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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배 / 토템의 섬에서 삶의 지평을 보다

김영호

조각가 임춘배를 대할 때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예술이 무언가? 그의 작품제작 태도와 작품형식의 다양함을 두고 하는 질문이다. 그는 조각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30여년의 세월 동안 인체와 추상의 영역을 넘나들었고 소조와 석조 그리고 목조와 철조에 이르는 재료와 기법을 폭넓게 다루어 왔다. 작가 자신은 특정 시기마다 감성이 내키는 대로 작업을 해 왔을 뿐이라고 한다. 화산섬에서 얻은 독특한 재료에다 토템 사상을 주제로 삼고 있지만 그에 있어 작품이란 그저 삶의 궤적이라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의 그것처럼 그의 예술적 태도는 굴레로부터의 일탈과 자유에 대한 의지로 채워져 있다.
예술이 작가의 삶을 표상한 것이라면 작품은 작가의 삶을 넘어설 수 없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 자체의 형식에 순수성과 일관성을 부여해 온 모더니즘적 태도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모더니즘의 몰락 후 형식의 파기와 장르간 통합을 거듭해 온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삶의 예술론은 이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연구가 작품 형식에 대한 연구를 앞서고 있는 것이 오늘의 추세다. 적어도 예술창작의 원리가 형식에서 내용으로의 이동은 현대 조각이 보여주는 하나의 특징적 현상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임춘배의 예술은 형식주의에서 점차 벗어나 의미서술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작업노트를 보면 그가 표상코자 하는 주제는 사랑, 이별, 꿈, 좌절, 분노, 성, 추억, 침묵, 자비, 기도, 염원 등으로 되어있다. 일상적 삶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재료의 외관을 빌려 추상적 형태로 표상되는 것이다. 작가의 토템사상은 이러한 주제들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이르게 된 의미생산의 장치라 할 수 있다. 토템은 초기의 인체작업 이후 작가가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예술적 토양이 되었고 그 토양에서 작품이라는 다양한 삶의 열매들을 거둬들이고 있다.

임춘배의 토템 작업은 시간과 더불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석조로 목조로 그리고 최근에는 철조로 자신의 구원적 신앙을 실험하고 있는 셈이다. 신화와 전설의 영기가 마을의 곳곳에 머무는 제주에서 태어나 성장해 오면서 자연스럽게 이르게 된 것이 토템이었다. 마치 샤먼의 춤처럼 끌과 망치로 몸을 격하게 움직이며 재료와 충돌하는 작업들을 선호하는 것도 황홀경의 상태에서 영적교류를 기원하는 그의 태도에서 온 것이다.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토템은 자신에 있어 숙명적인 주제’가 되었다. 미개사회의 산물인 토템이 현대에 와서도 유지되는 것은 자연과 생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사연과 다르지 않다. 그 물신주의의 중심에 화산암인 현무암이 자리잡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의 석조작품들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1990년대 전반에 검정색 제주 현무암만을 사용하여 토템적 상징물을 만들어낸 시리즈들로 2회 개인전에 출품된 것들이다. 대지위에 놓인 기하학적 구조물들은 추상적 형태를 지니면서도 인체나 곤충을 연상케 하는 원시적 상징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다. 상징성을 띤 토템의 모습이면서도 조형물로서 높은 가치를 유지하면서 작가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1996년 이후에 들어서 큰 변화가 나타난다. 3회 개인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을 보면 변화는 의미서술의 형식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전개된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도 석재 이외에 목재와 더불어 색실이나 놋수저 그리고 대못 등의 오브제를 결합시킴으로서 상징성이 한층 강화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의 작품들은 성적 도상이 강화됨으로서 순수조형적 형태감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앞서 언급했듯이 작품의 형식에서 삶의 메시지로 그 창작의 의도가 바뀌는 과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작가가 드러내려는 주제는 비단 성적 도상뿐만 아니라 종교적 소재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급기야 임춘배는 스테인레스 스틸을 결합한 철조작업에 손을 대고 있다. 이전의 현무암 작업에서 보여주었던 기하학적 패턴의 구조를 강한 물성이 돋보이는 철재로 다시 바꾸어놓은 형국이다. 작가는 여전히 직선과 곡선의 조화 속에 토템의 상징성을 드러내는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 때의 상징성이란 분노와 기쁨 등의 일상적인 삶의 굴레를 지시한다. 철조가 지닌 기하학적 패턴과 곡선의 유려함을 결합한 이 시리즈에서 제주 현무암만을 사용한 시기에 나타난 토템적 상징성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필자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이상과 같이 조각가 임춘배의 작품은 자유로운 변화 속에서 인체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재료와 형식의 작업을 전개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를 통합하는 창작의 배경으로 토템의 미학을 운용하고 있다. 구원의 미학으로도 통하는 토템사상은 작가의 삶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우리들의 보편적 삶을 직시토록 유도한다. 그의 작업은 무속과 신화의 섬 제주의 환경에서 비롯되었지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욕망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조각가 임춘배를 대할 때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예술이 무언가?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질문을 그에게 하지 못하고 있다. 작가에 있어 예술이란 그저 일상적 삶이며, 자유 실천의 장이며, 삶의 구원을 위한 상징이며, 이 모든 것이 제주의 자연과 생태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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