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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극사실 회화의 미술사적 규정 문제

김영호

I. 서론

‘한국 극사실주의’에 대해 언급할 때 개념상 아직도 미진한 측면이 있다. 체계화된 어떤 학설이나 이념을 뜻하는 주의(ism)라는 단어를 이 미술 경향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 평론가들 대부분이 자신의 비평문 속에서 ‘극사실주의’ 대신에 ‘극사실 회화’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과연 한국 극사실 회화의 경향을 진단하기 위한 비평적 기준이나 미학적 원리가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좀더 따지고 보자면 국내 미술계에 있어 ‘극사실’이라는 용어 자체의 사용에도 논란이 있어왔다. 그 이유는 이 용어가 미국에서 수입된 미술사조로서 ‘하이퍼리얼리즘’에서 유래되었으며, 아울러 197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새로운 형상회화의 형식논리를 대변하기에 부적절하다는 지적 때문이다. 1980년대 초, 극사실 회화의 경향이 국내 화단에 확산되던 무렵 이 경향을 대표하던 일련의 화가들이 ‘우리는 하이퍼 아류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하고 나선 것도 한국에서 전개되던 새로운 형상회화가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과 차별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의 1970년대에는 새로운 차원의 형상미술을 시도했던 일련의 작가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며, 자신들의 작업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단화 된 움직임으로 확산되었고 미술사의 주요 경향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극사실 화가들은 현실적으로 형상미술의 새로운 경향성을 일구어 내는데 성공했으나 그것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 결과 미국이 내세우는 글로벌 미술사에 종속되면서 한국 극사실 회화는 독자적 형식논리를 세우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필자는 한국 극사실 회화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된 원인의 하나를 당대 화단의 성급한 양분화 현상의 영향으로 이해하고 있다. 1980년에 들어서 한국 미술계는 화단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과, 현실에 대한 참여와 발언을 작가의 소명으로 내세우며 등장한 민중미술 계열에 의해 미술계가 양분되는 것으로 진단함으로서 극사실 회화와 같이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하는 일련의 경향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 극사실 경향의 작가들이 국내 미술관과 미술시장에서 빈도 높게 소개되면서 극사실 회화가 한국 미술사에 자리매김 하기 위한 보다 심층적 연구가 더 필요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우선 한국의 극사실 회화를 둘러싼 용어사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 새로운 경향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한 선행 과제로서 한국 극사실 회화의 탄생 배경과 비평적 원리에 대해서도 개괄적으로 진단하려 한다.


II. 극사실주의의 개념과 용어사용 문제

한국의 극사실 회화는 국내외에서 전개되던 타 미술경향들과 복잡한 영향관계 속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팝아트나 하이퍼리얼리즘 뿐만 아니라 (아직도 연구가 미진하지만) 국전 내부에서 재래적 구상회화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작가들과 연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1970년대를 전후해 국내 화단을 풍미하던 이른바 ‘모더니즘 계열’의 집단적 운동과도 긴밀한 영향관계를 유지하면서 전개되었다.

주지하듯이 극사실주의란 용어는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태동한 하이퍼리얼리즘(Hyper Realism)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이퍼리얼리즘의 한국어 번역이 극사실주의인데 그것의 발생배경이나 형식논리가 한국 극사실적 경향의 회화에 적용시키기에는 부적절한 면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이유는 ‘사실주의라는 유전자 없이 태어난 극사실주의’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인해 한국의 극사실주의 미술은 미국의 그것에 종속적 경향 혹은 아류적 경향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이퍼리얼리즘이란 말 그대로 리얼리즘, 즉 현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재현적 회화의 전통에 ‘극’, ‘초과’라는 의미의 접두어 ‘hyper’가 붙은 합성어다. 거기에는 사실주의의 전통에 근거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선 경향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담겨있다. 다시 정리하면 하이퍼리얼리즘은 대상의 재현을 괄호 속에 집어넣어 버린 추상형식의 모더니즘 미술에 대응하여 발생한 것이며, 전래적 구상형식의 아카데미즘 미술도 거부한 이중 부정의 예술 경향이었다.

하이퍼리얼리즘은 일상적 대상의 재현을 시도하되 전통적 회화방식이 아닌 사진적 방식으로 재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회화가 사진이 될 수 없는 당연한 이유에서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진 자체가 아닌 제3의 회화방식이 되었다. 결국 하이퍼리얼리즘은 사진과 회화의 틈새를 파고들면서 ‘익명적 주관성’이라 부를 수 있는 모순적 의미구조를 조형적으로 실현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익명성은 주로 사진적 메커니즘을 기법을 차용함으로서 표상되었고, 주관성은 시리즈로 이어지는 소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하이퍼리얼리즘은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극복하며 태동된 팝아트와의 연계성을 지니면서 소비산업사회와 일상적 현실을 여과없이 보여주었다. 이들이 즐겨 차용한 소재는 도시풍경으로서 광고, 네온사인, 카페, 슈퍼마켓 등과 기술적 생산물로서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 등이 주를 이루었으나 인물과 정물에 이르기 까지 그 범주는 다양하다. 이들 하이퍼리얼리즘 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미학적 특성은 차가운 사진적 재현처럼 객관적 묘사에 충실함으로서 개인의 감정이나 주관적 해석이 없는 냉정함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몰개성적 이미지를 위해 그들이 상용하는 방식은 매끄러운 표면과 물성이 드러나지 않는 붓질을 기본으로 삼는다. 한편 캔버스 위에 이미지를 슬라이드로 비추어 그리거나 아예 감광유제를 사용한 전사를 통해 이미지를 얻어내는 테크닉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하이퍼리얼리즘 미술은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구상작업이 되었다는 평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이상과 같은 하이퍼리얼리즘의 뚜렷한 발생배경이나 형식논리와는 달리 한국의 극사실 회화는 탄생에서부터 문제의식을 동반하고 있었다. 독자적 형식논리의 빈곤은 외래 경향에 대한 적극적 수용과 그 소극적 변용의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1970년대 당시 한국에는 극사실 회화의 탄생을 정당화할 변증법적 대상으로서 사실주의 전통이 부재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일상적 현실의 실재성을 표상하려는 경향은 산수화나 인물화에서 없지 않았으나 실경實景과 사의寫意 등의 전통 화론이 지향하는 실재성의 개념은 하이퍼리얼리즘의 리얼리티 개념과 빗대어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이후에 전개되었던 서세동점의 문화적 상황에서 유입된 아카데믹한 사실주의 미술은 일제가 창설한 선전(조선미술전람회)을 거쳐 1949년에 정부정책으로 창설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으로 이어지며 미술사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0년대의 한국 극사실 회화는 하나의 미술사조로서가 아니라 설치나 해프닝 등과 같은 하나의 단편적 외래 경향으로 취급되면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1980년을 전후해 극사실 회화의 경향이 집단적 움직임으로 확산되고 한국미술계를 장식하는 하나의 경향으로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역사적 문맥화를 위한 비평적 시도들이 더불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져 온 김복영 선생은 삼성미술관이 2001년 기획한 <사실과 환영: 극사실회화의 세계>의 서문을 통해 ‘극사실 회화를 단순히 기법적 측면에서 국한해 볼 것이 아니라 형상충동 내지는 구상충동의 시대적 표출과 표명으로 격상시켜 부를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 미술사의 문맥에서 형상성 혹은 구상성을 띤 일련의 미술경향들을 통섭해 미술창조의 본령인 창조충동의 원리로 진단하려는 비전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있으며 후학들의 동의를 이끌어내었다.

극사실 회화를 인간이 지닌 창조충동의 시대적 표상으로 진단하려는 태도는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현실과 일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 미술인들이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는 표현방식이 바로 구상적 경향이라는 이론은 독일의 미술사가 보링거(Wilhelm Worringer)가 논증해 보인바 있다. 즉 자연 친화적 세계관에서 태동된 것이 구상적 경향이며, 자연을 극복하고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지닌 인간들의 세계관은 추상적 경향의 예술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링거의 이론은 20세기 미술에도 적용될 가능성을 제공한다. 가령 세계관의 변화에 따른 표현방식의 이동은 양차대전을 끼고 있는 20세기 전반에 추상미술을 일으켰고, 1950년대 이후에 접어들어 현실과 주변적 일상에 대한 관심이 예술가들에 의해 새롭게 대두되면서 구상미술의 부활을 초래했다는 점이 그렇다. 현실 도피적 세계관이 추상충동을 자극하게 했다면 현실 수용적 세계관이 구상충동을 자극해 그에 적합한 시대적 양식으로서 팝아트나 하이퍼리얼리즘을 태동시켰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평론가 김복영의 형상충동 이론은 한국 ‘극사실 회화’를 ‘신형상 회화’로 바꾸어 부르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극사실 회화를 신형상 회화의 범주에 넣어 다룸으로서 국전시대를 전후한 (재현주의적) 형상 회화와 차별화 시키고, 나아가 구상회화의 전통적 맥락 속에서 한국 극사실 회화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에도 형상충동의 화맥이 뚜렷이 존재한다는 점을 그 성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극사실 회화를 신형상 회화로 대체해 부르는 일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두개의 용어는 서로 다른 개념과 지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형상에서 형상이란 ‘사물의 생긴 모양을 뜻하는’ 형태적 개념이며, 극사실에서 사실이란 ‘사물의 묘사와 관련된’ 기법적 개념이기 때문에 용어를 바꾼다는 것은 그 지향점을 바꾸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만일 한국의 ‘극사실 회화’를 ‘신형상 회화’로 표기할 경우 그 개념은 다양한 구상적 경향을 포괄하는 양상을 띠게 되며 나아가 치밀한 대상 묘사를 근간으로 삼는 극사실 회화가 일구어낸 미학적 표준이나 비평적 가치는 여전히 미진하게 남게 된다. 따라서 한국 극사실 회화의 형식논리와 신형상 회화의 형식논리 사이에 간극을 메꾸기 위한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고 한국미술사에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한국 극사실 회화의 탄생을 둘러싼 배경을 좀더 폭넓은 시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폭넓은 시각이란 미국 하이퍼리얼리즘의 영향 혹은 극복으로 한국 극사실 회화가 탄생되었다는 기존의 비평적 방법을 넘어 새로운 형상미술을 지지했던 언론기관들의 공모전, 국전 내부에서 추진되었던 실험적 형상미술, 그리고 당대의 화단을 변혁시켰던 모더니즘 미술을 한국 극사실 회화의 탄생배경으로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통시적이고 융합적인 환경의 산물로서 극사실 회화 혹은 신형상 회화의 개념과 형식논리를 개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진다.


III. 한국 극사실 회화의 세 탄생배경

1. 민전
전후 한국미술사에서 전래적 구상회화의 형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형상성을 찾기 위한 노력은 197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때맞추어 창설된 신문사의 공모전인 한국미술대상전, 중앙미술대전, 동아미술제 등은 형상미술에 대한 예술가들의 관심을 자극하고 그 파문을 사회적으로 확대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70년 한국일보사가 구조적 모순과 한계를 지니고 있던 국전에 대립하기 위해 ‘한국미술대상전’을 출범시켰고, 1978년에는 동아일보사와 중앙일보사가 경쟁적으로 유사성격의 공모전을 조직해 탄생시키면서 ‘국전에 대응한 사회적 신뢰의 민전’들이 주목을 끌기 시작했던 것이다.

언론기관이 현대미술운동을 주도한 첫 사례는 앞서 언급한 세 신문사보다 훨씬 앞선 1957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현대미술전은 1969년까지 13회를 거듭하면서 실험적인 미술을 발굴 보급하는데 기여하는 한편 1962년부터는 학생 공모전시를 병행했다. 조선일보의 선도적 현대미술전 사업이 사내 사정으로 종료된 이듬해인 1970년 이번에는 한국일보사가 ‘한국미술대상전’을 출범시켰고 1978년에는 중앙일보사와 동아일보사가 경쟁적으로 현대미술공모전을 열면서 민전의 시대가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한국일보사가 1970년에 개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는 김환기의 점묘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대상을 받아 국내 화단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전 홍익대학 학장이자 예술원 회원이었고 국전심사위원도 지낸 정상급 서양화가’가 공모전 응모로 대상을 차지하게 된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국전 중심의 화단 풍토를 쇄신하고자 등장한 최초의 본격적인 민전이 2회 전시를 개최한 후 중단되고 만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후 한국일보사는 1976년에 공모전을 재개하여 형상계열의 작가로서 배동환에게 은상, 박동인에게 특별상을 수상했고 1978년에는 김홍주가 <무제(문)>으로 최우수 프론티어상을, 지석철이 장려상을 수상하면서 신형상 미술의 확대를 위한 일련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공모전은 아쉽게도 역사 속으로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동아미술제는 1978년 “새로운 형상성의 추구”라는 표제를 내걸고 발족했다. 격년제로 시행된 이 공모전은 제1회전에서 미군 비행장을 그린 변종곤의 극사실 수법의 작품 <1978년 1월 28일>을 대상으로 선정하고, 박장연의 <마포> 연작을 동아미술상 수상작으로 뽑으면서 설립 표제에 걸맞는 분명한 성격을 부각시켰다. 이후 1980년에는 한운성의 정밀한 사실적 표현방식의 동판화 <문>에 대상을, 안병석의 풀밭그림 <바람결>이 동아미술상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면서 공모전의 방향성을 뚜렷이 세워 나갔다.

한편, 중앙미술대전은 동아미술제와 같은 해인 1978년에 창설되었고 ‘한국 미술에 새 시대를 연다’는 기치 아래 극사실 회화를 비롯한 다양한 실험적 미술을 발굴함으로서 미술계의 다원화에 기여했다. 기성작가 초대전과 신인작가 공모전을 병행한 운영방식을 채택하며 출범한 중앙미술대전의 역대 수상자 명단을 보면 78년 제1회 공모전에서 지석철의 <반작용>과 이호철의 <차창>, 이석주의 <벽>, 조상현 등이 각각 특선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석주는 78년 특선 이후 에도 79년 특선, 80년 장려상을 수상함으로서 이 공모전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한편 79년의 제2회 공모전에서는 김창영의 모래밭 연작 <무한>이 장려상을 수상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민전의 입상작들은 한국 형상회화의 새로운 경향성을 띤 회화의 움직임이 1970년대 초중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극사실 회화가 1980년대에 이르러 한국미술계를 다변화 시킬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잡게 된 배경에는 신문사가 추최한 민전으로서 공모전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2. 국전
대한민국 아카데미즘 미술의 산실이자 유일한 화가 등용문으로 위세를 떨치던 국전은 1981년 전격 폐지되면서 미술계의 지평을 변화시켰다. 미술계에 만연했던 파벌주의, 심사비리, 권위주의 등의 구조를 와해시키고 예술의 본연인 창의성과 실험성이 존중되는 시대로 진입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한국미술사를 돌아볼 때 국전이 미술계에 부정적인 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운영개선 요구에 비판적 목소리를 수용하려는 시도가 국전 내부에서도 꾸준히 제기되었고 실재 몇 차례의 시도도 이루어 졌다. 또한 제도적 한계 속에서도 새로운 형상미술을 실험하는 신예작가의 발굴과 부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국전을 통해 세계무대 진입의 기회도 확보한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평론가 이구열이 분석한 것처럼 ‘서양화 응모작들의 경우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아카데미즘 계열의 진부했던 측면과 구미 현대회화의 영향을 받은 추상주의와 표현주의를 실험하던 현대주의 지향작가 사이의 예술적 대결이었다.’ 앞서 언급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환기가 1948년 제1회 국전 때부터 서양화부의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국전 내부의 갈등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1960년과 1961년에 발생한 학생의거와 군사혁명은 미술계에도 영향을 끼쳐 국전 운영에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과 방근택이 심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1961년 10회 국전에서는 서양화 응모작품 구분을 구상, 반추상, 추상 등 3과로 분류하는 등의 변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시도는 ‘보수파 국전 주도작가들의 반격’에 의해 이듬해에 무산되고 말았지만 1969년에 이르러 서양화부는 구상부와 비구상부로 재차 분리되었으며 비구상 분야의 초대작가와 심사위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급기야 첫해의 응모작 대통령상에 박길웅의 순수추상 작품 <흔적 백 F-78>이 차지하게 되면서 추상미술의 바람이 세게 일었고 1970년대를 지나면서 국전에서 추상미술은 대세가 되었다.

한편 1970년대에 들어서 국전의 구상부에서도 당시 국제적으로 새롭게 전개되던 극사실주의와 비교될 수 있는 형상적 작품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 국전 수상작가들의 작품을 일괄해 보면 1970년 김형근이 <과녁>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손수광이 1972년과 1974년에 특선을 받은 것에 이어 1975년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했고, 배동환이 1972년 특선, 1974년 문공부장관상, 1975년 특선을 연거푸 받으면서 당시 고등학교와 대학에 재학 중이던 차세대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구상회화의 눈을 뜨게 했다. 가령 손수광이 1970년에 제작한 인물화 <실내>는 분명 이전의 관학적 화풍의 인물과는 다른 감각으로 그려진 것이다. 인물을 화면 하단으로 과감히 끌어내리고 화면 상단에는 창문을 배치해 구름이 떠 있는 창공을 표현했는데, 작가가 인물을 통해 드러내려는 세계는 ‘모던’한 영역이었으며 그는 회빛의 창백한 색채와 단색 평면으로 구성된 공간, 그리고 세밀한 묘사의 방식으로 동시대의 감각을 표상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뒤에 살펴볼 배동환이 그린 <보도>나 <성지> 시리즈 경우에도 소재와 기법 면에서 기존의 국전풍과는 다른 경향을 실험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박동인, 구자승 등이 그린 ‘철길’과 ‘정물 연작’은 향후 한국 극사실 회화의 주역이 될 청년작가들에게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이상에서 보듯 한국 극사실 회화의 기원은 아카데미즘 회화의 산실로 여겨오던 국전 내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당시의 많은 화가들이 등단의 관문이었던 국전을 통해 새로운 형상성을 띤 작품들을 선보였으며, 국전에서도 이들 작가들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제한적이나마 진행되고 있었다. 향후 한국 극사실 회화의 주역이 될 고영훈의 경우 1973년 국전에 세 명의 나부를 그린 작품을 출품해 낙선의 고비를 마셨는다. 지금을 작품이 소실되었지만 작가의 기억에 따르면 입상과 좌상 포즈를 취한 세 명의 인물을 그린 것이었고 배경 전체를 꽃무늬 벽지로 콜라주 한 것이 낙선의 원인이었다. 이와는 달리 조상현과 이석주는 같은 해인 1973년도 제22회 국전에 입선했으며, 김강용도 국전을 통해 미술계에 데뷔했다는 사실은 국전 내부에서도 반아카데믹한 경향의 사실주의를 받아드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1979년 국전에 특선을 받은 김강용의 극사실적 회화 작품은 전통적 아카데미즘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당대의 시대감각을 표상한 예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극사실적 경향의 작품들은 1979년까지 국전의 서양화 분야에서 ‘비구상 부문’으로 취급하는 등 그 위상 자체에 혼선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국 극사실 회화의 탄생배경은 앞서 언급한 신문사의 공모전 외에도 국전과 그 주변적 화단 환경도 빼 놓은 수 없을 것이다.

3. 모더니즘
한국 극사실 회화의 탄생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세 번째 요인은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이다. 1970년대의 한국 화단은 일명 모더니즘의 미명하에 서구의 실험적 미술경향들이 대량으로 직수입되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프랑스로 진출한 작가들을 통해 파리화단의 다양한 미술경향들이 국내화단에 직수입되었고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행위, 개념, 물성 등의 키워드로 대변되는 단색평면주의 추상회화가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서정적 추상에서 단색평면주의 추상에 이르는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은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이 색면 추상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거쳐 미니멀리즘으로 귀속되는 서구 모더니즘의 말기적 문맥과 다르지 않다. 모더니즘 미술의 비평 원리로서 형식, 환원, 본질, 전위 등의 개념이 미니멀리즘의 존재를 정당화 시켰다면 단색평면주의 미술은 미니멀리즘의 한국적 변용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한국의 극사실 회화는 1970년대 중반 당대미술의 주류를 형성하던 단색평면주의 추상회화에 대한 반작용과, 새로운 형상성에 대한 관심이 내부로부터 일면서 젊은 작가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화단은 이 시기의 극사실 회화를 모더니즘 계열의 경향으로 분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령 극사실 회화의 주역들은 <에콜 드 서울>이나 <서울현대미술제> 같은 그룹의 작가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전시활동을 같이 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실재로 그들의 작품에도 모더니즘의 단색평면주의 추상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에 있어 관심은 화면의 조형적 측면보다 올오버(all over)의 이미지로 구현된 화면 자체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그것이다. 가령 고영훈의 돌책이나 김강용의 벽돌 그리고 김창열의 물방울, 김창영의 모래밭, 서정찬의 갈아엎은 땅, 이석주의 벽, 조상현의 패널, 박동인의 잡초, 배동환의 자갈 등에서 화면을 평면구조로 균일하게 펼쳐 보인 모더니스트들의 단색평면주의적 시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러한 점은 한국의 극사실 회화가 모더니즘 계열의 추상화에 대한 반작용에서 태동되었다고 하나 화단활동에 있어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과 함께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얻은 조형 어법이라 할 수 있으며 사진적 프로세스에 의존해 삼차원적 공간을 표상했던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 작가들과 차별화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보듯 한국 극사실 회화는 결국 ‘민전’과 ‘국전’ 그리고 ‘모더니즘 계열’과 연계를 지니며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는 전기한 세 집단이 한국 극사실 회화 혹은 신형상 회화 탄생과 전개양상의 특수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배경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IV. 한국 극사실 회화 작가들과 비평원리

한국 극사실 회화에 대해 언급할 때 발생배경과 더불어 연구가 필요한 부분은 그것의 범주와 차별적 형식논리를 개발하는 일이다. 이 질문은 어느 누구의 작품을 대상으로 할 것이며 그 차별적 형식의 근거는 무엇인가를 따지는 일과 다르지 않다.

2009년 성남아트센터에서는 <또하나의 일상: 극사실회화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제명으로 한국 극사실 회화의 역사를 점검하는 대규모 전시가 개최되었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와 공동으로 기획한 이 전시회는 지난 2001년 삼성미술관이 기획한 <사실과 환영: 극사실 회화의 세계> 이후 국내 극사실 회화의 형성과 전개를 보여주는 중요한 행사로서 다양한 작품과 더불어 극사실 회화에 대한 글들이 소개되었다. 삼성미술관 전시가 한국의 극사실주의 회화를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과 비교하면서 이 경향을 대표하는 주요작가들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면, 성남아트센터의 전시는 한국 극사실 회화의 기원에서 오늘에 이르는 다양한 작가군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귀한 계기가 되었다.

<또 하나의 일상: 극사실회화의 어제와 오늘>전은 두개의 파트로 구분되었는데 1부는 한국 극사실 회화의 기원을 알려주는 1세대 작가들로서 1970년대의 극사실 회화를 주도했던 16명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 고영훈, 김강용, 김창영, 박동인, 배동환, 변종곤, 서정찬, 신재남, 이석주, 이재권, 이호철, 정규석, 조상현, 주태석, 지석철, 한만영. 한편 2부는 한국 극사실 회화 2세대라 부를 수 있는 작가들로서 2000년대의 극사실 회화 영역에서 활동하는 29명의 작품이 소개되었으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 김강훈, 구자승, 김대연, 김명숙, 김성진, 김세중, 김은옥, 김혜옥, 문창배, 박성민, 박지혜, 박창범, 설경철, 오흥배, 유용상, 윤병락, 윤병운, 이은, 이목을, 이임호, 이정웅, 이지송, 정영한, 최경문, 최정혁, 한영욱, 한운성, 허유진, 황순일.

물론 성남아트센터의 전시에 소개된 작가들이 한국 극사실 회화의 대표작가 전부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삼성미술관 전시에 출품했던 김종학, 김창열, 김홍주, 송윤희, 차대덕 등은 성남아트센터의 전시에 여러 가지 이유로 빠져있다. 출품작가들의 개개 작품을 보면 기법적으로 극사실적 묘사의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형상성의 탐구라는 보다 큰 구상회화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도 다수 출품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성남아트센터의 전시는 극사실 회화와 신형상 회화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준 전시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앞서 논의된 극사실 회화의 1세대 작가들을 보면 그 몇몇은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의 기법이나 소재 그리고 형식논리를 잣대로 삼아 작품을 제작했던 것이 사실이다. 1973년과 1974년 사이에 고영훈이 그린 드럼통, 군화, 배낭과 코카콜라병, 코트 등이 여기에 포함되며, 이와 함께 이석주가 이 시기에 시도했던 새로운 형상작업도 미국에서 수입된 하이퍼 리얼리즘의 영향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의 극사실 회화가 미국의 팝아트나 하이퍼 리얼리즘과의 관계성 속에서 그 탄생 배경을 찾으려는 비평가들에게 근거를 제공한다. 특히 소비산업사회와 일상적 현실에서 얻은 소재들을 선택하고 사진적 프로세스를 이용해 객관적 묘사에 충실함으로서 차가운 객관성을 드러내는 작가들이 이 계열의 중심 화가들로 취급되는 것처럼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 하이퍼리얼리즘 작가들이 채택한 소재와 기법 그리고 형식논리를 적용시킬 때 197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될 한국의 극사실 회화의 성과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소재나 내용면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소재적인 측면에서 국내 극사실 화가들이 선택한 사물은 공업 생산물이 아니라 자연물인 경우가 많다. 가령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영훈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은 돌이나 김강용의 벽돌, 김창영의 모래밭, 서정찬의 갈아엎은 땅, 이석주의 벽, 박동인의 잡초, 배동환의 자갈 등은 모두가 자연 오브제이며 미국 하이퍼리얼리스트들이 즐겨 다루었던 자동차, 오토바이 등의 기술적 생산물이나 슈퍼마켓, 빌딩 등의 건축물과는 다르다. 초기에 몇몇은 팝아트의 영향으로 대량 생산물에 관심을 가진 것이 사실이지만 학습시기의 학생 신분이거나 대학을 갓 졸업한 시기에 제작된 것이었고,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선택한 소재는 작가가 경험한 삶과 그 주변에서 얻은 것들이다.

한편 사진적 프로세스를 통한 기계적 차거움을 골자로 삼은 하이퍼리얼리즘의 비평원리를 한국의 극사실 화가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에도 무리가 따른다. 한국 극사실 회화에 흐르는 서정성은 “인간적인 체감이 배어 있는 것” 혹은 “자연과 인간의 체감이 흠뻑 배인 것들” 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김복영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극사실 회화는 “해석적인 면을 심층적으로 설정 하면서 특히 표면형상 만은 차가운 물상으로 부각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일견 모순된 두 얼굴이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은 수입된 서구 미술에 반응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당시의 화가들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자 한국 현대미술사의 전반에 나타나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모순된 구조성 그 자체가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현상적인 사실에 근거해 개인의 감정과 비판의식을 괄호에 넣은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이 한국의 청년작가들에게 그대로 수용되기에 한국의 현실은 미국과 너무 차이가 있었다. 국토건설과 산업화 그리고 남북대립과 군사독재의 시대상황에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현실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발언이었고 이러한 욕구를 실현한 구상적 경향의 하나로서 극사실 회화는 작가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화면형식과 논리가 필요했다. 자연적 소재를 손의 회화라는 기법으로 실현한 작품들은 저마다 뚜렷한 ‘인간적 체감’이 배어있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그들의 작품에는 인간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인간의 흔적이 진하게 나타나고 있다. 가령 박동인의 화면에는 인간의 모습이 부재하지만 인간의 흔적은 기억처럼 숨겨져 있다. ‘황량한 가을의 들녘에 고무풍선, 낫자욱이 선명한 벼포기’ 등은 사회적 환경과 자연에 대한 개인적 관찰과 그에 대한 세계인식이 맞물려 있다. 1970년대 초반, 철로와 신호기가 있는 자연풍경으로 화단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이후 1980년대에 중반에 이르는 그의 작업은 ‘조형공간 안에서 미디엄 효과를 주로 하여 자연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극사실 회화가 지닌 또 하나의 특성은 ‘상징적 어법의 사용’이라 할 수 있다. 화면에는 암시와 은유의 메시지를 지닌 시각적 장치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들은 무대에 올려진 배우처럼 연극적 상황을 연출해 내기도 한다. 가령 앞서 언급한 화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신문, 깡통, 담배꽁초, 철도, 신호등, 철조망, 맨홀 등은 이들의 화면에서 독특한 상징적 의미를 생산해 내는 중요한 기호들이다. 이른바 유신체계로 대변되는 냉랭한 1970년대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발언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오브제들이라 할 수 있다. 가령 배동환의 1972년작 <보도>는 육교, 표지판, 맨홀, 차단대, 공사차량 등이 배치된 황량한 보도블럭을 그린 것이다. 화면 하단에 뒹구는 구겨진 신문지나 캔 깡통은 도시인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방식으로서 후에 한국 극사실 회화의 어법중 하나로 정착된다. 한편 그의 작가적 입지를 확고하게 해 준 <성지> 시리즈는 ‘시대상황에 대한 유토피아적 상징’으로 해석된다. 동아미술제에서 대상을 받은 변종곤의 1978년작 <1978.1.28>은 군용 활주로를 중심으로 방독면, 타자기, 표지판, 군용 배낭, 신호등 등이 흩어져 있는 그림이다. 철조망과 ‘KEEP OUT’라 적힌 표지판에 의해 폐쇄된 영역으로서 활주로는 이미 균열이 가 있으며 절단된 전선들이 나뒹구는 풍경은 전쟁과 해방 그리고 미군정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단면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특정 시간대를 지시하는 날짜를 제목으로 채택함으로서 동시대적 현실을 자전적 일기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V. 결론 : 한국 극사실 회화 연구를 위한 과제

한국 극사실 회화는 이제 단순한 하이퍼리얼리즘의 형식논리를 따르는 차원에서 벗어나 독자적 양식으로서 체계를 갖추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한국미술사의 적자로서 극사실 회화를 둘러싼 작가들과 그 작품의 경향성을 하나의 학문적 틀로 체계화 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극사실 회화가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과 차별화 되는 양식적, 내용적 근거들은 이미 국내 학자들 사이에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또한 한국의 극사실 회화가 발생하게 된 시대와 사회적 정황도 구미지역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부인할 이는 없을 것이다. 21세기 한국 현대미술의 현상 중에 대표적 경향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는 극사실 회화의 경향에 대한 미술사적 자리매김이 이제 더 이상 미룰 사안이 아니다.

한국 극사실 회화는 그 발생 기원에서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과 연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용어의 기원이 그렇고 주제의식이나 형식논리 또한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의 그것과 다르지 않게 다루어져 왔다는 점이 이를 대변한다. 그러나 한국의 극사실 회화는 국제화되어가는 한국 화단의 현실과 그에 대응하여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일련의 작가들에 의해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과는 다른 독자적인 형식논리를 개척하는 방향으로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극사실 회화는 용어사용에 있어 독자적인 이름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했다. 그 결과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 스스로 자리를 매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동시대 구미지역에서 발생한 새로운 형상주의 미술이 자유구상(프랑스), 신표현주의(독일), 배드페인팅(미국), 트랜스 아방가르드(이태리) 등의 이름으로 성과를 거둔 것과 비교할 때 아쉬운 대목이다. 한국 극사실 회화에 대해 적용되는 ‘하이퍼리얼리즘의 한국적 변용’이라는 어설픈 용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가 한국 미술사가들에게 주어진 당면 과제라 할 것이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시대에서 한국의 극사실 회화를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에 종속시킨다 해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한국의 극사실 회화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의 그것과는 소재나 표현방식 그리고 형식논리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따라서 하이퍼리얼리즘과는 다른 존재이유와 독립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극사실 회화의 발생 배경과 그 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의 이 신형상 미술에 투신해야만 했던 그 창작의 당위성을 심도 있게 조사해야 한다. 한국의 극사실 회화는 미국의 팝과 하이퍼리얼리즘의 수용과 대응 속에서 집단화되었지만 그 뿌리는 아카데미즘의 산실로서 국전 내부의 실험적 경향을 비롯해 1970년대 후반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하며 대두된 민전의 지평과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반에 이르는 모더니즘 계열의 실험적 경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경향이 한국현대미술사에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그 성과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일에 못지않게 타당한 이름을 붙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 살펴본 ‘극사실 회화’를 ‘신형상 회화’로 바꾸어 부르자는 김복영 선생의 주장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이를 위해 정리해야할 주변적 내용들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출처: <현대미술학 논문집>, 현대미술학회, 20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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