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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세상의 다른 곳’을 그리다

박영택

유럽여행이 보편화되기 이전에 몇몇 구상 화가들이 유럽을 다녀와 이른바 귀국 전시를 할 때면 어김없이 이탈리아의 베니스를 그린 그림들을 선보였던 기억이 난다. 유럽을 동경하던 이들에게 에펠탑과 몽마르트르, 베네치아의 곤돌라를 그린 그림과 엽서사진이 구원처럼 다가오던 시절이 있었다. 유럽을 기행하고 돌아와 스케치전시나 개인전시에 그 베니스 풍경을 그린 그림들은 지금도 여전히 만난다. 이제는 유럽여행이 보편화되었고 ‘베니스비엔날레’로 인해 무수히 많은 한국인들이 그곳을 드나들게 된 지금 새삼 이원희는 그 베네치아 풍경을 모았다.
이원희라면 자연스레 한국의 산하, 그 풋풋한 흙 내음과 건조한 공기, 맑고 쨍한 하늘, 흙벽과 밭고랑, 잡목들이 명암의 산뜻한 대비 속에 세련되게 위치해있던 그림이 트레드마크처럼 떠오르기에 이 이국의 도시풍경은 조금 낯설다. 돌이켜보면 이원희는 자신의 고향과 인근한 환경 속에서 체험된 시각적, 몸 적 경험을 그림으로 담아왔고 따라서 그것은 단지 풍경의 외부 묘사에 머물지 않고 풍경을 감싸는 내음, 촉감, 공기의 흐름과 분위기 등을 촉각적으로, 후각적으로 건져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동에 있던 작업실을 떠나 도시로 와 살면서 슬그머니 농촌과 자연과의 합일되는 체험이 느슨해진 틈에 자주 유럽에 가서 그 풍경에 매료되었던 경험이 이번 근작을 통해 자연스레 발화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유럽/도시의 내음과 공기, 햇살과 색채가 가장 극적으로 고양된 장소에서 자신이 체득한 감성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내 기억에 의하면 이원희는 매년 유럽과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미술적 체험과 풍토에 대한 탐색을 지속 해온 작가다. 그에게 서양화를 한다는 것은 수백 년동안 체질화된 유럽인들의 정서와 그들의 물감과 붓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그곳의 지역적 조건과 풍토, 공기와 내음 등에 대한 근본적인 체득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 바탕 위에 그는 동양의 전통문화와 모필 체험을 버무려놓고자 한다. 그가 유럽을 그토록 자주 다녔던 이유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유독 베네치아풍경을 그린 이유 역시 자리할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이원희는 유럽풍경을 이제 자신의 손으로 그려낼 수 있으리라는 예감을 지닌 것 같다. 그중에서도 그를 매료시켰던 베네치아풍경이 중심적인 소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공간 속에서는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 자다. 그만큼 베네치아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동시에 그 베네치아풍경이 보여주는 수많은 창과 벽, 바다와 하늘은 이국적인 동시에 현재 한국의 도시 속에 서식하는 외국풍의 건축공간으로 인해 일반화되어 가는 미감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의 우리 삶 속에 서구적인 분위기, 내음, 색채와 조화 등등이 무리없이 스며들어가는 그 사이에 서식하는 모종의 미감을 건드리고 있다. 초압축 성장과 서구화의 결과 한국의 도시공간은 유사와 모방, 화려한 키치의 연출 아래 급속히 서구적인 공간으로 재편되고 있다. 자연스레 감수성과 취향 역시 뒤따르고 있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커피숍이나 식당가, 분당의 정자동 등에 위치한 테라스와 창, 베란다 등을 갖춘 이태리 레스토랑 등은 이곳이 유럽의 어느 길모퉁이인지 대한민국의 도시공간인지 구분이 가지 않게 한다. 유럽의 도시와 조경, 건축물과 색채감각이 한국의 상류층 혹은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미적 감수성과 기호로 작동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그만의 독특한 구도감을 통해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매력적인 존재로 변환시킨다. 베네치아의 벽과 창, 건축물의 외관 그리고 곤돌라와 바닷물과 가로등 등이 시적이고 낭만적으로 그려졌다. 그의 손은 진부하고 평범한 대상을 감미롭고 드라마틱한 화면으로 돌변시키고 감각적인 색채로 어루만진다. 예리한 각도감각으로 베네치아의 이곳저곳을 프레밍했는데 그것은 사진적 프레밍에 기인하는 속도감 나고 감각적인 화면구성이다. 그 구도에 부드럽고 온화한, 더없이 달콤한 색채와 떨리는 붓 터치의 경쾌하고 운율적인 이동, 상큼한 명암대비 등이 얹혀져 그림은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을 마냥 설레게 한다. 그는 그렇게 사람의 마음과 눈을 흡입하는 기술을 갖고 있다. 그것은 무척 여성적이고 다감하면서도 세련된 격조를 유지한다. 특히나 붓의 속도감, 강약의 조율은 화면 전체를 박동시킨다. 그의 이 붓놀림은 다분히 서체적이고 운필의 호흡을 자유자재로 휘몰고 다니는 테크닉에 기인한다. 옛 선비들의 화첩이나 서화에서 보여지는 붓의 흔적과 낙관, 발문 모두가 그의 그림에 함축되어있다. 그는 이번 그림에서 자신의 사인을 두 가지로 보여준다. 하나는 ‘이원희’라는 글자를 옆으로 길에 늘여 쓰면서 붓놀림을 화려하게, 탄력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름 가운데 글자인 ‘源’자를 벽을 그린 그림 사이에 슬그머니 집어넣어 그것이 실재 벽의 박락되고 낡은 흔적인지 혹은 사인인지 구분이 가지 않게 한 장치다. 나로서는 이런 사인에서 그가 서양화물감과 붓을 통해서 서예적인 요소를 어떻게 삽입해나가고 있는가를 엿본다. 동시에 그것은 문자와 이미지를 조화롭게 한 공간 속에 숨쉬게 하는 배려이기도 하다.

이원희의 그림은 베네치아의 풍경을 보여주되 다른 화가들이 흔히 제시하는 그런 일반적 구도에서 벗어나있다. 그는 사물과 풍경의 단면을 예각적으로 잡아내는 날카로운, 현명한 힘이 있다. 이번 근작은 대부분 베네치아에 위치한 건물의 벽과 창문을 주로 그렸다. 엄청난 습기를 안고 사는 도시인지라 모든 벽은 태양을 향해 뚫려있고 어김없이 창문이 만들어진 까닭에 베네치아의 그 오래된 건물의 외벽과 창문, 테라스는 많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그것은 시간과 세월, 자연이 만들어낸 색채이고 구성, 장식이자 천오백 년이라는 까마득한 세월이 쌓아올린 층위에서 빚어진 결정이다. 이원희는 그 벽과 창문을 찢어오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너무 매력적이라 그 앞에서 모든 화가들의 눈과 손, 마음은 마냥 누추하고 깊은 자괴감이 들것이다.
알다시피 베네치아는 오랜 세월 동안 세계를 향해 열려진 창과 같은 도시, 무역의 중심지이자 문화의 용광로라 복합적인 문화요소들이 몸을 섞고 개방성과 타자성을 강하게 지닌 곳이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의 심미안은 다채로운 문양과 색깔, 다양한 질감과 재료를 맛봄으로써 훈련된 미감을 지녔고 그것들이 이룬 삶의 공간, 미적 공간이 바로 베네치아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껴안는 코스모폴리탄적인 혼성의 결과가 빚어낸 결정 위에 아드리아해의 빛나는 햇살과 푸른 물빛이라는 천혜의 자연을 가진 지라 일찍부터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화려한 색채구사를 통해 질펀한 감정을 전달해왔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그 자체로 충분히 미술적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베네치아를 ‘세상의 다른 곳’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삶과 미술, 일상과 미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화가들은 그것에 가서 거듭 감탄하고 매번 절망한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란 영화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풍부한 색채, 다채로운 문양과 표면의 강조, 빛에 대한 탐구, 정교함, 모방 취향, 지속성과 보수주의로 빚어낸 베네치아의 곳곳을 감미롭게 재현한 이원희의 이번 근작은 결국 자신이 베네치아에서 보고 느끼고 담아온 빛과 색채, 내음과 촉각의 기억이다. 그가 베네치아에서보내고 온 삶의 두께와 깊이만큼 그림은 가능하다. 빛과 공기와 도시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베네치아풍경이 지닌, 말로 표현하기 힘든 빛의 유희와 무서운 세월의 결이 고스란히 숨 쉬는 벽과 창문에서 발산하는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 보이는 이 작업은 결국 소멸과 저항이 빚어낸 모순된 경계에서 그가 깨달은 미의 세계인 셈이다. 그렇게 그는 자연이 만들고 허물어낸 자취를 찾아 나서고 있다. 어쩌면 미술의 이상은, 화가의 열망과 절망은 모두 그 자연 앞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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