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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서문 / 대지적 사유 Earth Thoughts

윤진섭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 윤진섭(총감독) 


Ⅰ. 
약 30여 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의 미술계가 눈여겨보지 못한 미술운동이 있다. ‘한국자연미술가협회-야투(野投)’의 활동이 그것이다. 1981년 8월, 20여 명의 젊은 작가들이 공주의 금강 백사장에서 벌인 야외 현장미술 전시회는 같은 해에 열린 ‘겨울ㆍ대성리 31전’(1981. 1. 15-1. 20)과 함께 미술을 전공한 작가들이 자연의 품에 안겨 작업을 펼친, 당시로선 보기 드문 매우 독특한 형태의 미술행사였다. 이보다 앞선 야외미술제의 선례로는 1977년 5월, [제3회 대구현대미술제]의 일환으로 대구 근교의 강정에서 열린 야외 현장작업이 있었으나, 이는 그룹 활동이 아닌 단발성 행사였다는 점에서 이들의 지속적인 활동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러한 미술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70년대 후반의 미술계 사정은 젊은 작가들이 끓어오르는 표현의 분출구를 찾지 못해 혈안이 돼 있던 시절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제3공화국’으로 대변되는 군사정권이 국민들을 탄압하고 있었으며, 제도권 미술은 서슬 퍼런 공안정국 하에서 표현의 자유를 극심하게 억압당하고 있었다. 이른바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현실 참여적 경향은 1969년 ‘현실동인’에 의해 잠시 그 싹이 엿보였으나 전시도 열지 못한 상태에서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10년 뒤인 1979년 9월 ‘현실과 발언’의 창립으로 구체화되었으니, 이른바 ‘민중미술(Minjoong Art)’의 등장이다. 즉, 8. 15 해방이후 미술계의 사정은 모더니즘 일변도의 진행과정에서 그 반대급부로 민중미술의 등장 요인을 그 안에 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른바 ‘미협(’한국미술협회‘의 약칭)’으로 대변되는 미술권력의 집중화 현상이다. 당시 미술계의 사정은 이른바 국전에서 국제전으로 그 무게 중심이 옮겨가던 시기였으며, 국제전 출품과 관련된 현대미술의 발표의 장(場)은 ‘미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앙데팡당(Independent)’,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등 대규모 전시회에 국한돼 있었다. 이른바 문화예술의 중앙 집중화는 상대적으로 지역 미술인들의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야투’가 결성되던 1981년 무렵에는 70년대의 주류를 이룬 ‘단색화(Dansaekhwa)’와 ‘개념미술’ 일변도의 경직된 화단 분위기에 저항하여 다양한 경향의 미술운동이 이십대 청년작가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70년대에 모더니즘 미술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때로 연합전선을 구축하면서 기성화단에 도전을 감행했지만, 70년대 주류미술과 차별되는 뚜렷한 이념이나 미학적 관점이 미비된 상태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심정적 저항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과도기적인 징후가 농후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0년의 ‘횡단’ 그룹을 필두로 [한국현대미술의 모색전](1982), [젊은 의식전](1982, 1983), [상식 감수성 또는 예감전](1982), [의식의 정직성 그 소리전](1982), [한국현대미술 80년대 조망전](1982), [실천그룹전](1982), [시대정신전](1983), [접근 가늠 도달전](1983) 등 일련의 그룹전에 집약되어 나타났다. ‘밖으로부터의 예술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현실과 발언), ‘과거 20여 년 간의 핵심적 구조가 헤게모니의 추구로 인하여 상대적 파워의 구축을 초래’(한국현대미술모색전), ‘구미미술의 외형적 재탕에 그침으로써 삶이 배제된 창백한 형식주의를 초래’(삶의 미술전),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닌 생활인 중심의 미술’(두렁) 등등의 선언문은 모두 70년대의 모더니즘 미술과 연관된 제도적 파행에 비판의 표적을 맞추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야투’의 회원들이 야외로 나가 자연에 시선을 돌린 것은 결과론적으로 볼 때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사정으로 미루어 자연의 생태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관심이 희귀했던 시절에 이를 평생 작업의 화두로 삼았으니 초기 야투의 회원들이야 말로 이 분야의 선각자들이라 하루 수 있다. 임동식을 비롯하여 고승현, 강희준, 이응우, 고현희, 김해심, 정장직, 이종협, 신남철, 이선주, 허강, 전원길, 조충연, 유동조, 나경자, 정연민, 강전충, 이성원(無順) 등 전현직 야투 회원들은 ‘자연미술(Jayeonmisul:Nature Art)’이라고 하는 독특한 세계를 일굼으로써 이들과 관심을 함께 나누는 세계의 미술인들과 연대를 구축하는 중에 있다.

Ⅱ. 
‘야투(野投)’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들에 (몸을) 던진다.’는 의미이다. 어감에서 실존적인 의미가 강하게 풍기지만 실은 ‘자연에 동화된다.’는 뜻에 더 가깝다. 이들의 정신 속에는 자연을 지배하거나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품에 안겨 자연이 주는 생생한 느낌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나아가서는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소박한 태도가 담겨있다. 야투의 회원들은 풀벌레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촉촉한 땅의 질감을 피부로 느끼며 작업을 해 왔다. 그들은 나뭇잎이나 자갈, 개펄의 흙, 숲 속의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다양한 퍼포먼스와 설치작업을 수행했다. 같은 시기에 출범한 [대성리]전 작가들이 70년대의 모더니즘, 좀더 상세히 말하자면 개념미술의 연장선상에서 자연을 캔버스 삼아 설치작업에 주력했던 것과는 달리 철저히 자연친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야투의 이런 태도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의 구분이 분명한 한국의 자연 환경적 특징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특이한 형태의 작업방식을 낳았다. 80년대의 <사계절 연구회>는 이의 대표적인 경우이거니와, 이러한 형태의 미술은 한국현대미술사는 물론 세계 현대미술사에서도 그 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관계의 회복”과 “소박하면서도 자연과의 보다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자연미술은 야투가 정립을 시도하고 있는 미술의 한 형태이다. 그 용어를 영어로 표기할 때 기존에 써온 관행대로 ‘Nature Art’로 할 것인지 ‘Jayeonmisul’로 음역할 것인지는 좀더 세심한 논의를 거쳐야 할 일이나, 필자의 의견으로는 후자의 표기도 무난할 것 같다. 단지 이에 앞서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과 야투를 비롯한 한국의 자연미술 작가들의 작품과의 연관성의 문제이다. 한국 자연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권, 헝가리나 루마니아를 비롯한 동유럽권,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북미권 등 이해를 같이하는 세계의 많은 다른 나라들 작가들의 작품과 형태적, 내용적, 의미론적 차별성을 이루지 못할 때, 이를 가리켜 ‘Jayeonmisul'로 특칭하는 것은 다소의 문제점을 야기할 수 있다. 단, 80년대의 야투가 <사계절연구회>가 시도했던 일련의 작업방식들, 즉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 환경 속에 다양한 자연의 사물들을 이용하여 작가의 ‘몸’을 던지는 적극적인 방식은 자생적 미술의 언어로 간주하기에 충분한 미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매우 아쉽게도 초기 야투의 활동이 보여주었던 소박한 자연과의 친연성은 자연미술제와 비엔날레 등의 명칭의 변화에서 볼 수 있듯이 전시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변질되고 있다. 예컨대, 철이나 플라스틱, 청동 등 인공적인 재료의 사용은 자연물을 통한 자연과의 동화라는 야투 본연의 미학적 입장과 태도에서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자생성과 관련하여 ‘야투’의 정체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 되물어져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Ⅲ.
그간 연미산 자연공원에서 펼쳐졌던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이번 제5회를 맞이하여 쌍신생태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진행되었다. 공주 시가지를 가르며 유유히 흐르는 금강 둔치에 자리 잡은 이 공원은 시민들이 찾기에 편리한 이점을 지니고 있다. 가공할만한 각종 자연재해가 빈번해지면서 생태계의 교란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요즈음 금강자연비엔날레의 가치와 시의적절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미술을 통해 자연의 존엄성을 되새기고 그 의미를 재고하게 만드는 이 독특한 문화적 이벤트는 세계에 존재하는 허다한 비엔날레와는 그 지향하는 목표와 문화적 전략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획득하고 있다. 비록 저예산으로 집행되고 있지만, 초대 작가들이 참가기간 동안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고 또 철저히 현장작업을 통해 작품을 완성한다는 점도 여타의 비엔날레와 다른 점이다. 또 하나 주목할만한 사실은 그런 과정을 거쳐 비엔날레 현장에 설치된 작품들의 대다수는 그 수명이 자연에 맡겨진다는 점이다. 이는 대자연의 순환과정에 작품의 생명을 의탁하는 행위로서 자연과 더불은 작품, 자연의 일부로서의 작품이라는 ‘야투’의 기본정신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또 하나 두드러진 특징은 자연생태공원과 관련된 ‘장소특정적(site specific)’ 성격에 있다. 작가들은 자신이 작업을 펼칠 장소를 사전에 물색하거나 정보를 통해 선택, 장소에 합당한 작품의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된다. 공주시의 중심부를 흐르는 금강 둔치에서 시작해 강줄기를 따라 시의 외곽으로 확장될 비엔날레의 장기적 마스터플랜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생태 자연공원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는 미래지향적 비전을 갖게 한다. 따라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성격적인 면에서 볼 때 공주시민들이 친근하게 찾는 시민공원은 물론 공주시의 관광자원으로서도 한몫을 하게 될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상호 교감을 나누는 친환경적 문화시설로서의 비엔날레 행사장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인공적인 기반시설이나 반 생태적인 공원 조성 플랜은 가급적 삼가야 할 것이다. 가령 생태 숲의 접근로로 목제 데크를 설치한다든지 도로를 시멘트로 포장하는 행위, 식생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조경 등은 적극 금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할 때(自然)’, 자연스러움을 드러낸다. 이번 비엔날레에 출품된 작품들 대다수가 자연과 인간의 공생과 조화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자연이 지닌 본성을 지키고 유지하는 문제는 더욱 절실하다.

Ⅳ.
 제5회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주제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소리’이다. 이러한 주제의 설정은 위기에 처한 자연의 생태 문제를 비롯하여 인간 생존의 조건,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자연의 음성으로서의 소리에 대한 성찰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즉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빚어지는 파열음을 작가들은 오늘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실제 작품을 통하여 살펴보고 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예술은 시대의 위기를 진단하는 신기한 효능을 지니고 있다. 다다(Dada)의 경우에서 보듯이, 예술가들은 예민한 촉수로 시대적 위기를 발신한다. 현대의 문제적 상황을 꼽자면 무엇보다 생태계의 위기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위기적 상황은 무엇보다 인간과 자연이 부딪칠 때 나는 파열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현대문명이 자연의 정복에서 비롯되었음을 안다. 무섭게 질주하는 성장위주의 개발전략과 효율성의 구가는 자연의 황폐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자연의 신음 소리는 생태계의 보존과 복원에 대한 강력한 신호음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는 곧 계몽과 진보를 표방해 온 서구의 시각중심주의에서 대지적 영성을 존중해 온 동양의 촉각중심적 세계관으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대지가 지닌 모성성을 기반으로 ‘대지적 사유’를 실천할 것을 의미한다. 위기적 상황에 봉착한 현대의 입장에서 볼 때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의 복리를 위한 도구이거나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주역(周易)에 기초한 동양적 사유는 우주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가을 밤 교교한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귀뚜라미의 울음조차 범상치 않아 보인다. <벽암록>에 나오는 극근의 일화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이 책에 의하면 “어느 것이 이 조사(祖師)인가. 서녘에서 온 뜻인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는 범연의 자문자답에 극근이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 한 소식을 들은 극근은 환희에 차서 방밖으로 뛰쳐나갔는데, 때마침 어디선가 날아온 수탉 한 마리가 날개를 치며 길게 울었다. 순간, 극근은 “아아, 이것이다. 바로 이 소리다”라며 크게 깨달았다. 

이처럼 동양의 선(禪)은 차별이 없는 경지를 지향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경계가 없고,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의 구별이 없는 참 경지가 바로 선이 지향하는 궁극의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세상의 불행은 구분을 짓고, 경계를 나누고, 비교하고, 분석하고, 구별을 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이기심은 바로 이런 차별과 비교, 분석과 구분에서 나온다. 반면에 세계 내의 모든 사물과 인간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고는 인간중심주의적 사유를 배격하며,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친화적 대상으로 여긴다. 이른바 대지적 사유에 기반을 둔 자연친화적 세계관은 자연을 영혼이 피폐해진 인간이 돌아가야 할 궁극의 모태로 간주된다.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이 발신하는 영성(靈性)을 느끼고 자연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제안하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존재감이 그래서 더욱 크고 돋보이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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