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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 사물들의 발화

박영택

사물들의 발화


사물은 실용적 차원에서 기능하는 물건의 역할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다. 사물은 도구로 부터 출발해 더 멀리 나아간다. 더러 심미적이고 완상적 존재이자 주술적 차원에서 기능하는 복합적인 존재가 또한 사물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길과 체취를 머금고 오랜 시간과 역사를 두루고 있는 기이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저마다 사물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누군가를 떠올리면 그, 그녀는 항상 사물과 한 쌍으로 다가온다. 그가 다루고 애용하는 조그마한 물건, 대상은 그의 분신이자 또 다른 자아다. 그것은 신비한, 거의 마술적인 얼굴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필요에 의해 혹은 다른 목적으로 여러 사물들을 수집한다. 그렇게 수집된 모든 사물은 추억과 향수, 부재와 기억, 시간과 역사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침묵으로 응고되어 있다. 한 개인의 서사가, 삶의 이력이 그곳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해서 사람들은 그 사물의 피부에 붙은 상처를 통해 상상한다. 사물을 통해 몽상하며 꿈을 꾸는 이들이 다름아닌 예술가다. 소소한 사물로부터 존재의 비밀과 유한한 생의 굴곡과 애틋한 아픔을 상기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최승희는 자신의 소유물인 작은 사물들로 모종의 상황, 장면을 연출한다. 이른바 레디메이드를 활용한 설치다. 그런데 그 설치적 공간이 흥미롭다. 작가는 캔버스를 겹쳐세운 후 그 상단면에 물건들을 올려놓았다. 혹은 캔버스 뒷면을 마치 서랍처럼 활용해 그 안에 집어넣었다. 캔버스는 순간 콘솔이나 서랍장, 좌대가 되었다. 인간의 몸 밖에 있는 세계나 의식 안에 자리한 것들을 담아내던 캔버스/화면이 실제 용기가 된 것이다. 사실 캔버스는 하나의 그릇에 다름아니다. 물감을 담아내며 이미지를 저장하고 시각적 대상을 저장하고 있는 그런 공간이다. 그렇게 공간에 놓인 것들은 자신의 일상과 함께 했던 작은 물건들인데 그것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는 상징적 오브제이자 매혹적인 존재이고 소중한 추억이 깃든 대상이다. 어느날 한 사물이 우연히 눈에 들어와 작가의 감수성을 건드렸다. 비로소 사물과 조우한 것이다. 이 사물의 발견은 이른바 물활론적 상상력으로 나아간다. 이제 사물들끼리 관계를 맺고 모종의 이야기를 발화한다. 주어진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다른 맥락에서 재배열되는 순간 그 사물들은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이 초현실적 이동, 배치의 다름이 사실 미술행위다. 작가는 작은 물건들을 건축적, 가구적으로 연출된 캔버스에 갖다 놓았다. 사물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를 사진으로 찍어서 다시 평면위에 안착시켰다. 입체가 평면으로 그리고 그 이미지가 다시 다른 화면위로 옮겨가는 몇가지 과정이 일어났다. 특히 화면에 촉각적 질감을 주어 흡사 벽면 같은 느낌을 만든 후 그 위에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과정을 거쳐 이미지를 밀착시켰다. 무채색 톤으로 마감된 화면은 실제 벽과 같은 마티엘을 지니면서 서있다. (이 벽면처리가 좀더 단호하고 날카롭게 구성된다면 그리고 사물의 연출이 완만한 상식적 내용을 뛰어넘어 흥미롭게 배치된다면 무척 좋아질 것 같다는 느낌이다.) 동일한 회색의 화면은 냉랭하고 차분하며 고독해 보인다. 더구나 그 바탕에 선명하기 보다는 흐릿하고 가라앉은 색채로 올라간 사물의 이미지는 더없이 적조하고 퇴락해 보인다.구체적이고 명확한 정보에서 빗나간 이 대상은 몽롱하고 아련한 감정을 부추키며 단순한 재현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사진이미지가 주는 명징성에서 빠져나가 적당히 탈색되고 날카로운 윤곽을 지운 상태에서 다분히 서정적으로 밀려드는 것이다. 그 사물들이란 몽당연필, 지우개, 주사위, 모래시계, 작은 노트, 필름 같은 것들이다. 작가의 주변에서 함께 해온 익숙하며 오래된 물건들이다. 그 물건들은 이 작가와 지내온 적지않은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그 사물을 바라보노라면 지난 시간이 묻어나고 잠시 망각되었던 순간들이 기적처럼 떠오르곤 한다. 사물은 이상한 통로, 매개다. 사물 그 어디에도 지난 시간은 실재하지 않지만 그곳을 보는 이의 기억 속에서 사물은 하나의 역사가 된다. 기억들은 이내 그 순간의 마음들을 열어젖힌다. 당시의 기억이란 결국 여러 감정과 심리의 상황성을 풍경처럼 보여준다. 작가는 그러한 마음의 풍경을 그려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단지 사물들의 연출, 오브제를 활용한 사진과 회화의 융합적 작품이란 선에서 머물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캔버스가 콘솔이나 좌대, 서랍이 되고 그 위에 배치된 일련의 사물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어떤 이야기가 들려올 듯 하다. 여러 층위로 포개진 마음들이 열렸다 닫히고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고 표상된 것과 잠재된 것들이 쌓여있다. 그런가하면 이 상징적 사물들이 한 자리에 함께 놓이는 순간 흡사 초현실적 조우가 일어나 모종의 문맥이 만들어진다. 관자들은 그 내용을 읽어나가도록 독려된다. 한 시선으로 보여지는 그런 사진이 아니라 차분히 읽어나가야 되는 사진이다. 보이는 것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 사물들을 통해 인간 내면의 깊숙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작품 하나하나가 소박하지만 비범한 은유로 자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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