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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링: 익살스런 포스터 섬뜩한 메시지

김종근





익살스런 포스터 섬뜩한 메시지


미술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처음에는 어떻게 존재했을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 낙서화다. 고대 동굴의 벽화나 이집트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낙서 그래피티(graffiti)가 예술로서 등장한 것은 제2차 대전 이후다. 사이 톰블리, 잭슨 폴록, 장 뒤뷔페가 낙서의 표현법에 흥미를 보였다.

60년대 말 랩음악과 브레이크댄스를 즐겼던 반항적인 청소년과 흑인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뉴욕 브롱크스 벽면과 지하철을 속도감 있는 이미지와 문자로 도배했다.

도시미관의 골칫거리였던 낙서가 돈이 되어 현대미술로서 자리잡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스키아와 키에스 헤링 덕이었다.

1958년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난 헤링은 어린 시절 워싱턴의 미술관에서 앤디워홀의 마릴린 몬로 작품에 빠졌고, 피츠버그 상업미술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래픽 미술에는 그다지 흥미를 못 느꼈다. 19세 때 첫 전시를 가졌던 그는 꿈을 위해 뉴욕으로 왔고 거기에서 클럽의 음악가와 퍼포먼스 바스키아와 앤디워홀 등을 만나게 된다.

특히 전광판의 글자 예술가 제니홀처의 영향을 받은 그는 예술가의 근본적인 자립정신을 주장했고, 선만으로 이루어진 그래픽 표현의 검은 종이에 흰 분필 낙서그림으로 주목을 받았다.

지하철 벽에 정신없이 휘갈긴 낙서파들의 이 욕설은 뉴욕의 출·퇴근 시민들을 향한 자유로운 통신이었고 이들은 인종차별, 핵전쟁에 대한 공포 등의 사회적인 발언들을 거침없이 담아냈다. ‘개인감정의 공공에 대한 표출’이었다.

헤링은 속도감 있는 간결한 선과 필치, 원색적인 한두가지 컬러로 그래픽 디자인을 미술로 끌어올렸다. 그는 아이콘화된 모습의 대명사로 스타가 되었고, 뉴욕의 전설적인 화상 레오 카스텔리 같은 화랑들은 앞다퉈 그를 초대했다.

미국·이탈리아·브라질·독일·프랑스·벨기에 등 전세계의 벽들이 그를 필요로 했고, 그는 수십점의 공공조각을 남겼다. 그는 진정으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라 말하고, 사랑을 나눌 경우 반드시 콘돔을 쓸 것을 갖가지 그림 속에서 수없이 강조했다.

‘safe sex’라는 이 작품은 에이즈 퇴치를 위한 안전한 섹스를 강조한, 글씨 그림의 대표적 작품이다. 움직임을 표현하는 간결한 선과 남자끼리의 섹스는 절대 안 된다는 자전적인 충격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그림으로, 욕망을 억제하라는 선동적인 포스터 작품이다.

그러나 1985년 그는 에이즈에 걸렸다. 죽는 그 순간까지 모든 열정을 에이즈의 위험과 퇴치를 알리는 데 힘썼고, 죽기 전에는 헤링재단을 만들어 에이즈 퇴치와 전위예술가들을 도왔다. 그는 1990년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인생을 예술, 예술을 인생이라 하며 섹스의 죗값을 혹독하게 치렀던 예술가의 종말이었다.


스포츠칸 2006.1.9 │미술속의 에로티시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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