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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각의 세계 - 한국의 단색화

윤진섭

명화에 대한 친절한 해설을 곁들인 칼럼이 각종 신문이나 잡지에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동서양의 걸작을 중심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조금 지난 과거, 혹은 현재의 작품들은 대부분 여기에서 배제된다. 왜 그럴까? 아마도 시간의 경과에 따른 검증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시간적 검증이란 결국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명화나 고전적인 시, 소설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명화와 고전적인 문학작품이란 결국 수많은 관람객들의 감상과 독서 행위를 통해 그 가치가 검증되기 때문에 동시대의 작품에 대한 소개를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명화를 소개해 달라는 편집자의 청탁을 받고 문득 ‘한국의 단색화’가 떠오른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서양의 고전 명화나 한국의 이인성, 박수근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도 생각해 봤지만 그런 종류의 칼럼은 넘쳐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1970년대 이후 한국 단색화의 거장들 작품을 중심으로 이번 연재를 꾸며볼까 한다.

지난 2012년 3월 16일부터 5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단색화’전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정수라고 평가되는 ‘단색화(Dansaekhwa)’를 총정리한 기념비적인 전시였다. 필자가 초빙큐레이터의 자격으로 기획한 이 전시는 197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는 한국 단색화의 역사적 궤적을 살펴봄은 물론, 서구의 ‘모노크롬(monochrome)’ 회화와 차별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의가 있는 전시가 아닌가 생각한다. 

주지하듯이, 서구의 모노크롬 회화는 원근법으로 대변되는 이성중심 내지는 시각 중심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서구의 시각 중심적 사고는 결과적으로 제국주의의 확산을 가져왔거니와, 이의 필연적 결과로서 과학문명과 기술에 대한 신봉은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생태계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장악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필경 타자에 대한 정복과 간섭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이성을 중시한 서구인들은 자연을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여겼으며, 한낱 인간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간주했다. 

전통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동양은 서양의 시각 중심적 사고와는 달리 촉각 중심적 사고를 중시했다. 이른바 대지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동양화에서 보듯이 자연의 품에 안긴 인간상으로 표상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대지를 ‘어머니’로 여기는 맥락과 같은 것인데, 대지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이의 대표적인 경우다. 한국의 어머니들이 밥을 지은 후 한 술의 밥을 떠서 먼저 땅에다 바치는 ‘고수레’ 의식은 대지적 경건성이 잘 표상된 경우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반 이후, 한국의 단색화는 모더니즘 미술의 주류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단색의 집단미학으로 화단에 풍미하기 시작한 그것은 하나의 ‘화파(school)’, 즉 ‘단색파(Dansaekpa)’를 형성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서보를 비롯하여 이우환, 하종현, 권영우, 김기린, 정창섭, 윤명로, 윤형근, 이동엽, 정상화, 김장섭, 최병소, 최명영, 서승원, 허황 등등 1970년대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은 단색을 중심으로 한국의 정신성을 화면에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이들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촉각성’이다. 

정창섭은 한지, 그중에서도 특히 닥지를 사용하여 그것의 물성을 잘 드러낸 작가다. 물에 불린 닥지를 손으로 떠서 편평한 캔버스 위에 겹쳐 추상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그의 행위는 시각 중심적인 조형행위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촉각 중심적 행위다. 손으로 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가장 대표적이며 중심적인 감각인 시각에 가려졌던 촉각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것은 대지적이며 순환적이다. 시각중심적인 입장에서 보면 가장 배타적인 감각이 바로 촉각인 바, 시각이 강자라면 촉각은 약자이고 시각이 양(陽)이라면 촉각은 음(陰)인 셈이다. 포스트모던을 모더니티의 발생 이후 억압돼 온 타자들의 복권이라고 새긴다면 한국의 촉각 중심적인 단색화가 재평가되는 것 또한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 월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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