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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의 해외 진출과 교류전

윤진섭

Ⅰ. 
 백남준과 이우환의 구겐하임미술관 초대전은 한국 출신 작가의 해외 진출 문제와 관련해 볼 때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준 선례라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두 거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찍이 한국 땅을 떠나 스스로의 힘으로 자수성가한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엄격히 말해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작가들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이들의 성공은 그만큼 한국에 빚지지 않은 것이며, 오히려 이들의 후광을 모국이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작가의 배출에 관한 한 체계적인 전략이나 정책이 우리 사회에 부재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국민소득 2만 불의 시대에 접어든 한국은 이제 보다 성숙한 문화국가로서의 위상을 세계 속에 정립할 필요성과 당위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국제적인 한국작가의 배출을 위한 정교한 전략을 구사해야 할 시기에 돌입하였다고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프랑스 파리를 비롯한 유럽에서 활착의 조짐을 보이는 ‘K-POP’은 한국의 문화와 예술이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연이어 개최된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 2002 한일월드컵, 2000 ASEM 회의, 2010 G20 정상회의, 그리고 최근의 1018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에 이르는 일련의 정치적 내지는 문화적 행사에 힘입어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는 6. 25 전쟁 직후의 혼란스런 사회상 속에서 열악한 문화예술적 환경을 지녔던 것과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1995년, 이태리의 베니스 시 쟈르디니 공원에서 열린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개관한 한국관은 그동안 성장한 한국 현대미술의 역량을 세계에 알리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특히 전수천의 특별상 수상은 독립관을 마련함과 동시에 벌어진 쾌거로 한국 현대미술의 신장된 역량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베니스비엔날레에서의 특별상 수상은 그 후 강익중과 이불로 이어지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그 뒤 십여 년간 한국은 이렇다할 수상 실적을 낳지 못해 전략의 부재를 노정하였다.   

 같은 해에 광주에서는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열려 [동경비엔날레] 이후 중단됐던 아시아 지역에 비엔날레의 성수기를 여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글로벌한 차원에서 볼 때, 한국에서 촉발된 비엔날레 열기는 타이페이, 상하이, 싱가포르, 북경, 요코하마, 후쿠오카 등으로 번지면서 아트페어, 옥션과 함께 아시아 미술시장의 활성화를 가져오는 한편, 구미지역과 대등한 차원의 국제적인 경쟁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였다. 문화정치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칫 이는 서구권과 아시권이 패권을 겨루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이 정치나 경제처럼 헤게모니를 둘러싼 장악력이 분명히 노출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호평등과 호혜라는 측면에서 권장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굳이 과거 서구가 자행한 ‘오리엔탈리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간 동양과 서양의 관계라는 것이 평등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기울음의 관계에 치우쳤기 때문이다. 이는 문화나 예술에 우열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다름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문화보편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도 한 국가나 권역이 갖는 경제적 내지는 정치적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도 파워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명제는 그래서 더욱 타당하다. 인구 면에서 볼 때, 전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아시아는 이천년 대 이후 북미와 유럽에 이어 세 번째에 이르는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IT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한국과 일본, 인도, 중국의 경제적 약진은 이제 세계 경제의 흐름을 바꿔놓을 정도로 강력한 파워를 지니고 있다. 이제 아시아는 서구가 덧씌운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오명을 벗어버릴 수 있을 만큼 주체적이며 역동적이고, 동시에 강력한 잠재력에 바탕을 둔 문화적 파워를 낳고 있다. 이는 말하자면 세계가 수직적 위계가 아닌 수평적 유대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Ⅱ. 
 국제전에 관한 한, 그 첫 시초는 1958년 뉴욕의 월드하우스갤러리가 주최한 [한국현대회화전]이다. 6. 25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전시회에 고희동을 비롯한 33명의 작가가 초대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몇 차례에 걸친 해외전 참가의 경험이 있지만 전후 해외전의 양상은 개인이나 학교 차원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한국현대회화전]도 주최 측이 직접 내한하여 작가를 선정하였다고는 하나 초대작가의 면모를 살펴볼 때 뚜렷한 기획의 면모에 어울리는 기획전의 양상은 보이지 못했다. 

 이처럼 제한된 지면에서 국제전에 관한 연대기적 나열은 무의미해 질 수 있기 때문에 시대별로 간략히 상황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리고 전체를 뭉뚱그려 기술하자면 우리 미술의 해외 진출 역시 경제적 성장, 즉 다시 말해서 국제사회에서 국가가 갖는 국력이나 위상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가령 1970년대에 접어들어 국민적 관심이 국전에서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한 국제전 쪽으로 급속히 옮겨간 것과 무관치 않다. 70년대는 그만큼 국제전의 비중이 커지던 때였으며, 이에 부응하여 국제전에서 한국 작가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였다.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서 심문섭과 이건용의 선전은 국제무대에 한국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이보다 앞선 1963년,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김환기가 명예상을 수상한 것에 버금가는 쾌거였다. 

 당시 국제전 작가의 선정권은 미협의 국제분과가 행사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잡음이 일기도 했다. 그것은 국제적 대세에 따른다는 명분 아래 이루어진 추상작가 일변도의 선정, 특정 작가에게 과도하게 편중된 참가권 부여, 소수 정예보다는 다수의 참여에서 오는 무전략적 대응 등 다양한 폐단을 낳았다. 특히 [상파울루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인도트리엔날레], [방글라데시비엔날레]와 같은 미협 주관의 비엔날레 참가는 다수의 작가들을 파견하여 무전략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되는데, 이는 주관 부처에서 물러난 [상파울루비엔날레]를 제외하면 지금도 개선되지 않고 있어 그 폐단이 심각한 상황이다. 


Ⅲ. 
 1970년대를 통틀어 한국 미술계가 거둔 수확이라면 아마도 ‘단색파(Dansaekpa)’의 형성일 것이다. 당시 화단의 주도적인 흐름 가운데 하나인 단색화는 1975년 동경화랑이 기획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을 통해 해외에 첫 소개가 되었다.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 등 대표적인 단색화 작가들이 참여한 이 전시는 한국 단색파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1980년대는 개방의 시대였다. 해외여행자율화와 함께 칼라텔레비전이 방영되고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대중소비사회의 대두와 함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성행하는 등 국제사회로의 진입이 이루어졌다. 이는 “한국이 몰려온다”는 타이틀이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것처럼, 1990년대 한국의 세계화(globalization) 전략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1993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주요 국가로 부상한 호주가 창설한 [아시아태평양트리엔날레](브리스베인 퀸즈랜드 미술관 주최)는 후쿠오카미술관 주최의 [아시아현대미술전]과 함께 아시아 지역에서 열리는 중요한 국제전이다. 이 시기에 조명을 받은 한국의 미술사조 중 대표적인 것은 단색파의 작품인데, 대표적인 해외전시로는 1992년 영국 테이트 갤러리 리버풀의 [자연과 더불은 작업:한국의 현대미술(Working with Nature:Contemporary Art from Korea)]와 1998년 프랑스 몽뻴리어 미술관 주최의 [침묵의 회화들(Les Peintres du Silence)]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두 전시는 외국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이 직접 방한을 하여 작가들 선정하였다는 점에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한편, 1980년대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배태된 미술 사조인 민중미술이 미국의 퀸즈미술관에서 [태평양을 건너서:오늘의 한국미술전](1993)이란 타이틀로 열린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특히 이 전시를 통해 소개된 한국의 민중미술이 ‘Minjoong art’라는 고유명사로 표기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미디어 아트의 분야의 약진이 두드러진 시기도 200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특히 대안공간 루프는 아시아 지역 네트워크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루프는 아시아 지역의 비디오 아트 에 관한 아카이브의 구축과 교류를 통해 미디어 아트의 네트워크를 도모하기 위해 열리는 [Move on Asia]를 비롯하여 후기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예술과 자본, 미술시장과 유통, 아시아권에서 자본과 예술의 결합관계를 다룬 국제학술포럼 [Art Capital], 아시아 지역의 우수 작가를 선정하여 전시와 포럼행사를 병행하는 [Asia Art Award Forum]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중남미 순회전으로 기획한 [박하사탕]전은 2007년 칠레의 산티아고 현대미술관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미술관에서 성황리에 전시를 마쳤다. 이 전시는 80년대의 정치적 격변과 질곡의 시대를 거쳐 대중소비사회를 몸소 겪은 작가들의 시각을 통해 한국 사회를 조명한 것이다. 

 한국현대미술의 해외전 역사에서 강조할 것은 민간차원에 의한 교류전이다. 가장 주목해야 할 대표적인 것은 수원에 거점을 둔 컴아트 그룹의 활약이다. 이들은 1993년에 중국 북경을 방문하여 [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한국현대미술의 육성전]이란 타이틀의 교류전을 가졌다. 컴아트의 이경근, 김석환 등을 주축으로 한 한국작가들은 중국의 성성회 회원인 왕루엔을 비롯하여 왕광이, 송똥 등 다수의 중국작가들과 교류를 하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제도권 미술로 간주되는 당시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서 언더그라운드 작가들과 교류를 시도한 것은 한중미술교류사에서 매우 뜻 깊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듬해에는 일본까지 합세하여 한중일 삼국의 교류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1995년에 한중일 삼국의 작가들이 동경의 저팬 파운데이션 미술관에서 {New Asian Art Show-1995]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민간 차원으로는 한국과 중국의 미디어아트를 소개한 북경 한지연컨템포러리스페이스의 [Border of Virtuality], 일본의 회화와 입체작업을 소개한 터치아트갤러리의 [Trans JAPAN], 독일 칼스루헤에 위치한 미디어아트의 거점 미술관 ZKM에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미디어 아트를 집중적으로 선보인 이원일 기획의 [Thermocline of Art:아시아현대미술전](2007)과 [세비아비엔날레](2008), 김유연이 기획한  <Magnetic Power>(2009) 등이 최근 몇 년간 국내와 해외에서 열린 주목할만한 전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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