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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선 / 길을 내다

박영택

길을 내다


한지선은 나무를 이용해 다채로운 변형화면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작은 나무조각들로 계단이나 잎사귀를 만들어 부착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렸다. 잎사귀의 섬세한 섬유질 결들, 건물의 외벽과 격자형 창틀, 그리고 시간의 흔적이 묻어있는 계단의 단면, 그림자 등을 그린 것이다. 기본 화면에 여러 조각들이 콜라주 된 형국이다. 그려진 부분과 입체로 얹혀진 부분들은 착시를 동반하면서 강한 일루젼을 자극한다. 더구나 실제로 드리워진 그림자와 그려진 그림자가 구분없이 섞여있다 보니 그 환영감이 어질하다.

아울러 화면 곳곳에서 관자를 행해 출렁거리며 튀어나오는 계단, 심지어 위로 말려 올라가면서 어두운 바닥을 보여주는 계단들의 ‘돌진’은 기이한 힘을 안긴다. 근작은 이전 작업에 비해 더 극적이고 화려하고 복잡하며 에너지로 충만해 보인다. 벽과 계단을 보여주던 풍경화에서 식물과 계단이 얽혀 이루어 내는 상황성이 강조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화면에는 자연/식물과 허공/하늘이 계단과 함께 희망, 생의 욕망, 꿈 같은 것들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다. 건축물이 현실계를 암시한다면 계단, 하늘은 이상적인 세계상이며 이 둘은 항상 하나로 얽혀있다. 작가는 주어진 현실에서 어렵게 계단을 가설하고 식물 같은 생명력을 꿈꾸고 사방으로 확산되고 분산되어 나가는 힘을 추구한다. 그렇게 읽혀진다. 화면 밖으로 무수한 계단이 메두사의 머리처럼 혹은 혓바닥, 촉수처럼 돌출되어 다가온다. 그 계단은 실제 계단이 아니라 작게 축소된 모형에 유사하다. 화면에 자리한 그림(허상)이자 동시에 그로부터 뻗어 나와 허공에 떠있는 입체(실제)로서 자리한다. 화면과 공간에 걸쳐있는 기우뚱한 계단이다. 어딘지 현실과 이상 사이에 겨우 존재하는 위태로운 실존이 연상된다. 계단은 평면에 기생해 외부로 나와 있지만, 그렇게 실재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평면에 저당 잡혀있다. 아울러 끝없는 탈출, 혹은 비상이랄까 희망이나 삶의 욕망 같은 것들을 시도하지만 그것은 일시 멈춤처럼 공중 부양으로 떠있다. 딱딱하게 정지되어 있다. 활력적이자 생동감 있는 담쟁이 마냥 뻗어 나가다 문득 멈춘 자리에는 기이한 정적이 감돈다. 그 최후의 지점, 가장 앞으로 튀어나온 계단의 단면이 눈을 찌르듯이 서있는 것이다. 자꾸만 그 지점에 나를 위치시키고 싶어진다.

아니 나는 그 자리에 그렇게 서있는 작가의 몸을 본다. 이른바 엣지, 모서리에 자기 생을 올려놓고자 하는 마음 말이다. 그것은 산수화에서 접하는 정신이다. 다리를 막 건너 산 속으로, 혹은 그곳에 위치한 집으로 향하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는 이에게 안기고 그림 속으로 사라지려는 그 자리도 역시 ‘엣지’였다. 선인들은 그림을 보면서 그 자리에 자기의 몸을 올려놓고자 했던 것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 절묘하게 균형을 잡아야만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 묻어난다. 현실계의 벽에 가상의 공간, 이상적 세계상을 순간 부려놓고 그 맞닿은 지점(엣지)에 가만히 자기 몸을 위치시킨다. 그렇게 현실과 이상 사이에, 모서리에서 버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현실로 쑥 들어가면 속악한 속물이 되고 현실로부터 떠나면 삶은 끝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은 그 접점에서 사는 것이라는 메시지다. 한지선의 그림에도 그런 느낌이 슬쩍 번져있다.

변형 화면은 그림과 입체를 동시에 거느리고 벽 위에 돌출 되어 있다. 회화이자 부조이고 그리기와 만들기가 혼재되어 있으며 화면은 여러 층위의 공간/시간이 겹겹이 쌓여있다. 정면에서는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서로 다른 깊이, 층차를 지니고 있다. 표면에서는 눈에 띄지 않은 그 다른 깊이, 복잡한 내부는 겉과는 다른 또 다른 세계상이다. 이중의 세계를 한 몸에 지닌 화면은 벽에 붙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벽으로부터 부단히 나와 보인다. 나오려는 힘으로 가득하다. 근작은 이전에 비해 훨씬 다이나믹하고 스펙타클하게 진행되고 있다. 근데 이 지점이 다소 수공적인 장식성이 상승하는 접점이기도 하다. 만드는 재미와 노동의 순간들이 화려해지는 부분이 조금 가라앉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한지선의 화면은 일루젼이자 즉물적인 표면이고 조각/부조이자 설치다. 그리고 벽에 기생하지만 그 벽으로부터 벽 주변의 공간을 흡입해내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것은 주어진 화면 밖의 세계에 대한 열망이자 그것과 접촉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복잡하게 얽혀진 현실계에서 꿈꾸는 이상에 대한 강한 희구이기도 할 것이다. 화면은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 상당히 복잡하며 일시점 아래 통어되지 않고 분산적이다. 그래서 홀연 시선은 당혹스러울 수 있다. 집중을 흩트리고 특정 장소에 시선을 가두지 않는 편이다. 시선은 화면 전체를 더듬는다. 촉각적인 눈이 되었다. 그리고 어떤 이미지를 안긴다기 보다는 모종의 상황성, 힘이 우선적으로 감지되는 편이다. 무엇보다도 중심에서 밖으로 확장되는 탈평면적인 힘이 강하게 감지된다. 생명력이랄까, 원초적인 에너지도 그에 동반한다. 그래서인지 주어진 화면 전체가 묘한 생명체를 연상시킨다.

근작에서 자주보이는 식물이미지는 식물적 생장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편이다. 부드러운 유선형의 식물 잎사귀에서 딱딱하고 오래되어 보이는 계단이 증식되어 산포한다. 또 다른 잎이나 줄기처럼 번식한다. 그렇게 계단들은 화면 안 이곳저곳에서 예측할 수 없이 밀려나간다. 화면 안쪽에는 이전 작업에서 빈번하게 출현한 건축물이 더러 자리한다. 수직으로 치솟은 남근적 건물은 구체적인 건축물이라기 보다는 관념적이고 기호화된 건축이미지로 자리했다. 보편적인 도시건축물, 빌딩 등을 떠올릴 때 흔하게 접하는 이미지다. 생각해보면 한지선의 작업 과정 자체도 다분히 건축적이다. 사실 계단 역시 건축에 종속된 부속물이다. 작가에게 계단이미지는 건축물과 길, 희망과 꿈, 한 개인의 삶의 역사와 이력 등등을 함축하고 있다.

그 차갑고 딱딱한 그 건축물, 계단을 식물/자연이 죄다 감싸고 있다. 내부에서 계단을 회임하고 출산하듯 내놓는다. 부드럽게 풀어주고 이완시킨다. 식물은 도시의 차가움, 불임, 냉랭함을 몸으로 매꿔 나가는 존재다. 모든 빈틈을 녹색으로, 풀로 채워나간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그 같은 식물의 생명력에 놀라움과 위안을 얻을 것이다. 작가에게 이 식물이미지는 도시 공간, 주어진 현실에서 꿈꾸는 희망의 은유인 듯 하다. 그것은 계단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근작을 통해 작가는 서로 이원적인 것들을 부드럽게 대립시키고 모든 것을 감싸안으면서 길/계단을 놓고 있다. 수직과 직선, 딱딱함을 식물성으로 감싸안으면서 나아간다. 부드러운 매혹성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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