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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 이방인의 방

김영호

이방인의 방


김진은 학창시절부터 줄곧 실내공간에 대한 관심을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기둥과 창문이 화면을 종횡으로 가로지르고 책장과 원형 의자들이 공간을 분할하는, 건축적인 구조가 돋보이는 그런 그림이었다. 재료도 목탄 선묘에서 사각으로 오린 한지를 겹쳐 붙이는 콜라주기법에 이르기까지 선과 면의 단위로 짜여진 공간표현의 수월성에 맞추어져 있었다. 내가 학창시절의 그를 선명하게 떠올리는 이유는 그의 황소 같은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 하나가 그를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림과 자신 사이를 잇는 관계성의 부재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형식주의자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며 화면의 구조와 수법 및 형태를 둘러싼 미적원리에 집착해 자신을 찾는데 소홀해 있었다. 주체의 상실에 따른 위기감을 떨쳐내기 위해 그는 화면을 크게 키우고 다작을 시도했으나 그럴수록 캔버스는 점차 지난 세기초의 큐비스트를 닮은 회갈색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영국 유학은 그의 작업에 미학적 실마리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 일관되게 추구해 오던 공간연구의 성과에 덧붙여, 캔버스를 주체가 지배하는 삶의 장소로 받아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예술은 작가의 삶으로부터 온 것이고 작품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응하며 일군 생각의 표상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창조의 원리를 스스로 체득하게 되었다. 예술은 작가의 자아를 나타낸 그림일기와 같은 것이며 역으로 작품을 통해 작가가 살았던 시대의 상을 추적해 낼 수 있기에 인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김진은 겸제에서 청전에 이르는 국내작가들과 윌리엄 터너에서 데미안 허스트에 이르는 영국작가들의 선례를 통해 주체의 다양한 표현이 시대상과 접목되면서 정신(이데올로기)으로 확대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김진의 변화는 우선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상에서 발견된다.

실내공간 혹은 야외풍경의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인물의 형상은 풍경의 이미지에 반쯤 흡수되어 유령처럼 화면을 부유하듯 그려져 있다. 작가는 자신이 일구어 놓은 낯선 풍경의 공간에 자신의 존재를 개입시킴으로서 작품에 ‘관계’의 미학을 대입시키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캔버스는 구조와 수법과 형태로 짜여진 형식주의의 차원을 넘어 나의 공간이자 삶의 장소로서 읽혀지길 강하게 희망하고 있다. 때로 그 인물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기도 하는데 이는 딸의 출산으로 새롭게 구성된 가족이라는 집단의 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김진은 자신과 가족이 몸담고 있는 공간의 장소성을 대면하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자신을 드러내길 바란다. 화면 속 인물의 시선은 관객을 향하게 함으로서 자신이 체험한 세계의 감흥을 함께 나누기를 청해온다. 그의 인물은 이렇듯 자아의 표상이자 그림에 의미생산의 주체이며 관객과 소통을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

영국 유학후 김진의 작품에 일어나는 변화는 화려한 색채와 유동적 터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목탄과 잉크를 이용했던 흑백의 화면에서 벗어나 그의 그림은 강한 원색으로 수놓은 도발적인 장소가 되었고 이성적 공간에서 감각적 공간으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형태를 묘사하는 불규칙한 단선 터치는 화면에 구획된 기하학적 구조의 공간을 해체해 표현적으로 변주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단선 터치는 김진의 작품에 그만의 개성을 나타내는 요인이 되어 원근감이 표현된 건축적 공간을 아지랑이처럼 분해하는 다중효과를 발생시킨다. 구축적인 형태와 자유분방한 터치가 한데 어우러진 작업은 그래서 관객들에게 색다른 시각체험을 선사한다. 이제 우리는 김진의 인물과 색채 그리고 단선이 중심이 된 다중적 공간 표현작업에서 작가가 궁극적으로 표방하는 정신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영국 유학 후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실현코자 하는 미학적 키워드는 ‘자아’이며 그 자아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반응하며 작품으로 표상되는 주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자아의 표상을 통한 주체의 회복은 유학을 통해 얻게 된 하나의 소득이었다. 우리가 여행 중에 체험하게 되는 낯섬의 느낌은 장소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인식하는데서 비롯되는데 그의 영국에서의 이질적 환경은 바로 낯섬의 체험을 몸소 겪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체험을 자신이 그간 연구해 왔던 공간과 장소의 표상작업에 접목해 독자적인 언어를 개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자기발견은 주어진 것에 대한 낯섬의 체험과 그 체험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자리잡은 대응의지의 원인이라는 점을 전해준다.

낯섬과 낯익음 사이에 비논리적 갈등의 체험은 과잉 정보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자아를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에 겪게 된다. 카뮈가 이방인에서 그린 것처럼 이 체험의 순간은 인간과 세계간의 관계가 불합리한 관계로 전개되고 있음을 재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세계관은 김진의 최근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원리가 될 것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서술될 수 있다. 여기 낯선 듯하면서도 낯익은 서양식 서재 풍경이 있다. 세계지도가 걸린 벽과 인물조상이 줄지어 얹혀진 책장은 가구로서 실내의 중심을 이루고 그 앞에 펼쳐진 붉은 양탄자 위로 영국 스타일의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있다. 작가가 그려낸 일상적 실내풍경에는 은밀한 비밀이 있다. 유령처럼 부유하는 자화상이 그것이다. 여행 중 소문난 유적지를 뒤로하고 포즈를 취하듯 그림속의 작가는 이 낯설고도 낯익은 풍경을 배경으로 관객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다.

김진이 그린 이 서재 풍경은 사실이 아닌 해체된 풍경이며 심상풍경이다. 난무하는 단선의 터치들과 강한 색채대비는 실내의 사물들을 진동시키며 시각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조각도로 새긴 듯 강렬한 선들에 의해 서재의 공간은 촉각적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풍경이면서도 풍경이 아닌 김진의 그림은 매우 독자적인 세계로 보는 이들을 안내한다. 정신의 영역으로 변주한 서양식 서재 풍경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정한 명제 ‘N-either’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저것이면서 또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의 상황을 묘사하는 제명은 부조리한 현대적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결국 김진의 그림이 단순한 이국적 풍경의 이미지를 넘어 낯섬과 익숙함 사이를 살아가는 이방인의 서정을 날카롭게 표상하고 있기도 하다. |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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