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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 도시를 응시하다

박영택

언제부턴가 자연을 대신해 사물들이 말을 하고 사물들의 그 말을 독해하는 일, 듣고 전하는 일, 사물들을 대신해 인간이 말하는 일이 예술이 되었다. 물론 사물은 침묵하고 입을 가지지 못해 발화하는 음성은 없지만 그래서 고막에 와 닿는 소리도 없지만 분명 사물은 표면과 질감으로 말을 건넨다. 그것은 차갑고 무겁거나 화려하고 가벼우며 다양한 흔적과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서려있고 그것과 함께 했던 누군가의 체취와 지문이 눌려있다. 그 사물의 피부에 손을 갖다대면 사물의 생애는, 어떤 역사는 전율하듯 안긴다. 무수한 사물들로 채워진 도시는 그런 의미에서 거대한 책이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사물들 속에서 사는 일이고 사물을 관찰하는 관찰자/구경꾼이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사물뿐만이 아니라 그토록 많은 사람들도 우선적인 볼거리다. 그래서 도시는 청각의 작용보다는 시각의 작용이 훨씬 우세하게 작동한다. 모든 감각이 마냥 혼란스러워지는 도취의 장소로서의 도시에서 관찰, 바라보기는 특히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근대기 도시의 형성으로부터 촉발된 이 관찰과 구경꾼 내지 산책자 개념은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벤야민은 순수한 산책자와 구경꾼을 구분하는데 그에 의하면 의구심을 가진 산책자는 자기 개성을 충분히 확보한 자인데 반해 구경꾼은 외부세계에 열광하고 도취함으로써 (그들의 개성은) 외부세계에 흡수되어 사라진다고 보았다. 산책자가 되지 않으면 도시에 의해 먹힌다.

도시는 볼거리를 안기고 다양한 사물들로 채워져 있으며 사람들은 그 사이를 불안정하게, 영원히 유동적인 존재인 양 부유한다. 오늘날 도시에서 태어난 도시에서 죽어갈 작가들은 광대한 미로 같은 도시공간을 끊임없이 어슬렁거리면서 압도적으로 밀려드는 사람과 사물들 사이를 헤맨다. 그 공간에서 작업의 단상을 얻는다. 도시의 거리는 작업의 보고다. 작가들은 자신이 보고 읽은 도시의 얼굴, 사물의 피부를 재현한다. 사물을 대신해 말한다. 어떤 말들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보았나?

김홍식 역시 자신을 둘러싼 도시 공간과 사물, 사람들을 바라본다. 관찰한다. 그로부터 파생한 감정과 느낌을 시각적으로 옮긴다. 자신과 주변을 차분히 응시하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더듬는다. 대도시에 대한 자신의 내밀한 감성을 보여주는 이 작업은 거리를 걸으면서, 차 창밖으로 내다보며 만난 것들의 기억, 그 목록이다. 눈과 뇌, 가슴이 담아 기억한 것들을 ‘기억하는 거울’인 사진으로 다시 기억/기록하고 그 바탕위에 자신의 감성을 문진처럼 얹혀 놓고자 했다. 그러니까 김홍식의 작업은 우선 사진으로부터 출발한다. 기억과 정보의 기록을 토대로 그 피부위에 신속하게, 거의 직관적으로 도시를 판독하고 느낀 것을 침전물처럼 응고시켜놓았다.


작가에게 이 도시는 가장 친근하면서도 늘상 새롭게 돌변하고 그래서 생경하고 낯설고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내 흩어져버리는 그런 장소다. 이 도시는 그녀에게 모종의 감수성을 형성시켰고 지각과 감각을 키워주고 그것들을 매번 새롭게 부풀려 주었다. 너무 빠르게 스쳐지나가 순간 사라져버린 것과 이내 새로운 것으로 들어차는 그 간극 사이에서 느끼는 결락감과 공허, 허망함은 일종의 죽음과 부재, 소멸에 대한 감성의 정서를 자극한다. 동시에 도시는 모종의 생의 기운들로, 걷잡을 수 없는 부산한 욕망의 흐름으로 번진다. 작가는 그 도시공간에서 기운과, 흐름, 정신, 혼 같은 것을 보았고 느꼈다. 그래서 그 도심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카메라나 휴대용 영상장비로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들을 기록한다. 그것은 도시의 피부, 흐름에 대한 찰나적인 시각적, 정서적 반응이다. 낯설게만 느껴지는 도시를 이방인의 눈으로 보는 작가는 지나칠 만큼 친숙한 이 도시가 이질적이고 불안하며 생경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느낀다. 그런 감정을 시각화하려고 한다. 그래서 스텐레스 스틸 위에 도시에서 흔히 보는 장면, 거리풍경과 건물과 행인, 상점의 간판 등을 인화시켜 무채색인 회색 톤으로 물들였다. 스쳐지나가면서 빠르게 포착한 순간적인 장면의 응고는 가벼운 풍경이면서 동시에 거대한 도시 안에서 존재하는 현대인의 무감각한 일상의 삶을 반영한다. 화려한 색채가 지워지고 도회적인 차가운 금속성/인공의 색과 빛의 파동에 의해 흔들리듯, 떨어대는 중성적인 차가운 스텐레스 스틸 화면, 음각의 화면은 단독으로, 혹은 몇 개씩 이어져서 증식된다. 사각형의 화면은 서사적인 연결고리로 이어지고 그것은 도시에서 겪는 시간의 빠른 흐름, 기억의 산개, 감정의 유동과 맞물린다.

또한 부식된 판은 거친 사진 입자를 보존하며 반사된 표면을 통해 이미지의 불명료성과 유동성을 증폭시킨다. 판은 보여주면서 동시에 사라지고 지워지고 흐릿해져만 간다. 그러다가 각도와 조명에 따라 다시 살아난다. 나타난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놀이하듯 나타났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또한 도시인의 익명성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론이다.
동시에 금속판의 물성이 극대화된다. 그것은 차갑고 견고하며 무척이나 예민하다. 그 예민한, 날선 신경으로 촘촘해 보이는 표면을 녹이면서 침투한 선/산酸은 명료한 형상이 아닌 순간적으로 출몰하고 스러지는 이미지를 남겼다. 펄이 들어간 산에 의해 부식되어 음각만이 남아 기이하게 출몰하는 판/이미지는 눈을 감았다 뜨는 과정 중에 네거티브처럼 등장하는 이미지와 닮았다. 여기서 이 판은 판화를 찍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작품이 되는 의미있는 판/화면/물질로 자리한다. 작가는 스텐레스 스틸의 표면이 지닌 금속성의 느낌, 예민한 부위, 회색조의 톤, 비가시적이며 불명료함 속에 얼핏얼핏 나타나는 잔상 같은 이미지가 도시의 속성을 형상화하는데 효과적이라고 여긴 듯 하다. 이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이미지, 있음과 없음, 이미지와 물질 등이 도시의 이중성 혹은 양면성의 속성과 겹쳐진다.


근작에는 렌티큘러 작업이 몇 점 등장한다. 이 미디움 자체가 갖고 있는 장난감적 속성에 주목했다는 작가는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하는, 점멸을 거듭하는 그 양면적인 도시/서울의 초상/속성이 렌티큘러라는 재료 자체가 지닌 측면과 부합된다고 여긴다. 그것은 스텐레스 스틸에 사진을 인화한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것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도시의 양면성을 영상적으로, 유동하는 흐름으로 속도와 시간의 덧없음 속에서 찰나적으로 부감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보여주되 몇 겹으로 보여주고 보여주면서 지우는 동시에 기존 이미지위에 새로운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출현하는 이 연출은 어쩌면 매번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고 수시로 사라지고 출몰하기를 거듭하는 도시공간의 덧없음이나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공존하는 기이한 시간의 서식을 보여주려는 의도 아래 선택된 매체다. 아울러 그것은 가상적이고 실재하지 못하는, 다만 환영적이며 허상적인 이미지다. 우리가 보는 도시란 그런 신기루 같은 것이자 허상에 불과할 수 도 있고 지난 과거의 것들과 현재가 수시로 부딪치며 말을 건네는 곳이다. 이렇듯 단일한 스텐레스 스틸에 비해 렌티큘러는 몇 겹으로 은폐되거나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도심의 내부, 그 심부를 홀연 유령처럼, 기이한 바람처럼 안기는 착시적, 환각적 화면을 제공한다. 이 작품 역시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연결되어 또 다른 수수께끼와 같은 이야기를 침묵 아래 조용히 응시하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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