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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채론 / 이주(移住), 현대인의 자화상

윤진섭

Ⅰ. 
약관 삼십의 나이에 제2회 광주비엔날레 초대작가로 발탁돼 <보이지 않는 구역>이라는 설치작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사람이 바로 손봉채다. 비엔날레 전시장의 높은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207대의 자전거는 예의 그 ‘끼익끽’대는 음향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장엄한 모습으로 관객의 눈길을 끌었다. 국내의 매스컴을 비롯하여 CNN, BBC, NHK 등 세계 유수의 방송사들이 손봉채의 키네틱 아트를 앞 다퉈 보도했다. 

 그의 이 작품은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과 비평계의 찬사를 받았으나,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이런 방대한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전력을 투구,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였으나, 작품을 소장하겠다는 소장자도 후원자도 없었다. 당시 광주비엔날레를 관람한 LA현대미술관의 한 큐레이터가 이 작품에 큰 관심을 보이며 작품을 미술관으로 보내기만 하면 세계 순회전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던 그는 작품을 보낼 수 없었다. 손봉채에게 이 쓰라린 기억은 아직도 가슴에 깊은 한으로 남아있다.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도 그렇겠지만 특히 예술가에게 기회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만일 그때 어떤 후원자가 있어서 그를 지원하였더라면 그는 지금쯤 세계적인 작가가 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기억에 생생한 것은 그로부터 일년이 지난 무렵 광주 신세계갤러리에서 돼지를 전시장에 몰아넣은 사건이다. 전시장에 갇혀 퍼포먼스를 벌인 돼지가 똥을 싸 불쾌한 냄새가 퍼지는 통에 사치스런 상품들로 가득 찬 백화점의 특성상 돼지를 철수해야 했다. 이 돼지 퍼포먼스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손봉채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일화 가운데 하나이다. 

Ⅱ. 
나는 그 이후 월간미술에 그를 추천하는 비평 글을 쓰기도 하는 등 관심을 지니고 있었으나, 한동안 그의 활동을 접하기 어려웠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광주시내에서 포장마차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사연인가? 나는 궁금했지만 그를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키네틱 아트는 생소했고 또 그런 대형작품은 -지금도 그렇지만-컬렉션의 가능성이 낮다. 그런데 나는 그런 현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숨 걸고 작품제작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결국 수천만 원의 빚이 고스란히 남게 됐고 그 많은 빚을 갚기 위한 살벌한 시간들이 시작됐다. 공사장 막노동꾼은 기본이고 선착장 잡역부, 조선소, 포장마차에 이르기까지 빚을 갚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제2회 광주비엔날레의 [권력] 섹션에 그로선 최대의 야심작인 <보이지 않는 구역>의 제작을 둘러싼 이러한 일화들은 결과적으로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잡초 근성을 지닌 그는 수년 간에 걸친 정신적 방황과 모색기를 거친 뒤 2000대에 접어들어 입체회화를 시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보다 앞선 시기인 1990년대의 그의 작업은 사회비판적이며 권력에 대한 풍자가 주를 이루었다. 그는 1997년 제2회 광주비엔날레를 필두로 2004년, 2006년, 2010년 등 잇달아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되었는데, 이때 발표한 <보이지 않는 구역>, <더 이상 공룡은 없다>, <다음은 누구?>, <어디로 가느냐?> 등등의 작품들은  손봉채를 일약 스타급 작가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했다. 이 시기에 그가 제작한 <경계-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란 작품은 입체회화의 효시가 되었다.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첫선을 보인 이 대형 설치작품은 광주 전남지역 근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이자 산 증인인 전남도청의 사진 이미지를 몇 개의 구획으로 분할해서 관객들이 그 사이를 걸어가며 감상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그 후 그의 ‘경계’ 시리즈는 한동안 지속되기에 이른다.  

Ⅲ. 
이 ‘경계’ 시리즈를 제작할 무렵, 광주를 비롯한 남도 일대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다니던 손봉채의 눈에 우연히 한 장면이 들어오게 된다. 대형 트럭에 실려 가는 조경수, 뿌리가 뽑힌 채 어디로 팔려가는 줄도 모르고 트럭의 화물칸에 몸을 맡긴 그 처량한 모습에 강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 순간, 마음 한 구석이 퀭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도심을 장식하는 그 많은 조경수들이 사실은 이렇게 제 땅에서 뽑혀 나와 도시로 팔려가서는 도심 한 구석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순간 나는 뉴욕을 떠올렸다. 뉴욕이야말로 전 세계의 인종시장이라 할 정도로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좇아 몰려든 곳이다. 그들이 정말 자기 땅에서 살기 좋았다면 그 낯선 이국땅으로 왔을까? 더구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사회 밑바닥을 떠받들고 있었다.” 

 조경수에 대한 손봉채의 이처럼 강한 감정이입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그의 청년기 체험과 관련이 깊다. 일찍이 요리사가 될 것을 꿈꾸었던 그는 대학시절 은사인 신현중 교수의 강력한 권고로 마침내 유학길에 올랐는데, 뉴욕시절 국외자로서 그의 체험은 이러한 감정이입의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4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조국에 돌아와서 그가 겪었던 신산한 체험 역시 뿌리가 뽑힌 자의 방랑 그 자체였던 것이다. 



 손봉채의 <이주민(Migrants)> 시리즈는 이처럼 뿌리 뽑힌 자들에 대한 강한 애정에서 출발하였다. 산업화 사회의 희생자로서 개발에 밀려 이리저리 떠도는 부평초 같은 인생에 대한 강한 연민과 공감이 그것을 낳은 것이다. 그는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polycarbonate)에 유성물감과 가는 붓을 사용하여 직접 이미지를 그려 넣는다. 처음에는 사진을 이용하여 작업을 하였으나 약 4년 전부터 직접 그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가 창안한 특유의 입체회화가 자리를 잡기에 이른 것이다.   

 이 입체회화의 기본은 밑그림이다. 그는 먼저 최종적으로 완성될 작품의 밑그림을 그린 다음, 5장에 이르는 폴리카보네이트에 서로 중첩되지 않도록 그릴 나무의 일련번호를 매겨 가는 붓으로 그려나간다.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관객이 보는 그림은 이 다섯 장의 폴리카보네이트가 합쳐져 완성된 것이다. LED가 뿜어내는 백색의 투명한 빛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보는 것처럼 몽환적인 느낌을 가져다준다. 그 풍경은 사전에 주어진 정보가 없다면 산수화의 현대적 변용으로 여길 만큼 실험적 측면이 강하다. 사실 나 또한 이 <이주민> 연작을 보면서 동양의 산수화가 나아갈 미학적 가능성을 본 것이 사실이다. 화선지에 붓으로 먹의 농담(濃淡)을 살려 그려낸 전통 산수화가 오로지 먹색만으로 공간감과 거리감을 표현한다면, 손봉채의 <이주민> 시리즈는 5장의 폴리카보네이트 위에 나무와 구름을 그려 관객의 시점이 이동함에 따라 미묘한 풍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입체회화의 장점을 보여준다. 새로운 형식은 새로운 내용을 가져온다. 손봉채의 입체회화는 비록 유성물감으로 사용하여 세필로 그렸으되 전통 산수화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몽환적이며 입체적인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산수화가 지닌 동양적 전통의 미감이 손봉채의 손을 통해 현대적인 느낌의 새로운 회화로 거듭나기에 이른 것이다. 

 ‘이주(移住)’라는 일관된 주제 하에 이루어진 손봉채의 <이주민> 시리즈는 초기작을 보면 그 발상의 근원을 알게 된다. 뿌리가 뽑힌 채 구름 위에 서 있거나 호반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를 그린 그림들에는 이주민들의 이름이 영어로 써 있다, 구름 위에 한 그루의 나무가 서있고 구름 사이로 백악관이 모습을 드러낸 장면 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 물결 위에는 수많은 이주민들의 이름들이 써 있다. 이 그림만큼 이주와 관련된 <이주민> 시리즈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작품도 드물다. 그러니까 지금 보는 <이주민> 시리즈는 이러한 이주민의 이름이 소거된 상태인 것이다. 그는 이주민들의 이름이라는 구체적인 사실을 제거함으로써 주제가 담고 있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나아가서는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오로지 관객들이 심미적 체험(aesthetic experience)을 통해 느낄 수 있도록 완곡하게 유도하고 있다. 여기서 이 작품의 감상은 열려있다. 관객이 그것을 한 편의 현대적 산수화로 해석하든, 아니면 그 그림을 통해 뿌리 뽑힌 자의 영혼을 읽어내든 그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미적 향수 능력과 판단, 그리고 취미(aesthetic taste)의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손봉채의 입체회화가 종래의 산수화와는 다른 새로운 미적 체험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산수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보다는 오히려 손봉채의 <이주민> 시리즈가 지닌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 우선해야 할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나무들은 한결같이 뿌리가 뽑혀 있다. 뿌리가 뽑힌 나무들이 원래 있어야 할 대지를 떠나 구름 위에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의 그림 속의 나무들은 구름에 가려 뿌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인 전통 산수화 속의 나무들과는 달리 정처 없는 이동을 상징하는 구름에 가려져 있다. 주지하듯이 구름이나 안개는 존재의 지반이 없다. 그러니까 존재의 지반이 없이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인 구름 위에 나무가 뿌리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은 곧 그 나무 역시 존재의 지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주민(定住民)의 모습이 아니라 방랑자처럼 이곳저곳을 떠도는 이주민(移住民)의 모습을 상징한다. 손봉채의 나무가 오늘날과 같은 산업화 시대에 도시개발로 인해 정처 없이 떠도는 도시인들의 이주와 유목, 그리고 방랑을 상징한다고 할 때, 작품에 대한 해석의 외연을 확대하면 그 의미는 매우 크다. 그는 얼핏 보기에 깔끔한 산수화로 보이는 작품을 통해 방황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특유의 입체회화 기법을 통해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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