만큼은 예사롭지 않은,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마저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면, 보통 판화를 찍기 위해선 여러 개의 판이 있어야 한다. 단색판화가 아닌 색상이나 명도에 변화가 있는 경우라면, 그 색상과 명도에 해당하는 수만큼의 판이 있어야 하고(흔히 색분해로 알려진), 그 판들을 겹쳐 찍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한 장의 이미지를 얻을 수가 있다. 그런데, 소멸법에서는 단 하나의 판만이 존재한다. 모든 색상과 명도를 단 하나의 판 안에서 판각하고 찍어내는 점진적인 과정을 통한 것인 만큼, 최종적으로 판 자체는 소멸돼 없어진다. 그래서 소멸법이다. 정작 이미지를 만든 판은 소멸되고, 오로지 이미지만 남는다? 한 장의 이미지 뒤편으로 판이 사라진다? 여기서 이미지를 혹 판의 흔적이며 희미한 그림자로 볼 수는 없을까. 이런 사실은 그대로 작가의 판화에 나타난 상황논리, 이를테면 봉지 뒤편으로 숨는 사람들이며 소외된 사람들과 같은 익명적 주체들에 대한 메타포처럼 읽힌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형식과 내용이 부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부합하면서 서로를 소외시키고 자기소외를 내재화한, 소통 대신 불통을 겪는, 저마다 봉지 하나씩 뒤집어쓰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익명적인, 얼굴이 없는, 자기를 잃어버린, 그런 현대인의 일그러진 초상을 그림의 표면 위로 밀어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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