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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연 / 시간의 흐름

박영택

어지럼증이 이는 사진이다. 명료한 시각적 대상은 거의 부재하다. 겨우, 간신히 느낌으로만 감지되는 그 어떤 잔영이 남아있을 뿐이다. 떠돌 뿐이다. 그것은 그 무엇을 재현하거나 보여주거나 하지 못한다. 특정 대상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는 사진은 사실상 사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오히려 사진에 달라붙는 명료한 형상, 정확한 기록, 확고한 고정을 못마땅해 하는 것 같다. 사진의 재현에 대한 불신 내지는 모든 재현이 지니는 숙명적인 실패를 상기시킨다. 사실 어떠한 사물도 본연의 형상을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시간에 따라 소멸되고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거듭하는 한편 시각에 따라서도 변화한다. 아울러 우리의 지각은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 개입되어야만 성립할 수 있기도 하다.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실재하는 대상, 사진 밖에 있는 세계를 연상하고 동일시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한 순간, 어느 특정 시간의 편린일 뿐이다. 사진 속에 들어온 대상이 실재 대상은 아니다. 이미 그 대상은 사라졌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잠시 형상을 빌어 허공 속에 부유하다 다시 미세한 먼지로 흩어진다. 영원히 고정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물의 항구적인 모습 역시 가능하지 않다. 대상에 대한 재현을 통해 그 대상의 본질, 참 모습을 구현하려는 시도는 그래서 모순이다.

사진 찍는 다는 것은 모든 사물에 대한 순간을 사진 속에 멈추는 일이다. 사진은 시간을 분명하게 잘라낸 한 조각이다. 그래서 사진은 모두 ‘죽어버린 순간’이다. 이처럼 사진은 허구화된 현재이며 부재의 증거에 다름 아니다. 사진 속에서 잘려져 있는 시간의 한 부분은 흐르지 않는다. 그 속에 우리가, 세계가 함께 공존해 있던 순간만이 기억되어 있으며, 모든 사물이 소멸되어도 사진에서는 그때의 현실이 불변한 채 남아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시간은 흘러갈 뿐이다. 그 흐름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간파된다. 그러니까 시간은 인간의 탄생과 함께 있다가 인간의 죽음과 더불어 없어진다. 과거와 미래란 지금에는 없고 우리의 의식인 기억과 기대를 통해서만 있게 된다. 결국 시간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 없다면 시간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 자체는 돌이킬 수 없지만 그 시간과 함께 발생했던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통해 시간은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그 시간이란 이전의 시간은 분명 아니다. 기억 속에 있는 시간은 막연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재생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시간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실체가 아니다. 때문에 순간도 없고 영원도 없다. 있다면 그저 부단한 ‘차이화’가 있다. 즉 차이를 발생시키며 나아가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존재란 차이화의 산물인 동시에 시간의 산물이다.

최수연이 찍은 대상은 자연이며 그 곳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이다. 특정한 공간에, 특정한 시간에 작가 자신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진은 분명 증명한다. 그러나 사진 속에는 그러한 명확한 증거적 자료는 부재하고 흔들림, 모호한 유동, 격렬한 흐름만이 부산하다. 그 사이로 작가의 짙은 그림자가 떨고 있다. 대부분 밤의 어느 시간대에 걸려든 장면이다. 피사체와 공간이 어지럽게 뒤섞여있다. 전경과 후경의 구분도 모호하고 더욱이 찍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특정 공간과 시간을, 그 안을 감싸고 채우고 있었던 어떤 흐름, 밀도, 분위기, 개인적인 느낌만이 입자가 되어 떠돈다. 그것은 어떤 우발성contingency의 결과다. 흔적이고 상처다.
그러니까 그는 특정 대상을 찍었다기 그것이 사라진 자리, 시간을 보여준다. 아니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정작 사진 안에 그것들은 남겨질 수 없다. 빈 밥그릇 같은, 다 떠먹고 남은 텅 빈 바닥 같은 사진이다. 존재가 머물다 사라진 자리, 무엇인가가 흐르다 가버린 순간이다. 작가는 차마 보여줄 수 없고 결코 시각화할 수 없는 것들을 애써 인화지 표면에 담았다. 사진은 어떤 흐름이 지나가다 멈춘 통로 같다. 있었다가 흐르다가 그렇게 덧없이 사라져버린 시간이 남긴 부재의 공간이다. 적막과 공허가 맴도는 구멍이다. 사진은 그런 느낌을 과연 보여줄 수 있을까? 근작을 통해 최수연은 그런 문제의식을 던져준다.

시간의 본질은 유일회성에 있다. 모든 생명체는 이 한 번 밖에 없는 삶을 변화무쌍하게 산다. 사실 시간은 수수께끼다. 일반적으로 시간은 현상으로부터 독립된 내용 없는 형식 즉 1차원적 흐름으로 여겨진다. 특히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은 별도의 실체가 없고 현상에 의지해서 있다.(時無別體 依法而立) 그 시간은 반드시 존재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다. 현재는 한 순간도 머물러있지 않고 순간마다 앞으로 새로 나고 그와 함께 뒤로는 소멸한다. 그렇게 시간은 한편으로는 연속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단절적이다.
작가는 단절의 순간에 남겨진 공허를 본다. 자신이 분명 보았던 것들, 현존했었던 것들이 이제 막 지워진 자리, 다 지나간 자리에 남아 떠도는 것을 상흔처럼 간직했다. 시간은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그렇게 사라진 시간의 자리를 기억하고 느끼는 것은 주체다. 자신이다. 시간 지속의 주체는 분명 신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 의식의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의 의식이 시간을 단절하여 거기에 시간 내용을 넣었으므로 인간은 단절의 주체가 되는 셈이다. 즉 지속을 단절해서 무를 개입시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의식, 작가 자신의 의식이자 느낌이다. 그러나 과연 그 느낌이란 것이 어떻게 사진으로 남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하늘과 능선, 혹은 프레임 밖으로 막 빠져나가려는 듯한 몸의 흔들림, 바닥에 드리워져 도는 그림자 등이다. 저속의 노출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이미지들은 산과 숲, 바다와 땅 그리고 나무 들을 겨우 보여준다. 그리고는 그림자들이 덮친다. 어디선가 빛이 비친다. 공간 속에서 뚜렷한 좌표를 상실한 부유하는 흐린 이미지다. 그는 말하기를 그런 장면을 저절로 찍었다고 한다. 다만 막막한 느낌으로 잡은 사진이다. 지금 막 새들이 지나가고 돌연 적막만 남은 빈 풍경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것은 사진으로는 도저히 잡을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 느낌이다. 작가는 그것을 사진으로 만들어보고자 했다. 시간의 흐름을 그렇게 흘려보내며 그 흐름을 안긴다. 보여준다. 이 세계와 내 몸과 시간이 그렇게 우발적으로 만나 잠시 상처를 남기고 그렇게 다 떠나버린다. 새때처럼 다 떠나가 버렸다. 그 자리에 환청처럼, 잔상처럼 무언인가가 남아서 떠돈다. 잘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그의 사진기가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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