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빛을 그리다

박영택

태초에 빛이 있어 본다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그에 따라 사물의 분별이 이루어졌고 이 세계는 내 눈앞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빛과 그 빛에 의해 드러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있기에 세계가 있는 것이다. 눈이 없다면, 그리고 빛이 부재하다면 세계는 없다. 아니 세계는 분명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겠지만 그것을 보고 인지할 수 있는 인간, 인간의 눈이 없다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가 보는 사물은 빛에 따른 것이다. 빛이 없다면 사물, 세계는 없다. 빛이 있어야 비로소 사물을 볼 수 있다. 미술은 그 빛과 깊은 관련이 있다. 빛이 없다면 본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 이미지란 없거나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본다는 것과 미술행위는 그 눈과 빛에 의존한다. 빛이 없거나 눈이 없다는 것은 무지이며 상징적인 죽음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눈이 없음과 동일시했다. 눈을 찌르거나 제거한다는 것은 다름아닌 죽는다는 의미의 상징적 제스처였다. 반면 눈의 부재는 예언과 통찰, 계시의 능력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졌다. 고대의 예언자들의 상당수는 장님으로 그려진다. 고대인들은 어둠과 빛이 없다는 것을 무척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했다. 어두운 밤은 미지이자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찬 혼돈, 암흑, 깊은 심연으로 여겨졌다. 그 어둠을 지우고 거둬내는 것은 바로 태양, 빛이었고 달과 별은 어둠의 자리에 밝음을 피워내는 소중한 대상이었다. 빛의 결정은 태양이고 달이자 별들이었다. 어둠에 대항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태양과 달과 별은 비로소 빛의 존재를 깨닫게 해준 결정적인 존재다. 해서 태양은 모든 원시종교와 신화의 중심에 자리한다. 고대인들은 태양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면서 종교적 대상으로 삼았다. 태양숭배사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믿음이었다. 태양을 상징하던 동심원의 도상은 곳곳에서 출현하는데 특히나 불꽃과 화염문양으로 그려진 태양/불은 고구려 고분벽화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자연광인 태양과 함께 달빛과 별빛도 빛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다. 까만 어둠 저편에 발광하는 하나의 돌은 보는 이의 시선과 심장에 그대로 와 박히면서 가장 장엄한 구경거리를 선사했다. 수시로 변하는 형상과 어둠을 배경으로 환하게 번지는 빛으로 인해 달은 강력한 볼거리가 되어 무한한 상상을 가능하게 했는데 그런 면에서 밤하늘은 최초의 화폭이며 달과 별은 모든 이미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달 표면에 나타난 음영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동시에 온갖 전설과 신화를 창조해냈다. 그 달 표면이야말로 보는 이들의 상상력과 영감, 환영을 무한히 자극했던 매력적인 대상이었을 것이다. 회화와 문학 또한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어둠을 구원하고 중력에 저당 잡힌 이 현실계 너머를 꿈꾸게 해준 것은 달이었기에 달은 늘 그리움과 몽상, 희망을 비추는 거울처럼 자리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달을 보면서 탈중력과 비상에의 욕망을 마냥 꿈꾸었을 것이다. 별도 마찬가지다. 옛사람들은 그 많은 별들에 각각의 이름을 지어주고 현실계 혹은 비현실계에 존재하는, 존재한다고 믿었던 대상의 형상을 부여했다. 달과 별이 없었다면 지상의 모든 이들은 꿈을 잃었을 것이고 무척이나 쓸쓸했을 것 같다. 달과 별은 아득한 시간동안 무수한 인간들에게 위안과 치유를 제공한 이미지/빛이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이미지 행위 역시 오랫동안 부재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은 달 속에 어른거리는 그 누군가의 얼굴을 애타게 찾는다. 고독과 외로움, 상처를 진정시켜주었던 이미지는 바로 달과 함께 오버랩 되어 떠오르던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달은 만월이어야 제격이다. 달은 인간의 얼굴을 상상하게 해준 결정적인 공간이다. 어두운 밤하늘에 등처럼 떠있는 밝고 둥근 달은 모두에게 심리적인 안정과 위로를 선사해주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흔히 얼굴을 달덩이에 비유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욕이 되었다. 어쨌든 지상에 있는 모든 존재가 저 달로 인해 받았을 은혜를 생각해본다. 아울러 사람들은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이라고 노래하면서 별 하나하나를 그 누군가를 추억하는 매개로 삼기도 했다. 서양화가 김환기는 외롭고 어려운 뉴욕에서의 생활을 견디는 방편으로 블루로 적셔진 커다란 화폭에 작은 점을 찍어나가면서 별을 그리고 그 별들이 조국에 두고 온 보고 싶은 지인들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견뎌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그 점들은 하나의 불빛, 별빛이었다. 그는 빛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색 역시 빛의 소산이다. 색이란 것도 사실 인간의 눈이 수용하는 외부의 자극을 가리키는데 그 실체 역시 당연히 빛이다. 빛은 태양의 광선, 곧 빛의 파장이며 우리들의 눈은 제한된 범위내의 빛(파장)만을 보고 있는데 이것이 서로 다른 색으로 지각된다는 것이다. 그 빛으로 인해 인간이 식별할 수 있는 색은 얼마나 될까? 놀라지 마시라. 어림잡아 약 80만개나 된다고 한다. 이는 결국 우리가 색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미세한 차이에 의해 서로 다르게 지각되는 이 어마어마한 색채의 세계를 지시할 언어, 문자를 소유할 수 없는 인간은 그저 막연한 감으로만 대충 느낄 뿐이다. 그 색의 현란한 파노라마 앞에 문자는 절망한다. 그래서 색/빛은 더없이 심리적이고 정신적이다. 빛이 신성과 동일시되고 신의 현시를 상징하는 매개로 이해되는가 하면 늘상 그 빛을 우상과 동일시하는 관습은 뿌리깊다. 종교미술에 등장하는 후광과 광배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서양의 성당은 까마득한 높이로 솟은 천장, 스테인드글라스 창에서 쏟아지는 한 줄기 빛을 신으로 보여주고자 만든 건축물이다. 종교미술은 무엇보다도 빛의 상징성을 구사한다. 나는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금색으로 빛나는 황홀한 그리스 정교회의 돔을 통해 그리고 이콘화에 들러붙은 금박을 통해 엄청난 양의 빛을 향유했다. 그 빛은 신을 보여주고 유토피아를 보여주고 현세를 이기는 그 어떤 것으로 번쩍거렸을 것이다.
빛은 사물의 존재와 형태에 대해서 가르쳐준다. 빛은 친절한 손놀림으로 사물의 윤곽과 색채와 피부의 질감, 속성들을 은밀히 지시한다. 미술작품에서 빛은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통일감과 질서를 부여하기도 하고 소멸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명암대비를 낳는다. 결국 빛이 미치는 범위가 사물이 보이는 범위가 된다. 그리고 빛은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리스인들에 의하면 그림의 기원은 땅바닥에 떨어진 사람의 그림자, 그 윤곽을 선으로 둘러친 것이 비로소 그림이 되었다고 한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그림자다. 빛에 의해 사물이 보이고 그림자가 생기며 이미지도 가능해졌다. 그 빛을 추구하고 빛을 그리는 것이 이후 서양미술의 핵심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르네상스를 거쳐 카라밧지오, 렘브란트와 터너, 인상주의작가들 그리고 사진의 발명, 영화의 등장 그리고 비디오아트를 비롯해 빛과 조명을 동반한 다양한 현대미술의 실험들이 줄을 이었다. 빛중심주의, 태양중심주의가 서양미술의 근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가하면 빛은 사물의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회화적 표현에서 빛은 상징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 상징성은 문화권마다 조금씩 다르다. 빛과 색채는 그래서 문화적이고 종교적이고 정신적이다. 빛은 어쨌든 모든 이에게 축복같은 것이고 해서 그 빛을 동경하고 추구하기도 하고 일상생활의 측면에서 보아도 빛이 없으면 삶이 불가능하겠지만 특히나 미술가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각별히 빛/색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미지의 어원에는 빛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고 이미지도 없다. 모든 이미지는 빛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 빛과 더불어 항상 변모하는 질료로 존재한다. 빛에 의해 응고되어져, 광물질의 표면처럼 빛나기도 했고, 부서지는 색채의 가루로 소멸하기도 하고 흐린 대기처럼 엷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끊임없는 변모가 자연의 실체다. 수시로 자연은 색을, 밀도를 바꾸고 있다. 자연은 쉼 없이 변화 생성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과 역사가 자연에 내장되어 있다. 단단한 질료와 희박한 질료 사이를 오가며 자연은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색들을 시시각각 발산하고 있다. 이 싱싱하고 파득 거리며 날 것으로서 뒤척이는 자연의 몸, 빛에 의해 수시로 몸을 돌변하는 자연, 대상을 포착하려는 것이 모든 미술가들의 부질없는 욕망이었다. 미술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빛을 잡아 놓는다. 해석한다. 각자 자신이 보고 느낀 빛들을 표현하고 해독한다. 그것이 그림이고 사진이며 영상작업과 다양한 재료를 동반해 빛을 다루는 작업들이다. 저마다 축복같은 빛의 세례를 받으며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빛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며 표현하고 있을까?
씽크씽크뉴스레터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