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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수 / 평면에 표상된 빛의 구조와 정신

김영호


새벽녘을 나는 여객기의 둥근 창문 너머로 펼쳐진 빛의 공간을 바라본 경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박현수의 <리듬> 시리즈가 나타내는 빛의 공간에 동화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새벽이 아니라 황혼의 시간대라도 좋다. 광대한 대기와 대지를 물들인 빛이 보는 이를 숭고의 영역으로 이끈다면 박현수의 작품 앞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 빛의 표상 형식으로서 구조와 정신이다. 빛의 구조란 그림으로 표현된 색채의 질서를 말하며 빛의 정신이란 화면에 표현된 색채의 질서를 통해 경험하는 추상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부연하자면 자연의 빛이 평면의 색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형식과 상징이 곧 빛의 구조와 정신이다.




박현수의 그림은 경험으로부터 온 것이다. 작가 자신은 그것이 그랜드캐니언에서 체험한 빛의 감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회상한다. 웅대한 절벽과 다양한 색채의 암석이 시생대 이후의 시간을 품고 펼쳐진 거대한 공간에 대한 경험이다. 체험적 빛의 공간을 이해하는 것은 작가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는 잣대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적어도 그의 예술이 순수 관념의 영역에서 온 것이 아니라 풍경화처럼 자연에 대한 감흥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작품에 흐르는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대한 박현수의 태도는 리얼리스트의 시각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박현수의 그림은 자연의 빛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 빛의 체험을 예술으로 표상하는 과정에서 빛의 구조와 정신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형식개념이 개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박현수에 있어 캔버스는 치열한 행위와 사색의 장이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이 화면에 시도했던 행위 이상의 드리핑 작업을 반복적으로 시도하여 마침내 밑작업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체험한 물감의 생리들로서 번지고, 밀어내고, 섞이고, 깎이며, 스며들고 흐르고, 건조되는 현상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마침내 이 모든 표면을 색면으로 뒤덮어 버린다. 충동적이던 행위의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 작가는 앞에 놓인 캔버스 앞에서 표상을 위한 집중과 긴장의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물감이 마르기 전에 고무칼을 이용해 드로잉과 걷어내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랜드캐니언에서 관찰했던 돌맹이들이 탄생하고 소통의 도구로서 알파벳이나 숫자들이 화면에 자리잡는다.




박현수가 시도하는 빛의 표상작업은 다양한 시리즈로 나타난다.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작품들을 대상으로 살펴보면 대략 네 개의 시리즈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C’로 표현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시리즈를 비롯하여 <리듬>, <서어클>, <바디> 시리즈가 그것이다.
우선 <커뮤니케이션> 시리즈는 화면 전체를 작가 특유의 작은 기호들로 채워 배열해 놓은 작업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다양한 컬러를 드리핑 기법으로 처리해 건조시킨 뒤 화면 전체를 색면으로 다시 덧칠하여 물감이 마르기 전에 기호적 형상으로 긁어내는 방법을 사용한 초기의 작업들이다. 고무칼로 긁어내어 바탕을 다시 나타내게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스크래치 기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덧칠된 물감을 걷어내며 탄생한 기호들은 칼리그패프처럼 나름의 리듬과 질서를 지닌 채 화면 전체에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복잡한 구조를 띠게 되지만 박현수의 작업 전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법으로 양식화 되고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러한 행위의 배면에는 소통의 조건이 되는 두개 이상의 개체적 단위 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리듬> 시리즈는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비행기 창문 너머로 보이는 빛의 공간을 연상케 하는 작품들이다. 화려하면서도 장식성이 돋보이는 시리즈이며 원형 창문은 앞선 스크래치 기법으로 바탕의 무지개 빛 색면을 드러내게 하였으며 원의 내부 공간은 수평적 구조를 지닌 다양한 색채의 빛으로 채워져 있다.
세 번째로 <서어클> 시리즈는 말 그대로 원형 혹은 타원형으로 설정된 색면을 배경으로 다양한 형태의 기호들을 무중력 공간에 부유하는 유물의 파면들처럼 배치한 작품이다. 배경 이미지는 그 위에 표상된 기호 이미지를 받쳐주는 바탕으로 보이기도 하며 정신의 그림자 이거나 핵의 구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어클> 시리즈의 표상방식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고무칼로 벗겨낸 기호의 표면이 발산하는 무지개 빛 컬러는 마치 금관이나 향로 등의 전통적 금속공예 유물의 아름다움을 연상케 한다. 이 때 나타나는 정신성은 이 시리즈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바디> 시리즈는 말 그대로 몸의 실루엣을 암시하는 색면을 설정하고 그 표면에 작가 특유의 색환을 배치한 것이다. 이 시리즈는 작가 자신의 추상적 패턴에 구체적인 사물을 암시적으로나마 배치시키려는 의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상과 같이 박현수의 작품에서 표상되는 빛의 구조와 정신은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통해 전개되고 있다. 그 형식은 스크레치 기법에 의한 색면의 화려함을 공통분모로 삼아 일관성을 보인다. 그 형식은 드리핑, 드로잉, 배열, 반복, 패턴 등의 기표적 용어로 정리될 수 있다. 또한 동전의 양면처럼 자리 잡은 기의적 개념들은 빛, 공간, 그림자, 정신, 풍경, 자연 그리고 핵의 의미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의 일관성과 형식적 실험의 다양성은 박현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강점이며 그의 작업에 큰 기대를 갖게 하는 요인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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