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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자 / 일탈과 소통의 장소

김영호

일탈과 소통의 장소


작가가 작품을 통해 성취하려는 목표의 하나는 현실을 너머선 미지세계와의 만남일 것이다. 우리는 그 미지의 세계를 이상(이데아)이라 부르기도 하고 천국(파라다이스)으로 부르기도 한다. 근세 이후 등장한 낙원(유토피아)이나 동양의 불가에서 이르는 열반(니르바나) 역시 미지 세계를 뜻하는 다른 이름이다. 시대의 변천과 지역에 따라 다른 명칭에도 불구하고 미지세계에 이르기 위한 꿈은 비단 예술가뿐만 아니라 철학자에서 탐험가의 창조적 본능을 자극하면서 보편화되어 왔다. 그 꿈의 중심에는 진선미로 불리는 지고의 가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현실과 미지의 세계의 관계가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했다. 현실과 이상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의 유니티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가령 이상은 현실의 연장이며 이상은 곧 현실위에 기반한다는 생각이며 이러한 생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모든 추상적 가치와 이념들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예술에 있어서도 진선미를 축으로 설정되어온 가치가 위악추의 개념과 관계속에서 그 의미가 완성되고, 나아가 죽음과 삶, 고통과 기쁨 역시 두개의 이질적 면을 지니지만 하나의 유니티 안에서 이해되었다.

개별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 작가들의 경우 이러한 이기일원론적 인식은 자신의 창조적 영감을 실현하는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주장 처럼 ‘백일몽을 꾸는 자’로서 예술가들은 현실에 기반한 삶을 살아가며 끓임없이 미지와의 소통을 원한다. 때로 소통의 노력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자 작가로서 삶의 경계를 확장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작가가 소통을 원하는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이 교차해 만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삼아 그 범주를 외부로 넓혀 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과 위, 선과 악, 미와 추의 끊임없는 충돌을 목격하고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조건들과의 관계를 작품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다.

양희자가 선택한 미지세계는 자연이다. 그림의 소재로서 화면에 등장하는 자연 이미지는 야자수나 선인장과 같은 식물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자연 이미지는 화가들이 태고적부터 다루어온 소재지만 작가가 이 범상한 소재를 통해 꿈꾸는 세계는 차별화된 영역을 지향하고 있으며, 보는 이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생태, 생명, 환경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깊어가는 작금의 상황에서 자연 이미지는 단순한 풍경으로서 의미를 넘어 새로운 해석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

우선 작가가 선택한 식물 이미지는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매개이자 그 기억을 현실의 삶으로 연계시키려는 일종의 기호로 채택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작업실 주변에 펼쳐진 토종 수목과 더불어 살면서도 굳이 야자수나 선인장 같은 이국적 식물을 표상하는 것은 현실적 삶의 터전을 과거 기억속의 외부공간으로 확장시켜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기원이 오래된 열대 식물이자 사막 지대에서 서식하는 야자수나 선인장에서 느꼈던 강인한 생명력은 강렬한 태양빛과 더불어 화면에 다양한 에너지를 표출하기 위한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작가의 식물 이미지는 화면에 표상되면서 이른바 자기동일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야자수나 선인장은 이제 개인사의 자전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기호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작렬하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자라는 열대식물의 줄기와 세포는 어느덧 치열한 생명현상을 지켜나가는 신체이자 존재물로 자리한다. 한편 그의 작업실은 적막하고 고난한 일상 너머에 꿈틀거리는 생명에 대한 경의의 시간을 체험하는 실험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치열하면서도 고독한 투쟁의 시간이자 삶의 심연에 자리 잡은 실존적 두려움과 욕망의 돌기를 환희와 열정으로 변환하는 생산의 시간이기도 하다.

양희자는 이러한 미적 체험을 위해 최근 몇 개의 형식적 변화를 취하고 있다. 색채는 이전의 회갈색 토운에서 파스텔 토운의 순색으로 바뀌었으며, 표현주의자들의 자유분방한 터치와 무작위적 선묘 그리고 극적인 색채의 대비효과를 한층 강화시키고 있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표현양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섬세한 감각의 융기를 엿볼 수 있는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물감과 용매사이의 관계에 대한 오랜 실험의 결과로서 수성물감의 초벌칠과 덧칠 과정에서 발생되는 미묘한 상호 침투와 혼합효과라 할 것이다. 그 결과 화면은 소재와 기법 사이의 친화적 관계가 맴도는 장이 되고 있다.

최근 인사아트센터에서 가진 개인전에서 양희자는 의욕적인 크기의 캔버스와 더불어 그간 실험해 온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 전시를 계기로 작가는 이라는 화두를 제시했는데 그중 문이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띤다. 이는 작가의 관점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키워드라는 점에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문은 하나의 특정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연결하는 통로를 상징한다. 그것은 소통의 접점이자 관계의 창이다. 작가의 자연이미지와 연관해서 문은 현실공간과 기억공간을 나누는 경계이자 현실적 삶을 유토피아로 이어주는 통로가 된다.

양희자가 일상의 대지에서 바라보는 미지의 세계는 생명과 기운이 꿈틀대는 영역이다. 나아가 화면에 표상된 그 세계는 더 이상 양분된 구조로 나뉘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두개의 다른 단위가 하나의 유니티를 이루어 공존하는 세계일 것이다. 현실과 이상 두 세계를 연결하는 문으로서 작가의 캔버스에는 실재 작은 문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관객이 그의 작품에서 작가가 생산해 내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성취하려는 미지세계로의 여정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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