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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석 / 흐르는 풍경

박영택

흐르는 풍경


자신의 신체를 둘러싼 외계가 풍경이라면 그것은 몸에 대한 상대적 거리, 몸과 한 쌍을 이루는 또 다른 몸과의 관계에서 파생된다.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몸을 가진 내가 내 몸밖의 저 몸에 대한 반응이다. 반응은 일방적일 수도 없고 상호참조적이고 관계적이라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롭게 얽혀들어간다. 인간관계가 그렇듯이 풍경 역시 신경쓰이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선인들은 몸밖의 것들을, 우주자연을 핵심이나 본질까지 들어가 보길 원했다. 문인들의 공부란 것이 바로 그러한 직관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 것을 시, 서, 화로 그려내고자 했다. 시, 서, 화는 내 몸밖의 것을 내 몸이 보고 깨달은 것의 진솔하고 핍진한 고백이다. 몸의 반응이고 몸이 깨닫고 인식한 것의 기술이다. 그래서 필은 몸의 반응을 따라가 섰다 멈췄다 흐르다 머물다를 반복하다. 호흡이자 기이며 숨이자 신경이고 인식이자 득오의 과정이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내 몸과 몸 밖의 것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 어떤 삶의 가능성을 부단히 탐색하는 것이다. 산수화란 그런 그림이었을 것이다. 김범석의 그림은 산수화도 아니고 일반적인 풍경화 장르에 속하기도 어려워보인다. 오늘날 산수화란 존재하기 어렵다. 불가능하다. 문인이 부재하고 문인적 세계관이 이 땅에서 사라진 지금 산수화란 가능치않다. 산수화를 흉내낸 풍경화, 혹은 산수화를 그리고 감상했던 그 마음들을 동시대 풍경에 의탁해 조형적 차원으로 번안한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럼 김범석의 그림은? 한지에 먹과 호분, 모필, 그리고 부분적인 채색을 가해 그려낸 그림은 자신의 삶의 반경에서 만난 풍경들이다. 여주 근교가 그림 속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 풍경, 장소는 별다른 의미는 없어보인다. 매우 비근하고 일상적이며 흔한 풍경이다. 산과 들판, 숲과 나무, 학교 운동장, 덩그러니 서있는 작은 동상, 길과 계단이 있다. 그 어딘가에 서있는 사람들, 오후의 햇살, 그림자, 찰랑거리는 잎사귀들, 반짝이는 햇살, 모락거리는 열기, 적막감, 비와 눈과 연기와 안개가 그 사이로 덮쳤다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철저히 경험적인 풍경들이고 실존적인 세계인 셈이다. 걸어다니며 보았던 풍경이다. 그것은 눈이 아니라 몸이 더듬고 만지고 느끼고 마음이 마냥 적셔들어간 그런 풍경이다. 마음으로 차곡차곡 담아둔 풍경을 꺼내 그렸다는 인상이다. 그렇게 소요하고 바라보고 느끼고 기억해두었다가, 모필사생으로 남겨두었다가 문득 시각적으로 강하게 어필한 장면, 아니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과 감정이 복받치듯 올라와 상처처럼 남겨진 풍경을 다시 찾아 화면에 옮겼다. 중심으로 육박해 들어가 그렸던 풍경을 일으켜 세웠다.

검정과 분홍, 갈색을 주조색으로 깔고 있는 중층적인 이 그림은 일련의 순차적 과정이 뒤따른다. 우선 현장에 서는 일, 자기 몸과 신경의 모든 구멍을 열어두고 풍경앞에 서는 일, 그리고 호흡하듯 빨아들이는 일, 그 다음으로 그것을 작은 화첩에 즉발적으로 혹은 담담히 기록하는 일이다. 그는 현장에 나가 모필 사생 하는 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그의 그림은 모두 그런 사생의 결과물이다. 유근택이나 박병춘, 박능생과 같은 또래 작가들 역시 모필사생과 현장체험을 강조해온 작가들이다. 이들이 지닌 공유성이 분명 있다. 현장사생을 그토록 중요시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미술에서 내 몸의 체험, 경험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믿을 건 몸/나 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그것은 모든 관념, 이론, 개념을 지우고 살의 세계로 나가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 몸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중요한 것이 몸이라면 화가의 몸에서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또한 몸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 몸이 내 몸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각자 어떤 몸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 몸은 어떻게 형성되었단 말인다? 김범석은 자기 몸밖의 풍경을 관찰하고 느끼고 받아들였다. 그는 풍경을 가능한 깊이 흡입해내려 한다.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마치 풍경에 빨대를 꽂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림은 그 풍경을 빨아들인 상처로 얼룩져있다. 가시적인 화면이 아니라 시선을 모호하고 애매하게 한다. 시각적 정보가 거의 부재한 화면은 몇 겹의 레이어를 가지며 차오른다. 주룩주룩 흐른다. 그림에서 물 흐르는,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중력의 법칙 아래 물감들은 죄다 아래로, 바닥으로 하강하는 것이다. 마치 그림 속 장면을 대지가 강력하게 빨아들이듯이 말이다. 작가는 풍경 앞을 눈물처럼 막아선 정체모를 것들을 그리고자 한다. 풍경 위로 안개처럼 가득하고 아지랑이 처럼 아른거리며 비처럼 흐르고 눈처럼 덮이는 그 무엇을 그렸다. 칠하고 덮었다. 기이한 막을 펼쳤다. 저 풍경이 내게 다가와 전해준 떨림이나 울림, 언어화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액체성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이 예민한 정서와 감성의 과잉된 누출을 보여주는 그림이 너무 뜨겁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로서는 김범석의 그림에서 다소 과잉된 정서와 앞서가는 감정이 좀 가라앉았으면 한다. 그런 평정이 오히려 그에게 좀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김범석의 몸이 그린 이 풍경은 자연만물이 뿜어내는 모종의 기운과 자기 감정이 만나 불거진 순간을 기록하는 일이다. 화가는 보이지 않는 힘, 영기를 포착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몸, 감각이 남다른 이들이다. 그런 몸이어야 한다. 그렇게 가시적 존재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비가서적 힘을 포착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은 옛부터 화가의 일이었다.

그는 땅과 나무, 햇살과 그림자, 숲과 인공의 풍경에서 무엇인가를 감지한다. 감지하고자 열망한다. 자기 몸이 보고 느낀 풍경을 대상으로 해서 목탄으로 윤곽을 잡는 한편 까칠하고 투박해보이는 모필 선으로 그려나간다. 검은 그림은 소박하고 강직해보인다. 전체적으로 그림이 까맣게 탄 듯한, 잿빛 가득하다는 느낌도 있다. 그 사이로 감각적인 분홍과 갈색의 색상이 얼비친다. 그리고 넙적한 붓질은 옆으로 툭툭 지나가며 쌓이고 겹쳐져 화면을 덮는다. 속도감 나는 이 붓질은 시선을 유동적으로 만들고 화면을 일렁이게 한다. 칠한다기 보다는 뒤덮고 채운다는 느낌이다. 자기 감정을 쓰라리게 문지르고 있어 보인다. 사실 풍경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대기작용, 물기와 건조함, 햇살과 바람 그리고 그 풍경을 보는 이의 감정의 굴곡심한 주름들이 한데 겹쳐올라가있다. 그래서일까, 표면은 묘한 질감으로, 특이한 붓질의 맛으로 가득하다. 풍경을 보며 느꼈던, 돌연 동반하는 모든 감정과 생각들을 결국 평면위로 올리기 위해서 그는 질료적인 붓질, 또는 끈적하고 농도짙으며 액체성으로 흘러내리는 표면효과를 연출해냈다. 그래서 겹쳐가며 묘하게 베어나오는 호분의 맛은 묘사적인 측면이 아니라 보는 이의 감각을 흔드는 통감각적인 배려로 다가온다. 그 떨림과 멀미를 자아내는 흔들리는 화면은, 무수한 겹, 수많은 시간의 층이 만들어내는 묘한 환각들은 자연의 심비한 힘을 암시해주는 한편 그 풍경 앞에서 서있었던 작가의 한 순간의 떨림을 그렇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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