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 호남이 배출한 이이남은 최근 뉴미디어 아트의 영역에서 한국미술을 선도하는 작가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동영상 모니터 작업은 최근 구미지역의 주요 미술관과 미술시장 그리고 미술제에서 각광을 받고 있으며, 국내외 전자산업체들의 관심을 이끌어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 따위의 쇼셜네트워크서비스(SNS) 미디어를 통해 보급되면서 대중적으로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작품의 형식적 측면뿐만 아니라 전시학의 측면에서 전례없이 풍요로운 담론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소통의 공간에 관련된 것으로, 작품이 전시되는 장소가 기존의 ‘화이트 큐브’에서 ‘무명(無名)의 손끝’으로 확대시킴으로서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전시문화 패러다임을 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이남 작품의 특성은 디지털 복제시대의 변화하는 대중문화 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첨단기술 환경과 전래적 미술문화의 관계를 파고들어 그 성과를 상호 융합시키는데서 발견된다. 이른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가치가 그의 뉴미디어 작업 저변을 뒷받침해 주는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작가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재치와 여유는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호남지역으로부터 얻어진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라 생각한다. 소치 허련에서 의제 허백련으로 이어지는 조선 남종화의 맥이 숨쉬는 남도의 토양에서 숙성된 그의 예술적 소양이 그의 작품에 여유로운 흥취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이남의 작업에서 판소리와 먹향이 어우러진 한국미술의 화격(畵格)과 감흥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이남의 뉴미디어 작업은 ‘동서양의 명화와 디지털 첨단기술의 결합’으로 요약된다. 인상주의에서 상징주의 그리고 전통 문인화와 진경산수에 이르는 동서고금의 명화 이미지를 컴퓨터 모니터상에 복제하고 포토샵으로 3D 파일 이미지로 전환한 뒤, 동영상 편집기인 ‘애프터 임팩트’로 그 파일을 열고 이미지들의 부분을 선택적으로 조작 변형시키며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캔버스는 모니터로 대체되고 붓대신 마우스를 선택한 디지털미디어 작품의 경향은 이미 국내 대학의 실기실이나 연구소에서 보편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이남의 경우 디지털 첨단기술에 의한 명작 이미지의 복제와 변형이라는 차원을 넘어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력에 의해 대중적 인기를 높여가고 있다. 미디어 아트의 가치란 첨단기술의 습득과 적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행간 너머에 숨겨진 창의적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작가의 능력에 달려 있다. 이이남의 예술이 단순한 매체적 특성을 넘어 새로운 미적체험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의 작품에 담겨진 메시지가 어떤 가치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이이남의 미디어 작업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묶음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미디어 아트의 일반적 특성에 따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이남의 개성적 창의에 따른 요인이다.

우선 이이남의 작업에 나타나는 일반적 특성은 복제와 차용 그리고 패러디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끌어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호남지역의 대가들 외에도 겸재, 추사, 안견, 신사임당에 이르는 조선시대 명인들의 대표작들을 차용한다. 또한 다빈치, 벨라스케스, 베르메르, 앵그르, 모네, 세잔, 클림트, 마그리트 등에서 워홀, 리히텐슈타인에 이르는 구미지역 대가들이 명작을 통해 파생한 예술적 성과에 의존하고 있다. 기존의 예술적 성과를 이용한 기생의 장치는 의외로 큰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이남은 동서고금의 명작들 원본이 뿜어내는 아우라를 모니터 안으로 복제하고 차용한 후 그것을 비틀거나 파괴함으로서 새로운 컨텍스트 속으로 진입시키는 것이다. 그의 비틀거나 파괴하기 작업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쾌하고 가벼운 유희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복제와 차용 그리고 패러디의 형식은 마르셀 뒤샹이 모나리자 이미지에 수염을 덧그림으로서 가했던 유쾌한 파괴의 행동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이이남은 명작들을 차용하고 거기에서 영양분을 취하며 그를 메트릭스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번식시킨다. 이러한 전략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세기 초 다다와 초현실주의에서 시작되어 팝아트에 전성기를 이루었던 어법으로 현대미술에서 친숙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이이남의 경우 복제와 차용 그리고 패러디의 형식은 또 하나의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평론가 윤진섭은 이이남에 의해 형성되는 컴퓨터 미디어시대의 복제 패러다임을 ‘쇼셜네트워킹 패러다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편 이이남의 작업에 나타나는 개성적 성과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앞서 언급한 온고지신의 조형적 구현이다. ‘옛것을 연구해서 새 지식이나 견해를 찾아낸다’는 의미의 고사성어로서 온고지신은 이이남의 경우 전통회화를 미디어 이미지로 차용하고 그것을 다시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재생산한다는 내용에 기반을 둔다. 이 과정에서 이차원적 평면은 삼차원적 공간으로 변주되며, 하나의 시점에 의해 고정된 풍경은 해체되고 화초(花草)와 조충(鳥蟲) 그리고 인물 이미지는 다원적인 시점으로 열리게 된다. 화면에 박제화되었던 순간의 이미지는 이제 시간속에 움직이는 4차원의 세계를 향해 해방되어 있다. 평면에서 입체로, 부동에서 유동으로의 전환은 이이남의 미디어 회화의 기술적 성과인데 여기서 발생시키는 가치는 명작에 대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데 있다. 재해석은 명작을 제작했던 대가들이 주제를 대하며 느꼈던 문기(文氣)나 감흥을 재현하는 차원으로 전개되거나 아니면 명작에 대해 관객이 요구하는 상상의 세계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구현되고 있다. 이 순간이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 과정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디지털 미디어와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명작속의 이미지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움직임은 화면에 복제된 명작 이미지를 현재적 상황으로 변환시킨다. 묵죽도에 바람이 일어 대나무가 흔들리고 그 위에 눈이 내려 쌓이면 그 무게를 지탱하던 이파리가 몸을 떨며 눈을 털어낸다. 박제화되었던 사물은 다시 생명력을 되찾아 자연에서 숨을 쉬기 시작한다. 여덟 개의 모니터를 연계해 화면이 8폭 병풍이 되면 상황은 보다 복합적 속성을 띠게 된다. 그림 속의 영모(翎毛)가 꼬리를 살랑이고 조충들이 화면의 경계를 넘어 이동하며 화초에서 쏟아내는 잎사귀들이 꽃비가 되어 휘날린다. 뒤이어 문자가 꽃비의 뒤를 이어 화면에 흩어 퍼진다. 모니터 경계들을 관통해 사선으로 횡단하는 텃새들의 비행은 가히 탄성을 자아낸다. 모니터를 수직으로 연결한 작품에서는 폭포수가 등장하고 화면을 흐르는 시간은 밤과 낯을 지나 사계절의 순환을 알린다. 동영상 모니터 속에 구현된 시뮬라시옹의 세계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벗겨버리고 관객의 의식을 환상으로 이끌고 있다. 이이남의 작품에 나타나는 또 다른 개성적 가치는 가벼움과 재치의 유희라 할 수 있다. 반 고흐 자화상속의 인물이 눈을 깜박이고 파이프를 빨아 연기를 뿜어낸다. 개미들이 미술관을 공격해 벽면에 전시된 명작을 해체하고 미술관 밖으로 빼돌려 재조립할 때면 미술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명작의 훼손과 도난 그리고 소비에 대한 대중의 금기를 유쾌하게 대행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재 상황이 아니라 조작된 허상의 유희임을 알기 때문에 가벼움의 재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이남의 작품은 현실과 가상 그리고 원본과 복제 사이의 벽을 허물면서 자신의 패러다임을 구축해 나간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상상의 유희는 시간 뿐만 아니라 장소의 융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간과 장소의 융합은 동양과 서양, 유화와 묵화의 대비, 그리고 풍경화와 산수화의 대비 따위의 작업을 통해 시도된다. 모네의 ‘해돋이-인상’에 떠있는 배가 산수도로 잠입하여 올 때면 가벼움의 유희에 시원한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이이남의 뉴미디어 작업는 스스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전기에너지의 도움없이 실현될 수 없는 순간의 이미지이자 전원이 끊기면 사라져 버리는 허상의 이미지다. 또한 화면을 분주하게 떠도는 미물(微物)들의 움직임도 반복된 것이자, 거기에서 결과된 생명성도 입력된 프로그램의 굴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영상비평가 이윤영 교수의 표현 따르면 ‘빛의 입자 위에 떠있는 이미지들’ 일 뿐이다. 이러한 한계는 이이남의 탓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디지털 복제시대의 미술이 지닌 특성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복제시대에서 대중들의 시각은 대단히 기능적인 양상을 띤다. 실재와 가상의 체험과 그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이르는 일체의 것들에 대해 전에 없는 가치를 매기고 있다. 전자 미디어의 존재를 도덕이나 윤리적 관념 안에서 가치평가하려 하지 않고 그것이 파생하는 혹은 그것에 의존하는 메시지나 맥락에 의해 평가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파괴와 부정 그리고 모순과 한계 그 자체가 예술의 영역에서 특별한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 오늘의 현실, 이이남의 작업은 그 현실을 직시할 새로운 담론을 요구하고 있다.
(K-Artist Global Project, / 사이버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