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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조 / 돌의 피부에 서린 천진한 얼굴

박영택

수묵을 이용한 산수화와 대리석이 지닌 자연적인 무늬와 색상을 이용, 그 무늬의 결을 따라 산수이미지의 자취를 쫓던 것이 박대조의 그간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근작은 이전과는 무척 다른 지점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는 필에 의한 그리기와 대리석이란 오브제를 이용한 작업 대신에 사진을 활용하고 있다. 사진이란 레디메이드와 돌이란 오브제를 쓰고 있는데 그 사진을 대리석 표면에 독특한 장치로 올려놓고 연출해 새로운 장면,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진은 하나의 회화 재료로 구사되고 있고 대리석/돌이란 재료, 표면은 여전히 매력적인 물질이자 그만의 작업언어와 방법론으로 기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진이미지와 회화의 접목, 그리고 이를 돌/돌의 피부 위에 올려놓아 독자한 사진 상태를 흥미롭게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것은 일반적인 사진프린트기법에서 벗어나 사진오브제, 혹은 사진의 물질화, 조각화라는 새로운 지점으로 나아간다.

그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촬영한 후 이를 확대했다. 아이들은 커다란 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본다. 아이의 커다란 눈이 전면적으로 다가온다. 티없이 맑고 순수한 영혼이 아이의 얼굴 표정에 드리워져 있다. 보는 이의 시선이 그 아이의 시선과 일치하는 지점에 놓여진다. 흑백의 사진에 들어온 이 얼굴, 커다란 눈동자는 침묵 속에 우리를 응시한다. 익명의 아이들 눈동자에는 또 다른 장면이 개입되어 있는데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거나 콜라주되어 있다. 우선 전쟁이나 공포스러운 상황을 암시하는, 다분히 종말론적이고 세기말적인 상황을 암시하는 풍경이 그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테러, 생태파괴와 환경오염 등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어리고 착한 아이의 눈에서 불꽃처럼, 섬광처럼 분출한다. 단색 톤의 사진이미지에서 유독 그 부분만은 강렬하게, 눈에 띠는 색채를 지닌 체 박혀있다. 티없이 맑은 얼굴로, 무방비로 다만 그 장면을 고요함 속에서 바라보고만 있는 아이의 심정과 내면을 관자들로 하여금 유추케 한다. 어른의 세계가 저지른 비극과 참화를 아이들은 다만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그로인한 대가와 피해는 고스란히 이 아이들의 어깨에 내려앉아있다.

한 축으로는 그와 상반된 이미지들이 스며들어있다. 밝고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은유적인 이미지가 그것이다. 극단적인 세계상, 현실상황이 아이들의 눈동자 안에서 번갈아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눈동자의 홍채 대신에 스며든 이 이미지들은 마치 눈동자에 비친, 아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바로 앞의 장면을 투사하는 한편 아이들에게 닥친 비극적, 긍정적 세계상을 보여주는 가공의 풍경연출이다. 그에게 사진이란 작업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이미지를 재현해주는 한편 현실상황을 강하게 암시하는 매개로 활용된다. 현대 사회의 여러 모순과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들추어내기 위한 효과적인 오브제이미지로 사진이 개입된다. 동시에 흑백사진이미지는 수묵에 익숙한 그에게 그와 유사한 미감으로 연결된다.
한편 작가가 재현한 영아의 얼굴은 인간이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상의 평화와 고요로 볼 수 있으며 순진무구, 천진난만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노자는 도를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원목인 박(樸)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장자 역시 ‘예란 세속의 꾸밈이고, 진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성인도 하늘을 본받아 진을 귀하게 여기고 세속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속에 구애받지 않는 품성을 지칭하는 것이 다름아닌 천진(天眞)이다.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지혜가 생기고 기교를 배우며, 예속에 적응하면서 본래의 천진함을 상실해가는 과정을 겪는다고 보았다. 그러기에 동양에서는 천진함을 보존하는 것을 진정한 도로 파악한 것이다. 도가에서 최고의 이상적 인간을 진인(眞人)이라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진인은 지혜와 기교가 발달하지 않은 태초의 역사를 동경하고, 예속에 물들지 않은 순박한 어린이의 경지를 추구한다. 그러니까 천진이란 결국 동심을 일컫는 말이다. 동심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도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박대조는 동심의 표정, 천진난만하고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아이의 얼굴을 천연의 재료인 돌의 피부에 올려놓았다. 그는 아이의 얼굴, 그러니까 크고 맑은 눈동자와 꼭 다문 입술, 알 수 없는 표정, 감정이 배제된 그 얼굴을 풍경 삼아 그 안에 또 다른 풍경을 설정해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나간다. 그 눈에 들어온 장면이 다양한 서사를 이룬다.




나로서는 이 작가가 그 사진이미지를 대리석 표면에 독자한 방법론으로 올려놓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무척 흥미롭다. 사진이란 인화지의 피부에 밀착된 이미지다. 빛에 의해 그려진 이미지이자 시간이 고정된 흔적이다. 그것은 부재의 증거이고 2차원의 화면에 올려진 3차원의 세계다. 사진은 얇은 인화지의 피부위에서 서식한다. 그러나 박대조의 사진은 대리석이란 돌의 피부와 함께 한다. 우선 작가는 대상을 촬영하고 포토샵 처리를 한 후 glay scale로 변환한 다음, 눈동자 부분에 이미지를 삽입한다. 이를 DPZ로 전환한 후 OHP필름으로 인쇄한 것이다. 그런 후 blue광으로 1,2분간 노광을 주어 감광 필름 TOHP로 제판, 전사한다. 그리고 수압을 이용해 현상한 후 건조시킨 다음에 감광필름을 돌, 대리석 피부에 부착한다. 그런 다음 조각과 채색을 거쳐 완성한 것이다. 까다롭고 수고스러운 공정을 거쳐 완성된 사진은 기존 사진과는 색다른 느낌으로 현존한다.

그것은 돌의 표면에 각인되고 얹혀진 이미지이자 돌 속에서 자라난 이미지와도 같다. 돌과 함께 한 사진이미지는 견고한 질감과 투명한 표면, 일정한 두께를 지닌 부조로 자존한다. 그는 돌의 피부에 서식하는 사진이미지를 벽에 걸거나 바닥에 여러 조각으로 늘어뜨려 설치해 관자들로 하여금 배회하고 서성이면서 바닥에 놓인 이미지를 관조하게 하는 보행적인, 시간에 따른 시각적 체험을 유인한다. 그런 예로서는 비스듬한 경사면을 지닌 각각의 면들을 일으켜 세운 화면을 통해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보는 장면이 각각 개별적인 장면을 선사하는 시각적 장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일종의 자바라식 벽체를 본떠 만든 변형화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로인해 보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는 나타났다가 숨겨진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그림이 보인다는 것은 동일한 이미지이지만 그것을 대면하는 개별 주체의 입장, 관점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옆에서 비스듬히 기울어봐야 보이는 장면은 흥미로운 시각체험인 동시에 우리가 사물을 보는 관습과 그로인한 편견 혹은 항상 각자만의 고정된, 획일적인 시선을 통해 세계와 사물을 보는 편견에 대한 비판적인 맥락으로도 작용한다.

돌은 영속성과 굳건함, 아득한 시간의 결들을 함축하고 있는 물질이다. 그 물질이 연약한 아이의 얼굴과 눈을 담고 있다. 사실 인간의 연약한 살과 유한한 목숨을 돌 위에 그리는가 하면 아예 돌 자체에 각인하고자 한 것은 유한한 인간의 삶, 소멸의 두려움을 돌로 극복하고자 했던 욕망을 말한다. 그것이 이미지의 기원이었을 것이다. 박대조는 새삼 그 재료와 사진이미지를 결합해서 새로운 화면을 만들었다. 동양의 전통사상과 재료의 흔적에 첨단의 방법론이 결합되어 이룬 작업인데 그 안에 천진한 아이의 얼굴/눈에 현대문명으로 인해 초래된 참화와 공포를 담담히 비추어내고 있다. 서늘한 돌의 피부가 그 장면을 영원히 각인하듯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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