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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 화산섬의 풍천월해(風天月海)를 그리다

김영호

화업 30년의 마디들

강요배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말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오랜 벗들이나 비평가들 조차도 그의 작품에 대해 단언 내리기를 주저해 온 것이 저간의 사정이다. 대학을 졸업해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1980년대의 회화작품에는 특히 해독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일면들이 서려 있었다. 성완경은 작가의 작품에 나타난 난해성의 진원을 ‘삶을 응시하는 깊은 시선과 종합주의적 사유, 신비스럽고 주술적인 요소들, 철학적인 명상과 해석을 담고 있는 문자나 기호들, 제주도의 토착정서에 근간을 두고 있는 고유한 상징이나 어법’ 등으로 진단하고 있다. 이 기간은 강요배가 미술교사로 재직했고 전업 삽화가의 길을 걷기도 했으며,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서 미술운동에 참여하던 때였다. 1980년대의 격변하는 사회 정황과 화단 세계가 그로 하여금 오랜 사색의 담금질을 요구했던 것일까.

강요배 스스로가 ‘방황’의 시기로 명명한 초기 10여년을 지나 화가로서 그의 노정에 뚜렸한 지표를 설정하게 된 때는 제주 4·3 항쟁을 소재로 채택한 1989년 이후의 기간이었다. 그는 3년 동안 50점의 그림을 제작해 1992년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는데 전시회의 제명은 ‘제주민중항쟁’이었다. 선조들의 땅에 몰아친 비운의 역사를 증언과 탐방으로 조사하고 시각 형식으로 구현해 내는 일은 지치고 힘든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역사인식에 뿌리내린 창조적 발언의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결정적 동인이 되었고 급기야 이를 계기로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제주에 귀향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제주의 자연과 그 자연을 살았던 선조들의 고난한 삶의 역사를 상징으로 융합한 독자적인 화풍을 심화시켜 나간다.

화산섬으로 귀향해 자연과 역사의 현장을 탐사하며 작업을 진행했던 1990년대 10여년의 기간 동안 강요배는 제주의 자연과 역사인식을 동일시하는 성향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캔버스에 거칠고 저항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인 자연 이미지로 구현되었다. 그러나 한라산 서쪽 평원에 자리한 귀덕리(歸德理)에 화사를 지어 정주하는 2000년을 기점으로 제주자연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그 조형적 번안의 형식은 이전과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난다. 그에 있어 이제 자연은 음양(陰陽)과 오행(金木水火土) 혹은 주역(周易)의 이론들과 연계된 우주론적 인식의 대상이 되었고 그 조형적 실현 과정에서 거친 자연의 폭력성은 생명현상을 촉진하는 신비의 에너지로 번안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제주돌문화공원에서 열리는 강요배 개인전은 작가가 귀덕리에 정주한 10년을 결산하는 전시다. 출품작들은 모두 24점으로 80호에서 1000호에 이르는 대형 신작들로서 작가의 창작의욕이 정점에 오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 50점의 드로잉을 추려 처음으로 선보인다. 돌이켜 정리해 보면 강요배의 화력은 10년을 단위로 변화되어 왔다. 대학졸업 후 서울생활 10여년(1979-1989), 제주탐사와 귀향 후 적응기 10여년(1989-2000), 그리고 귀덕에 안착한 후 10여년(2000-2011)의 마디가 그것이다. 강요배는 서울생활을 접고 제주로 귀향한 이후 화가로서 소명의식을 심화시켰으며 ‘거친 자연에 인고하는 사물을 통해 스스로 사는 방식을 터득해 왔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이제 섬의 자연을 소재로 삼아 우주로 통하는 삶의 노정을 발견해 내려 한다.

개인전에 소개되는 그의 작품들은 대작임에도 전에 없이 단순한 구성과 절약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주제는 작가의 뜰에서 스치는 초목(草木)이거나 그 하늘을 운행하는 월성(月星)들이며 바람과 빛에 의해 다양한 자태를 드러내는 산해(山海)의 주변풍경으로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화폭에 표상된 풍천월해의 자연은 어느덧 작가 특유의 신비스럽고 주술적이며 상징적인 어법들로 번안되어 새로운 차원의 감흥을 보는이들에게 선사한다. 작가로서 강요배의 삶과 예술적 노정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반면 작품의 형식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열악한 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강요배의 작품에 표상된 조형형식과 논리에 대해 출품작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그림자 없는 그림

강요배의 근작에는 그림자가 없다. 작가가 그려낸 팽나무나 눈밭위의 까마귀 그리고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에 이르는 대부분의 작품에는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자의 부재는 볼륨의 상실을 의미한다. 하나의 광원이 연출해 내는 음영 효과를 없앰으로서 대상의 입체감을 상실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형식은 동양의 수묵화 전통과 형식논리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결코 낯선 방식이 아니다. 결국 강요배의 그림은 실경(實景)으로서 자연을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사의(寫意)로 그것을 번안해 내려는 동양적 회화기법의 일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부언하자면 강요배의 그림은 동양적 조형형식에 서양철학의 인식론적 사유를 융합시키려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가령 <별-나무>는 팽나무 사이로 내비치는 별빛을 그린 그림이다. 천궁을 향해 잔가지를 펼치고 서있는 나무둥치는 마치 육신을 벗어버린 영혼처럼 화면속의 공간으로 빨려들어 동화되어 있다. 사물의 형태를 결정 지우는 윤곽선은 물론이고 입체감을 드러내는 명암효과마저 사라진 화면에서 사물은 미묘한 물성의 선들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강요배의 회화에 나타나는 개성은 바로 대상의 형체를 ‘선적인 면’ 혹은 ‘면적인 선’으로 통합해 내는 형식에 있다. 경계를 구획해 사물을 드러내는 방식은 구태의연하다고 믿는 작가의 생각이 작품을 선과 면이 통합된 공간으로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식실험의 결실로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빛은 있으나 그림자가 없는 그림으로 개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강요배의 그림자 없는 그림이 보는 이들에게 시각적 혼란이 없이 수용되는 이유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빛이 화면 자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서 빛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화면의 내부에 존재한다. 빛이 머무는 하늘로서 석양이나 여명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그 앞에 사물을 배치시킴으로서 화면에 평면적 일루전이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강요배는 세밀한 광선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은은한 조명의 시간대’인 일몰의 순간이나 밤 혹은 새벽에 자연을 관찰하고 그 감흥을 화면에 형상화한다고 말한다. 강요배의 작품들은 지혜의 부엉이가 비상하는 일몰에서 여명의 시간대에 감각의 날을 세워 실천한 사색과 조형의 결실이다.

인상주의의 수용과 극복

혹자는 강요배의 근작에서 인상주의를 빗대어 본다. 자연과 일상을 소재로 빛의 감흥을 그리는 작가이자 터치와 물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형식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강요배는 인상주의 작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인상주의자들을 통해 색의 풍요로움을 공부할 수 있었고 나아가 빛에 대한 연구는 그의 예술적 노정에 결정적인 초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상주의자들이 빛에 노출된 자연의 외관에 대한 시각적 인상에 충실하고 화려한 색채와 필치로 그 인상을 화면에 표상하는 조형형식을 취하고 있었다면, 강요배의 경우는 다른 차원의 형식논리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강요배의 근작들은 무엇보다 시각적 인상이 아닌 우주적 영감을 표상하려는데 심혈을 기울인 노력의 결실들이다. 자연현상의 저편에 숨겨진 우주적 물상(物象)을 구현하려는 그의 작품세계는 인상주의 작가들과 이념적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강요배가 그리는 빛은 강렬하게 쏟아지는 일광이 아니라 일몰에서 새벽으로 이어지는 시간대의 희미한 빛을 선호한다. 작가는 색의 풍요로움은 조리개를 줄임으로서 증대된다는 사실을 작품을 통해 증거해 보이고 있다.

은은한 빛의 시간대에 우주적 물상을 그린 그림의 예로 <노야(老野)>나 <서북하늘> 그리고 <거멀창>과 <적벽(赤壁>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노야>는 늦가을 오름의 벌판에 핀 물매화와 자주색 꽃향유 따위의 미물을 표현한 그림인데, 양탄자처럼 깔린 풀밭에 피는 들꽃의 감흥은 머리를 내려 깔고 관찰한 것 같은 빛의 미묘한 효과를 드러낸다. 한편 <서북하늘>은 겨울 저녁의 구름사이로 내비치는 하늘의 빛을 그린 것이며, <거멀창>은 ‘검은오름’의 수직동굴을 아래에서 올려다 본 일종의 상상적 풍경이다. 동굴입구로부터 내려온 빛은 거친 심연의 벽을 쓸어내리고 특히 화면 하단부 동굴바닥에 인광처럼 보이는 푸른빛은 이 그림의 백미다. <적벽>은 한라산 서북벽 너머로 달이 뜨는 풍경을 관찰하며 그린 그림이다. 기암절벽을 물들인 노을빛이 월광으로 바뀌는 순간을 그린 이 작품은 작가의 독자적인 발상과 조형능력을 가히 엿보게 한다.


종이붓을 쓰다

강요배가 사용하는 조형 기법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하겠다. 최근 작가가 작품제작에 도입한 도구는 바로 종이붓이다. 그의 화면에 표상된 독특한 터치와 재료의 물성은 개성적 도구사용에 의한 것이다. 캔버스의 표면에 회벽과 같은 거친 질감의 바탕을 붓질로 완성한 후에 접거나 구겨낸 종이를 이용해 물감을 올리고 친다. 몇 년 전 서울의 한 개인전에서 그는 돌붓 그림을 발표한 적이 있다. 돌하르방의 이미지를 돌맹이에 물감을 올려 드로잉한 작품이다. 매체실험의 장으로 대변되는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작가가 선택한 특수한 재료나 기법이 그 자체로 긍정적 비평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매체실험이 작가가 드러내려는 예술이념과 표현형식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위한 필연적 선택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종이붓의 효과는 작가가 선택한 종이의 질과 두께 그리고 접는 방식에 따라 화폭에 다양한 질감을 만들어 낸다. 가령 <서북벽>과 <물과 불의 산>은 풍화의 흔적이나 융기로 드러난 단층의 구조를 종이붓으로 표상해 낸 성공적인 경우다. 한라 영산(靈山)의 기암절벽과 일출 성산(城山)의 바위섬 자락에 축적된 영겁의 시간과 구조적 질서감이 잘 드러나 있다. 한편 <파도와 총석(叢石>이나 <풍 천(風 天)>은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의 포말을 표상하거나 강한 바람에 흩어져 날리는 풀잎의 다채로운 선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종이붓은 축적된 시간의 질서감에서 자유롭고 거친 바람의 에너지에 이르는 다양한 시각적 감흥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종이붓의 효과는 나이프의 그것과도 비교될 수 있다. 나이프는 강렬한 칼날이 캔버스의 표면에 물감을 밀어 넣어 매끈한 광물성의 효과를 드러내는 반면, 종이붓은 바탕의 요철위에 목탄과도 같은 부드러움을 동시에 제공하며 풍요롭고 세밀한 빛의 효과를 세우는데 안성마춤이다. 강요배의 종이붓은 나이프와 모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질감의 진폭을 확대시키면서 자신의 작품에 풍부한 감동과 신비주의적 색채를 증강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강요배의 매체에 대한 실험성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이번 개인전에 소개되는 콜라주 작업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화사의 뜰에 떨어진 감나무 잎들을 캔버스에 고착한 작업인 <소슬 바람>, 봉숭아 꽃잎을 콜라주한 <꽃 점>, 쑥을 이겨 물감으로 삼아 그린 그림 <답청(踏靑)> 등은 작가의 그림이 자연의 외관을 묘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실체를 탐구하고 그것을 새로운 차원의 의미구조로 변주시키는데 있음을 보여주는 증좌들이다.


제명(題名)으로 풍부해진 서사

강요배의 작품의 의미구조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는 또다른 요소가 있다. 바로 작품의 제목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어느 시인의 싯귀 처럼 강요배의 제명은 그림에 의미부여의 형식으로서 작품의 내용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기능을 갖는다. 가령 감모양의 둥근 이미지를 화면 가득 둘러친 그림에 작가는 <청시창(靑枾窓)>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청시는 풋감이라는 뜻으로 감이라는 대상을 창으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관조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창문은 인간의 눈과도 같이 안과 밖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밖으로 열려 있을 때 세상이 들어오며, 안으로 향했을 때에는 영혼이 비추어 지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방식으로 강요배의 <청시창>을 보면 그것은 자연 현상과 그 자연의 내면을 비추어주는 거울로 다가온다.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의 제명은 작가가 방문했거나 공부한 문헌에서 따 온 것들이 많다. 가령 <월아사(月芽沙)>는 달의 싹이라는 의미로 돈황의 초승달 모양의 모래톱인 ‘월아천(月牙泉)’에서 빌려온 것이다. <적벽(赤壁>은 소동파의 시 ‘적벽부(赤壁賦)’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밤과 낯이 바뀌는 순간의 붉게 물든 기암절벽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앞에 소개한 <풍천>이나 <물과 불의 산>은 각각 주역의 63궤 중 ‘풍천소축(風天小畜)’이나 ‘수화기제(水火旣濟)’ 등을 공부하면서 정한 제명이라 한다. 중국고전과 동양철학에 대한 탐구는 작가가 자연에 대한 관찰과 그 예술적 번안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절묘한 상징과 신비의 형식논리를 배태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렇듯 강요배의 작품에는 중국고전에서 동양철학에 이르는 감당하기 힘든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이 때문에 강요배의 작품이 말로 설명하기 힘든 신비주의적 색채를 지니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노야>에서 화면 전체에 뿌려놓은 백색의 물매화는 ‘노인성’이나 ‘좀생이별’과 같은 가을철 별자리 28수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누가 짐작할 것인가. 이러한 비밀을 작품에서 캐고 나면 그가 표상한 들꽃은 자연에 서식하는 미물이자 천궁을 수놓은 별자리와 동일시 되면서 신비스런 환상의 세계로 보는이를 이끌게 되는 것이다.

풍화, 장후한 시간에 대한 상념

강요배는 이번 개인전의 제명을 ‘풍화(風化)’로 정했다. 바람 타는 화산섬의 품에 안착한지 10년을 결산하는 전시회를 위한 제명이다. 소금기가 올라와 바위에 고착된 수성화산의 지층에서 들판에 부는 강풍에 뒤섞여 날리는 풀잎사귀에 이르기 까지, 풍화작용이 진행중인 기암절벽에서 침수에 의해 형성된 해안동굴에 이르기 까지 작가는 시간이 만들어낸 영겁의 흔적들을 탐사하고 그것을 캔버스에 번안해 내었다. 조형 형식에 있어서는 바위의 규칙성과 파도의 자유분방함을 대비해 드러내기도 하고, <잔설>에서 보듯이 백록담에서 삼각봉, 왕관능, 서북벽, 탐라계곡을 잔설이라는 줄기로 꿰어 상상으로 봉합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강요배가 표상하는 장후한 시간에 대한 상념의 흔적은 <움부리-백록담>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움부리란 분화구를 뜻하는 말로서 이 작품은 한라산 정상에 위치한 백록담 어귀에서의 경험을 그린것이라 한다. 정월 초하룻날 분화구 아래에서 폭발하듯 올라오는 세찬 겨울바람의 경험을 심리적 풍경으로 연출한 것이다. 구름과 바람, 하늘과 별 등의 이미지가 서로 혼합되어 추상화된 화면에는 지하세계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위대한 자연의 에너지와 그 힘에 의해 변화를 계속하는 드라마틱한 풍화 세계의 서사가 녹아있다.

강요배는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자신의 존재와 동일시하며 그것이 지닌 의미를 작품으로 드러내고 소통하는데 주력해 왔다. 이제 그의 그림은 자연과 역사를 담아내는 그릇의 차원을 넘어 자연과 역사 자체가 되기를 희망한다. 강요배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말로 설명하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형식의 간결성과 논리의 명쾌함 그리고 직관적 통찰력은 그를 당대 최고화가의 한사람으로 인정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다. (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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