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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 세기의 천재화가 청색으로 인생을 말하다.

김종근

모든 예술가들은 색으로 말한다. 이것은 모든 예술가들이 그들만의 좋아하는 색으로 자연을 표현하고 상상의 세계를 상징하기 위해 색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1790년에서 1810년 사이에 색채론을 쓴 괴에테는 엄밀하게 “사물의 본질을 곧바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헛된 일”이라고 지적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에게 있어 색채의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예술가는 색채를 통하여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마티스에게 있어 빨강이 중요한 색이듯이 . 쿠스타프 클림트에게는 황금색이, 피카소에게는 중심색이 파랑색이다.

그렇다면 피카소는 어떻게 그의 작품 속에서 파랑색을 담아냈는지를 살펴보자. 물론 피카소라는 위대한 예술가의 어느 한 세계를 밝힌다는 것은 흥미롭기 도하지만 당혹스럽기도 하다.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 모든 장르로 예술세계와 색채를 모두 섭렵하였기 때문이다.
이 유명한 거장은 언제나 고독-그의 조국, 스페인의 고독-을 고수해왔다. “고독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나는 나 스스로 고독을 지켜왔다.” 고 하면서 작품을 창조한 후에 그는 작품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리하여 피카소의 예술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 시대의 체험, 곧 인류의 체험으로 평가 된다.

피카소에게 있어 색채
파블로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 남부의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미술교육의 중심지였던 그곳에서 회화를 가리키는 교사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비범한 재능에 놀라, 자신의 붓과 물감 팔레트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 아들의 미술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일요일마다 투우장에 데려가 그림을 그리게 하는 등 일찍부터 화가의 길로 안내했다. 그가 투우장을 자주 찾은 사실들은 후에 투우장면과 그림 속에 등장하는 붉은 색채로 확인된다. 다른 화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피카소에게 있어서 그가 자란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색채의 영향이 거기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파란색을 즐겨 그렸지만 전적으로 청색으로만 그린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장밋빛 시대도 있고 니그로 시대도 있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 많은 색 중 단연 청색을 가장 좋아했다. 그는 청색을 통해 세계와 사물을 보았고 청색 옷을 입고 다녔다. 피카소는 청색이야말로 색 중의 색이라고 고백하였으며 그는 이 청색으로 오랜 기간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과 주제를 탐구하고 발전시켰다.




이미 열네 살에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렸다고 한 그의 주변환경 바로셀로나는 유럽의 현대적 경향들에 개방적이었고 문학, 건축, 조형 예술 분야에서 가장 전위적인 사조들이 모두 들어와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선술집 ‘네 마리의 고양이’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에서 피카소는 그의 친구 화가 카사헤마스와를 만난다. 이것을 인연으로 1897년에 피카소는 드나들던 이 카페에서 그의 첫 개인전을 가졌다. 100여 점의 인사들의 초상화 그림을 선보이는데 비록 16살의 처녀전이긴 하지만 이 전시회는 그가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 기록으로 남는다.

1900년 19살 그는 친구 카사헤마스와 함께 파리로 가 처음으로 그림 3점을 판다. 이듬해 파리를 다시 찾은 피카소는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막스 쟈콥과 함께 궁핍한 생활 속에서 좌절감을 나누면서 우정을 쌓았다. 1901년 21살에 그려진 <비둘기를 안은 아이>는 피카소의 청색시대 이전의 작품으로 청색시대를 여는 첫 번째 작품으로 불려진다.

프랑스 회화를 연구하고, 드가로부터 인물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간결한 윤곽선으로 청색과 녹색의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려낸 어린 시절의 추억인 이 그림에서 그는 자신의 양식적 변화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가 청색시대로 나아가는 데에는 빈곤과 창작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1901-2월 17일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파리에서 자살을 하고 몇 달 후 피카소의 그림 64점이 파리의 볼라르 화랑에서 전시된다. 막스 쟈코브와의 첫 만남이 이때 이루어진다.
나중에 장밋빛 시대의 그림은 그가 모두 구입 할 정도로 볼라르는 피카소의 전문 화상이 되었다. 피카소는 두 번째 체류시기에 그의 초상화 두 점을 그렸다. 친구 사바르테스의 초상이나 기타 연주나 또는 1903년의 <늙은 유태인>등과 같이 고독한 인물들을 그린 청색 시대의 작품들 중 일부는 파리에서, 또 일부들을 그린 청색 시대의 작품이 그것이다.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제작 된 사실은 이 모델이 엘 그레코의 인물들을 닮았음을 말해준다. 이 스페인 매너리즘의 거장과 피카소의 관계는 청색 시대 초기에 제작된 화가 카사헤마스의 장례 장면에서 드러난다. 이 그림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처럼, 지상과 초월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피카소는 자신의 화풍인 단색조의 ‘청색’에 뛰어들기 위해 툴루즈 로트렉으로부터 물려받은 화려한 화법 그가 다루는 주제의 배경- 카페와 파리의 카바레 등이었다.
그의 성공은 파리 화단에서 어느 정도 보장되었으나 청색’의 그림들은 사람들로부터 거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는 바르셀로나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1903년, 이곳에서 청색 시대를 대표하는 우의적인 작품<인생>을 제작한다.

피카소가 프랑스 화단에 데뷔한 1900년에서 1906년 이래 그의 상당수의 작품은 바로 셀로나 모더니스트의 영향과 퇴폐적인 상징주의자의 영감과 세기말의 취미가 어우러져 있음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특히 인물들에서 보이는 색조의 배경이 특징적이다. 보편적으로 청색시대와 장밋빛 시기를 명확하게 구별하기란 쉽지 않지만 색채는 그에게 가장 이상적인 도구였다. 초기의 파란색에서부터 말년의 경쾌하고 에로틱한 색채에 이르기까지 그의 색채는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그러나 정작 피카소에게 청색 시대가 나타나고 출발은 “내가 청색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카사헤마스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부터이다”라고 고백 했다.
카사헤마스는 환상적 기질에 문화적 소양이 더 깊은 친구였는데 실연에 처해 사랑하던 여인을 죽이려다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청색풍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피카소에게 있어 색채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1890년대 상징주의 화가들은 청색의 우울함을 좋아했다고 했다. 보편적으로 초기 피카소의 색채는 청색으로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형태와 형태 사이의 변화를 포기하고 가장 단순한 형태의 요소로 화면을 구성하고 색채를 엄격히 제한하여 갈색, 황토색, 녹색만을 일부 사용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작품을 특징지었던 강렬한 색채와 툴루즈 로트렉의 영향도 사라졌다. 강한 빨강색조와 노랑 색조, 녹색조들은 따뜻한 갈색조의 배경으로부터 명확히 구분되어 평면화 되어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인생>은 그러한 피카소의 내면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청색 시대의 가장 큰 대작이다. 청색 시대란 이름은 1901년부터 1904년에 이르는 시기의 작품들이 차갑고 우울한 청색을 주조로 하고 있는데서 붙여진 것이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비관주의, 실의와 절망 등을 담아내고 있다. 1901년에 그려진 <자화상>,에서도 20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나이가 든 텁수룩한 수염과 푹 꺼진 볼과 넋나간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고독과 고뇌를 바라보듯 묘사하고 있다. 주제도 대개 빈민들, 거지, 장님, 거리의 악사, 절망한 여인 등이다. 이들의 불행에 대한 묘사는 생략된 드로잉과 어두우면서 차가운 색조로 삶의 모습을 삶의 제한된 색채로 강조되었다. 이 그림은 그 시절 피카소의 세계관을 요약한 하나의 알레고리로 불리는데 모든 회화적, 상징적 특성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알프레드 바가 말했듯이 그래서 ‘의문에 찬’ 작품임은 틀림없다. 이 작품의 가장 피카소다운 특징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표현하는 간결성이다. 청색 시대의 모든 작품은 인간의 불행과 사회적 절망의 모습들을 고전주의적으로 승화시키며 인물들의 엄격한 표정도 색채의 특성과 완벽하게 어울린다.

<인생>의 구성은 한쪽에는 한 쌍의 나체인물이 서있고 맞은편에는 아이를 안은 모습이 있다. 이것은 마치 부부를 향해 삶에 대한 절망을 가리켜 주는 듯하다. 피카소는 이 절망을 격조 높게 표현하고 있다. 피카소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이 오른쪽 초췌한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있다. 그는 이들 부부에게 사랑과 해산의 황금 같은 순간들이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특히 불과 25세였던 피카소는 이 작품에서 회화 수단에 대한 완벽한 숙련을 보여주는데 동시에, 그러한 이 불가사의한 삶의 절망감은 시인 릴케가 “한데 이들은 누구인가 / 나에게 말해다오. 이 유랑의 무리들 ...한번도 만족하지 못한 의지로 시달리는 이들.”처럼 노래한 <두이노의 비가>에 비유된다.

이 대표적인 청색의 공간을 그는 다림질 하는 여인에서 보여준다. 청색시대를 대표하는 이 작품은 피카소가 인간의 불행과 비극을 인물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했던 작품이다 . 물론 이 테마는 <다림질하는 여인>과 같은 주제를 다른 관점에서 그린 에드가 드가의 <두 세탁부> 작품과 비교 된다. 이 작품의 특성은 그가 과거의 거장들로부터 모사하듯이 엘 그레코의 영향을 보여주는데 인물의 길게 늘어뜨린 비정형적인 인체와 경직된 실루엣은 피카소가 일찍부터 존경했던 스페인의 거장으로부터 온 것이다. 피카소는 노동의 고통이라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서 여인을 묘사하고 있으며, <다림질하는 여인>을 엘 그레코의 성자나 순교자들과 다름없이 숭고한, ‘인간사회의 고귀한 순교자’로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절제된 형태와 색채는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조화이다.

이외에도 1900년도의 <거리에서의 포옹>, 1901년의 친구 <사바르테스의 초상><여인누드>와 청색시기 최초의 작품으로 불리는 <스카프를 쓴 여인>, 1902년의 <바닷가에서의 모성> , 1903년 피카소가 매달렸던 주제인 <맹인의 식사>의 청색으로 뒤덮힌 인물묘사 등 대부분이 청색을 주조로 한 작품들이다. 또 하나는<곡예사 가족>이란 작품으로 장밋빛 시대로의 전환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인간의 불행을 표현한 청색 시대의 어두운 이미지가 연한 장밋빛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이다.

파리 서커스단 근처에서 머물고 있었던 피카소는 곡예사들의 삶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 소외되고, 고독한 인간들의 모습은 피카소에게 인간사회의 새로운 단면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피카소에게 청색은 인간이 갖는 슬픔이나 차가운 밤을 나타내는 고독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당시 그의 현실이고 인간의 삶이었다. 겨울 바로셀로나에서 그린 이 궁핍한 사람들의 비극은 추위 속에서 청색 옷을 입고 파란물가에 맨 발로 서있는 한 가족의 소외된 삶을 잘 보여준다.

피카소는 석유등의 조요한 빛 속에서 작업하기를 좋아했고 초기에 파라핀 염료가 없을 때는 착색제를 대신쓰기도 했다. 초기 청색 회화시절 한 손에 붓을 들고 다른 손에는 촛불을 든 채 그려 약한 불빛이 그가 사용하는 인디고 블루를 더 강하게 할 정도였다. 그의 이런 파란색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을 때 더욱 강력하게 화면에 나타났다. 훨씬 후기에 그려진 장미꽃이 있는< J.R.의 초상>(1954)의 블루도 그러하다.

피카소는 여러 가지 개인적 어려움과 슬픔을 겪었다. 그는 오랫동안의 동반자였으며 그의 두 아이들의 어머니인 프랑스와즈 지로와 헤어져야만 했다. 또한 가장 가까운 친구들 몇 사람을 잃었다. 이 고통스런 시기에 그는 자클린느 로크의 초상화 두 점을 완성 했다.

젊은 여인의 투명한 아름다움과 고전적인 자태는 이후 내내 피카소를 사로잡게 되는데 단순하고 푸른 바탕을 배경으로 향기로운 장미가 밝은 색조로 고전적 옆모습을 보여준다. 뛰어난 초상화 표현으로 고전적 기법과 따뜻한 인간미를 더한 이 작품으로 피카소는 초상화의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

1904년 <다림질하는 여인> 의 예에서 볼 수 있는 청색 시대의 우울한 세계는 사라지고, 이제 피카소는 그가 사랑한 여인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색채에 접했지만, 그는 여전히 파랑색에서 완전하게 탈줄 할 수 는 없었다. 1918년에 피에로, 1921년에 세악사. 1930년에 멱 감는 여자, 1942년의 생선모자를 쓴 여인. 1945년 주전자와 촛불 에나멜 냄비가 있는 정물 등, 해변의 여인 등 청색은 그의 회화에 중심 색으로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인생에 대해 비관적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그는 인생을 찬미하기 시작한다. “나는 물체를 다루듯이, 회화를 다룬다. 만약, 그림 속의 창이 눈에 거슬리면, 나는 내 방에서 그렇게 하듯이 창을 닫고 커튼은 내린다.”. “나는 나의 시대를 그렸을 뿐이다” 이렇게 그는 자기 시대를 관찰하고 증언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우여곡절과 희망과 좌절을 가장 치열하게 화폭으로 살아낸 세기의 천재였다.

그는 언제나 그 시대의 진실과 진정성을 포착하려 했고 “예술이란 진실을 깨닫게 하는 거짓말이다.” 라고도 선언했다. 7명의 여자를 거느리며 15만여 점의 작품을 제작한 92세로 미술의 역사를 바꿔놓은 천재화가의 블루, 그것은 그의 인생과 자화상이었다.

월간중앙 2006.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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