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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웅-붓을 그리다

박영택

이정웅은 한지 위에 먹물을 뿌리거나 모필에 의한 다채로운 자취를 남겼다. 근작은 뿌리고 긋고 다닌 행위의 흔적을 더욱 생생하게 살리고 있다. 그것만으로는 흡사 수묵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송수남과 이우환의 ‘붓의 놀림’ 연작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렇게 바탕을 만든 후 그 위에 커다란 붓을 그려놓았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붓은 실재 붓처럼 놓여있다. 더구나 먹이 흠뻑 적셔진 모필이 먹이 번지고 칠해진 종이 위에 그려져 있어서 바탕과 그려진 부분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다. 한지와 대면하여 작가가 벌인 일회적 과정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이자 먹물 그 자체가 놓여져 있는 실재의 제시인 셈이다.

이 그림은 눈으로 경험한 현실의 충실한 기록이다. 작가는 현상 그 자체를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한 묘사와 눈속임에 기반하기에 극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시각적 사실을 정밀하게 묘사한다는 기법상의 특성을 지칭하는 경우에 말이다. 이 그림은 시각적 현실을 재현한 구상회화이자 일상의 물건(붓)을 기계적 감각으로 정밀하게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붓은 일상의 물건인 동시에 그림의 도구이자 전통문화의 아이콘, 동양의 모필 문화를 대변하는 일종의 상징으로 호명되었다. 한지라는 바탕과 먹(먹물) 역시 동일한 맥락이다.


한지는 먹물 혹은 모필에 의해 일정하게 연출되었다. 한지의 납작한 평면이 고스란히 그림의 표면으로 대체되어 나온 형국이다. 주어진 수평의 균일한 평면의 화면을 평면으로 지각하게 한다는 것은 다분히 서구미술의 논리(모더니즘의 평면성 논리)에 따른 것이다. 그림의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평면인식이 그것이다. 그 위에 이미지가 얹혀져있다. 수평의 화면에 조응해서 수평으로 놓여있다. 한지 바탕 면을 이미지를 이용해서 하나의 오브제가 되도록 하며 실재의 상황과 그림의 상황이 구분되지 않고 모호해져 그것들은 마냥 중첩된다. 이런 전략은 70년대 지석철의 쿠션작업이나 김강용의 벽돌, 박장년의 마포작업(주름이라는 일루젼은 곧 캔버스이고 캔버스는 곧 일루젼)등과 동일한 연장선상이다. 그것은 작품과 사물 간의 사이를 메워 ‘실재와 표상’이라는 이원론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붓은 이제 막 그 화면에서 먹물을 뿌리고 긋고 나간 행위를 잠시 멈춘 후의 휴지기를 보여준다. 작가는 한지와 붓이라는 사물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종이와 먹물은 사물 그대로다. 그것(오브제)을 끌어들여 그 위에 그림(붓)을 그린 것이다. 붓 역시 오브제인데 그것은 그려진 오브제painted object다. 오브제 위에 비친 물리적 일루젼인 것이다. 여기서 그림과 사물은 부딪치고 충돌한다. 그것은 오브제도 아니고 회화도 아닌 어떤 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둘 모두 ‘사실’이라는 점을 공유한다. 그러니까 그는 작품을 가지고 ‘사물’이 되게 한다. 실재로서의 그림에 도달하는 것이다. 일루젼이자 평면이고 실재이자 실물오브제이고 그림이다. 그것은 예술과 사물의 경계를 넘나든다. 실물공간과 허상으로서의 평면공간이 한 표면 위에 공존하는 형국이다.
따라서 이정웅의 그림 역시 70년대 중반의 한국 극사실주의 담론을 일정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리얼리티를 평면에 감아내야 하는 그림의 시각적 조건인 일루젼과 그것의 물리적 조건인 평면에 관한 담론’이 그것이다. ‘구상적 관행과 추상적 조건’이 공존하고 동거하고 있다. 당시 작가들이 공유한 일루젼이라는 구상적 이미지와 평면이라는 추상회화의 전제를 모두 사실이라는 개념 속에 포용하고 있는 것의 반추이다.

또한 이정웅은 대상의 표면에 시선을 고정시킴으로써 그려진 사물의 표피 이면을 차단하는 것과는 달리 모종의 관념 세계를 그 너머에 드리운다. 그의 먹과 붓은 단지 극진한 묘사의 표피적 대상에 머물고 싶지 않아 보인다. 먹과 모필, 한지라는 대상, 사물은 분명 그가 지향하는 주제의식을 매개시켜주는,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그 무엇이다. 그는 그것을 동양적인 정서나 문화로 보고 있다. 이정웅에게 붓은 관조의 대상이다. 그러니까 그의 붓은 이미지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 자체에 접근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됨과 동시에 그를 통해 연상되는 모종의 관념을 극화하는 매개, 징검다리다. 마치 김창렬이 ‘물방울’을 통해 생성과 소멸, 동양적 시간관을 이야기하거나 고영훈이 ‘돌’이나 ‘고서’를 통해 선禪과 도를 연관시키듯이 이정웅 역시 한지와 붓, 먹을 통해 동양적 정신 등을 겨냥한다. 그것은 이미 선험적으로 규정되거나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기호를 차용하는 선에서 기능한다.

아울러 이정웅의 그림에는 행위를 강조하는 박서보나 이우환 그리고 이미지를 관념화한 김창렬의 물방울이 동시에 겹쳐있다. 그것은 추상과 구상을 두루 아우르며 그 사이에서 긴장을 이루고 물려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문화적 담론이 놓여있다. 한국적 아이덴티티의 기호로서 한지, 먹과 모필이 등장한다. 무위적인 것으로 보이는 행위의 흔적도 깔려있다. 무엇보다도 문인화전통의 내음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그는 어린 시절 서예를 했던 경험을 이야기 한다. 나로서는 그런 체험이 현재의 그림에 투영되고 있다고 본다.“우리 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양적인 것, 동양적인 이미지를 찾고자 했는데 붓 그림은 7년이 되어간다. 사실을 그리려고 한 게 아니라 추상을 하려고 시도했다. 주제는 붓이지만 먹 번짐이 주제다.”(작가노트)

그의 그림은 올 오버의 추상양식이 수묵과 맞물려있고 액션페인팅이 모필 체험과 겹쳐있다. 추상표현주의와 극사실주의, 기법상으로는 극사실이고 개념상으로는 단색주의 느낌이 강하게 난다. 그래서 이정웅의 그림 안에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모든 모색과 성과가 다시 한번 정교하게 개입되고 번안, 각색되어 있다. 70년대 단색주의 회화와 동양적 정신세계의 습합, 70년대 중반의 극사실주의 담론, 그리고 80년대의 수묵실험 등이 모두 다 포함된다. 그것은 실재와 그림의 세계를 헷갈리게 하고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넘나들고 이미지와 관념을 아우르며 구상과 추상 등을 하나로 통합하는 형국이다. 그간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고민스러운 모든 것들이 한 자리에 섞여있다. 사실 극사실주의와 미니멀리즘 사이에서 결합과 절충을 취한 것이 그간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살아남은 미술이자 미술시장에서 매력적인 요소를 지니며 살아남은 미술이다. 또한 한국 현대미술이 당연히 추구해야 할 정체성이나 당위성 같은 것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 당위성이나 정체성 같은 것들은 사실 한국미술계에 퍼져있는 다소 막연하고 심정적인 동시에 다분히 관념화된 것이다. 그것이 알게 모르게 오랜 세월 상식이자 모범답안이 되었다. 이정웅이 그림은 그 모범답안을 비교적 완벽하게 써낸 편이다. 그 그림 안에는 한국 현대미술사이 그간의 궤적이 흠뻑 스며들어있다. 그의 먹 번짐처럼. 그런데 그 답안이 너무 모범답안이라 그림을 보면서 솜씨에 놀라워하다가도 잠시 이상한 느낌에 빠진다. 너무 많은 것들이 강시처럼 배회하기도 하고 너무 많은 자취가 어른거리고 그 모든 것들이 홀연 한 몸으로 부감된다. 그의 그림이 한 작가의 미술관이나 내부에서 형성되었다기 보다는 우리 미술계의 현실적 논리 속에서 미술 내. 외부를 부단히 의식하면서 만들어낸 그림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이정웅만의 솜씨이고 능력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현대미술의 초상 역시 그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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