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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익중론 / 밥을 잘 비비는 사람, 강익중

윤진섭

Ⅰ. 화가의 가계(家系)와 유전인자의 형성


강익중은 1960년 9월 11일 충북 청원군 옥산면에서 부 강대철(1934-1989)과 모 정양자(1933- ) 사이에서 삼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강익중의 집은 서울에 있었지만, 어머니가 해산을 하러 친정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부친 강대철은 영등포에서 약국을 경영하다가 대일제약이라는 회사를 인수해 한때는 사업을 번창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강익중이 네 살 되던 무렵 회사가 부도를 내기에 이르고, 그는 사업의 부침이 이는 가운데 감수성이 예민한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강익중은 유년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려 친지들로부터 칭찬을 자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익중은 조신시대의 화가 인제 강희안(1417-1464)과 표암 강세황(1712-1791)의 후손이 아닌가. 한국의 미술사에 거장으로 등재돼 있는 이 두 화가의 유전자가 강익중의 피 속에 녹아있다고 가정할 때, 그런 그가 화가로 입지를 다진 일이야말로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이겠기 때문이다.


강익중은 1980년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미술계열에 들어갔다. 예로부터 홍익대학은 미술로 유명한 곳이다. 한국 전위미술의 핵심을 이루는 작가들을 배출한 곳이 바로 홍익대학이 아닌가. 1950년대 후반의 앵포르멜 운동을 비롯하여 1967년의 청년작가연립전, ‘A.G’와 ‘S.T’ 등 한국 현대미술사를 형성하는 쟁쟁한 그룹과 미술운동들이 홍대 출신의 작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이들 그룹 속에는 서울대 출신의 작가들이 일부 가입해 있었지만 주류를 이룬 것은 역시 홍대였던 것이다. 이처럼 홍대 출신 작가들이 한국의 전위미술 운동을 추진해 나갈 때 핵심을 이룬 것은 실험의식이었다. 전위 운동은 무엇보다 그 추진 주체인 작가들이 왕성한 실험정신을 갖추고 있을 때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홍대는 그런 작가들의 집결장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 홍대에 강익중이 들어갔을 때 그는 선배들이 다져놓은 전통에 기대어 미술에 있어서 실험정신을 추구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당시 입학 동기로 곁에서 그를 지켜본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회고에 의하면, 그러나 강익중은 그다지 학교생활에 큰 재미를 붙이지 못 했던 것 같다. 이주헌은 당시를 회고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강익중은 198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미술계열에 입학했다. 꿈에 그리던 화가의 길에 성큼 다가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미술학도의 생활은 기대했던 것보다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교과 과정과 교육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다. 교수들도 학생들에게 다양한 미술 흐름을 소개하고 개성적인 표현을 하도록 격려하기보다는 한 가지 흐름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1)


여기서 ‘한 가지의 흐름’이란 무엇인가. 짐작컨대 당시 유행하던 흑백 단색화가 아니겠는가. 1970년대 초반부터 단색화를 주도한 박서보를 비롯하여 하종현, 최명영, 서승원 등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홍대 회화과는 강력한 실험의식의 산실인 반면, 한편으로는 추상 일변도의 흐름이라는, 획일화의 폐단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교육 현실에서 일부 개성이 강한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학생들이 각자가 지닌 고유한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도를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자의 소임이라고 할 때, 작가들이 교육을 맡을 경우의 폐단은 이런 객관적인 거리의 확보가 어렵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개성의 난투장과도 같은 홍대의 경우,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싸움은 결국 기(氣) 싸움에 다름 아니다. 작가로서 성장하고 싶으면 조용히 학교생활을 마치고 미술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워 나가거나 아니면 재학 중일 때부터 강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다. 원래 조용한 성품인 강익중은 훗날 스타급 작가로 성장한 그를 교수들도 기억을 잘 못할 정도로 무난한 학창생활을 마감했다.


강익중은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1984년에 도미(渡美)하여 프랫 인스티튜트에 들어갔다. 다인종에 다문화가 주류를 이룬 세계 미술의 심장, 뉴욕에서의 생활은 강익중에게 화가로서 입신출세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화가의 영혼을 뜨겁게 만드는 뉴욕은 모든 것이 가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생활을 위해 고단한 하루를 살아야 하는 곳이다. 가난한 예술가에게 그곳은 천국이기도 한 동시에 지옥이기도 하다. 강익중도 생존하기 위해서 여러 일을 해야만 했다. 식료품점 점원에서부터 시계 노점상, 중국집 점원에 이르기까지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3인치짜리 정방형 작품들은 그 와중에서 생긴 부산물이다. 당시 강익중에게는 시간이 늘 부족했다. 학교에서 미술 공부하랴 직장에서 아르바이트하랴 온통 바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이 크기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는 집과 직장 사이를 지하철로 이동했는데, 그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 이 크기의 작품을 생각해 낸 것이다. 3인치에 해당하는 7.62센티미터는 손아귀에 넣고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아주 적당한 크기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 있는 동안 틈틈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렇게 해서 늘어난 숫자가 상당수에 이르렀다. 강익중의 전시는 보통 7,000점 혹은 1만 4,000점 정도나 되는 쪽 그림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보통 노작(勞作)이 아니다. 어떤 것들은 딱딱한 합판에 일일이 조각도로 판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두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강익중은 일상생활에서 작품의 소재를 얻는다. 미국에 정착한 뒤 영어공부를 하면서 쓴 단어나 문장들도 작품이 되었다. 종이에 파란색과 빨강색 볼펜으로 쓴 문장들이 3인치 크기의 작품으로 둔갑을 했다. 마치 성조기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들은 나중에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된 바 있다. 영문이나 한글, 한자 등 다양한 언어가 동원되었는데, ‘happy frog’, ‘happy bread’, ‘happy happy sock’가 같은 ‘happy’ 시리즈를 비롯하여 ‘언젠가 나는 나를 떠날 것이다’와 같은 문장들이 등장되기도 한다. 당시의 작품에 대해 나는 그의 전시에 관한 한 리뷰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그가 그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징과 기호, 이미지들은 자신이 직접 선택한 허다한 오브제와 함께 강익중의 의식의 흐름을 엿보게 해 주는 단서들이다. 3인치짜리 캔버스 하나하나는 마치 영화 속의 정지화면처럼 독립적이면서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잘 짜여진 드라마의 부분을 이룬다. 그것들은 다인종(多人種)들이 모여 숨쉬며 살아가는 거대도시 뉴욕이 뿜어내는 복합문화에 대한 훌륭한 주석(註釋)이다. 흑백의 인종차별, 자선과 갈취, 굶주림과 극도의 풍요가 공존하는 미국 사회의 이면이 강익중 특유의 풍자에 의해 재단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에 대해 그가 바라보는 국외자적인 시선은 객관성을 띤다. 최근 강익중이 미국에서 급부상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작품이 지닌 객관적 시각이 한 몫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화상을 객관적으로 그려낼 수 없는 사회가 한 이방인에 의해 발가벗겨졌을 때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굶주린 예술가를 위한 식당 안내에 대한 조사>라는 제목의 강익중 작품은 현대미술의 메카로 알려져 있는 뉴욕의 어두운 단면을 을씨년스런 어조로 전해준다. 그것은 지난 날 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2)


강익중이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얻는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의 무궁성과 무한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솟아오른다. 현실에서 채집한 각종 소리들은 일종의 구체 음악처럼 설치작업 속에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 그리하여 원래 시각적일 수밖에 없는 미술의 영역에 청각적인 요소를 결합한 것이다. 그것은 예술 장르의 혼융이자 탈장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Ⅱ. 세계를 내다보는 창(窓)으로서의 쪽 그림


강익중의 쪽 그림은 세계를 내다보는 '창(窓)'에 관한 비유다. 1996년, 조선일보 미술관, 학고재, 아트스페이스 서울 등 세 군데의 갤러리에서 동시에 열린 그의 첫 귀국전은 여러 면에서 볼 때 기념비적인 전시회였다. 백남준과의 2인전으로 열린 코네티컷 소재 휘트니미술관 챔피언 분관 전시회(멀티플/다이얼로그, 1994)의 여세를 몰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그의 쪽 그림에 대해 당시 한국의 언론은 일제히 그의 작업을 대서특필했다. 비록 백남준의 첫 귀국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화가로서 강익중의 존재가 드디어 한국에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발행된 개인전 카탈로그에 한 장의 흥미로운 사진이 실려 나의 관심을 끌었다. 한 일본인 사무라이가 나막신의 볼록 튀어나온 바닥 면을 맞붙여 경치를 살피는 장면인데, 망원경의 역할을 하는 나막신의 모양이 격자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강익중의 격자 캔버스들은 화가 자신이 바깥을 살피는 창의 구실을 하고 있다. 거기에는 작가 자신이 일상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이미지와 사물, 그리고 사건들이 다양한 형식을 통해 기록되어 있다. 거리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지하철에서, 시장이나 음식점에서 보고 들은 자잘한 이상의 파편들이 작가 특유의 위트와 풍자로 이미지화되어 캔버스에 그려지는 것이다.


강익중은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작은 캔버스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교신을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처럼, 그리고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W.W.W)’이 암시하는 바, 폭넓은 세계와의 교류를 위한 거미줄처럼 강익중은 미술을 통해 세계의 어린이들과 교류한다. 2002년 유엔본부 방문객 로비에 설치된 <놀라운 세상>은 1999년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 헤이리 아트밸리에서 열린 <십만의 꿈>에 이어 열린 어린이 참여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 강익중의 작업실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어린이 그림들이 수없이 쌓여 있었다. 당시의 그는 비단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전시기획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이 보는 고유의 창들을 팩스와 인터넷을 통해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인 창들은 하나의 전시로 조직되고 그것이 다시 관람객들에게 소개되는 순환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Ⅲ. 백남준과의 만남과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 수상


백남준은 평소 자신의 성공의 이면에는 요셉 보이스와 존 케이지가 자리잡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강익중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평소에 강익중을 아들처럼 아꼈던 백남준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과연 그의 성공이 가능했을까 하는 가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백남준과 가진 휘트니미술관에서의 전시는 미국에서 그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사건은 1997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의 특별상 수상이다. 당시 오광수 커미셔너는 강익중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 참가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 그에게 특별상을 안겨주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백남준과의 휘트니미술관 전시와 베니스비엔날레에서의 특별상 수상을 계기로 날개를 단 강익중은 그 후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면서 성가를 더욱 높이게 된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 낳은 산물인 작은 크기의 쪽 그림이 날로 증식하여 마치 바이러스처럼 그 영역을 넓혀가기에 이른 것이다. 강익중과 대학 동기인 이주헌은 그가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훗날 그가 어린이들이 참여하는 전시를 마련하고 세계의 어린이들과 교류를 하게 된 계기도 그의 이런 성격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어린이는 어린이를 좋아한다. 어린이들은 투명한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며 소통을 한다. 그렇다고 할 때 강익중이 벌이는 어린이 상대의 전시는 세계를 잇는 가교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어른이 중심이 되는 힘의 상징으로서의 선형적 체계가 아니라 어린이 중심의 ‘리좀적(rhizome)’ 사고에 속한다. 땅속줄기처럼 잔뿌리가 난마처럼 엉겨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무한 확장의 세계, 그 구조는 놀랍게도 현재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페이스북(Facebook)과 트위터(Twitter)로 대변되는 소셜 네트워킹을 연상시킨다. 사이버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이 사회적 관계망을 강익중은 이미 그 이전에 작은 쪽 그림을 통해, 그 순수한 창의 세계를 통해 일찍부터 실천해왔던 것이다. 이 참여 프로그램은 작가 위주의 예술 활동에서 관람자가 주인이 되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헤이리 아트밸리와 유엔 건물에서 실험된 이 참여 프로그램은 향후 그 규모나 영역 혹은 매체의 변화를 거쳐 점차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Ⅳ. ‘놀라운 세상(Amazed World)’을 위한 상상의 행진곡


강익중의 설치 작업을 보면 그의 기민한 상상력에 놀라게 된다. 그것은 작은 씨앗이 자라 나중에는 큰 밭을 이루듯이 바이러스들이 증식한 결과다. 꿈을 품고 도미하여 각고의 노력끝에 오늘의 그를 이루었듯이, 강익중의 수 천 수 만 점에 이르는 설치작업은 참여자들의 애정이 쌓인 결과물이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참여자의 정성과 애정이 없다면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강익중은 훌륭한 그룹의 리더라 할 만하다.


강익중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한국적인 소재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달항아리와 한글에 대한 애정은 날이 갈수록 각별해져 가고 있다. 백범일지에서 문장을 인용한다거나, 1.2미터 사이즈의 캔버스를 조합한 광화문 가림막 설치작업<광화에 뜬 달, 2007>은 그 예들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등 백범일지에서 인용한 글자들이 조합을 이룬 작품(2007)은 그의 생각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지금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개관 4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강익중의 ‘산에 오르다:멀티플 다이얼로그’전(2009. 2. 6. - 2010. 2. 7.)이 열리고 있다.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놓인 램프코어 벽면에 6만여개의 작품 <삼라만상>이 설치된 것이다. 이 작품은 강익중이 아버지와도 같은 백남준에게 보내는 오마주다.

강익중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그의 작품은 마치 비빔밥과 같다. 온갖 야채를 밥에 얹어 비벼먹는 이 전통 한식은 강익중 작업의 요체를 대변해 준다. 비빔밥에서 맨 밑에 놓이는 ‘밥’은 강익중 작업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한국적인 것의 총화’에 해당한다. 한국적인 사고방식, 한국의 역사, 한국의 풍물, 한국의 문화, 한국의 관습 등이 이루어내는 관념의 덩어리가 곧 그의 작품을 증식시키는 바이러스의 원형이다. 그 바이러스들이 이제 어디를 향해 발진할 것인가. 끝없는 항해의 조타수, 강익중이 벌이는 그 신명나는 굿판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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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이주헌, 강익중, 마로니에북스, 2009, 13쪽.

        2) 윤진섭, 문화와 비빔밥-강익중 론(論), 미술관에는 문턱이 없다, 재원, 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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