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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미술의 등장-70년대 미술의 전개와 화단사적 의미

윤진섭

새로운 미술의 등장-70년대 미술의 전개와 화단사적 의미


윤진섭(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호남대 교수)



Ⅰ.

   ‘70년대의 미술’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과연 무엇인가? 그 전개 과정과 화단사적 의미를 밝히는 일은 현 단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개념미술’과 ‘단색화’로 통칭되는 70년대 미술의 주류가 4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미술에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작품들의 개념적 측면과 특히 최근 들어 재조명되고 있는 단색화적 경향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글은 70년대 미술의 전개과정에 논지의 초점을 맞추되, 그것의 ‘화단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응답의 한 형태이다. 

   우선 ‘70년대 미술’이라고 할 때, 강조되어야 할 것은 그것이 태동된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는 일이다. 그것이 과연 어떤 토양에서 형성된 것이며, 문제점은 무엇이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하는 사실을 검증할 때 우리는 하나의 반성적 차원에서 지난 미술운동을 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 현대미술의 현재적 상황이 70년대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상황을 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절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쟁취한 80년대 말, 그리고 세계화가 시작된 90년대와 2천 년대를 거쳐 우리는 현재 글로벌한 시각에서 국제 교류를 추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미술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분명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낄 정도로 달라진 면모를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1969-  )의 예를 들면 70년대 덕수궁 시절에서 80년대의 과천시절을 거쳐 2013년 현재 세계적으로 손색이 없는 시설을 갖춘 서울관 시대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볼 때, 이처럼 세계사적 차원의 도약이 과연 한국 현대미술의 본질적인 여망에 온전히 부응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합당한 답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거시적인 입장에서 볼 때 자본의 침투와 이에 따른 상업주의의 번창에 있다. 일종의 작가주의 정신의 실종과도 관련이 있는 이러한 진단은 실험과 전위, 그리고 이에 따른 작가주의 정신이 충일했던 과거 70년대의 미술운동을 돌아볼 때 더욱 높은 설득력을 지닌다. 아마도 우리가 70년대 미술을 반성적 차원에서 반추해 본다면 우리의 현재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날 화단에 팽배해 있는 상업주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해독이 나쁜 것이며, 거기에 저항하는 작가정신의 실종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70년대는 우리에게 하나의 좋은 교훈을 남겼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이 글을 쓰게 한 동기이다. 



Ⅱ.

   흔히 이야기하길 ‘70년대’는 집단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는 50년대 후반의 소위 ‘앵포르멜’ 시기를 거쳐 이의 반동으로 나타난 60년대 후반, 일단의 젊은 작가들에 의한 집단적 저항의 시기,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나타난 70년대의 집단 미술활동과 대규모 미술제의 등장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미술사적 사건들의 이면에는 ‘실험’과 ‘전위’라는 용어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흔히 70년대 미술을 가리켜 ‘실험과 전위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사상 ‘실험과 전위’로 통칭할 수 있는 미술운동이 최초로 등장한 예로는 50년대 후반의 [현대미협전] 멤버들에 의한 ‘앵포르멜’ 운동을 들 수 있지만, 이들은 평면 중심의 미학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 후속으로 나타난 [청년작가연립전] 세대에 비해 다양성을 결(缺)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집단화(集團化), 선언문, 전통에의 거부와 도전, 새로운 세대 의식 등은 이들이 아방가르드의 본질적 요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아방가르드의 본질을 이루는 ‘운동’이 현대적 집단화의 모양새를 갖출 때 그 운동은 속성상 공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볼 때 전후의 앵포르멜 세대는 기존의 국전 세력에 대해, 그 후속으로 나타난 [청년작가연립전] 세대는 매너리즘에 빠진 앵포르멜 세대에 대해 각기 과감한 도전을 감행하였다. 1956년의 [4인전](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박서보)을 필두로 1957년 <현대미협>의 발족, 1960년, <60년미협>과 <벽동인>의 창립, 그리고 <현대미협>과 <60년미협>이 발전적 해체와 회원 재정비란 명목 하에 1962년에 창립한 <악뛰엘> 등 일련의 추상화적 경향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 과포화 상태를 겪게 되면서 미술 운동으로서의 의미가 퇴색하게 된다. 

   4.19 세대인 [청년작가연립전] 멤버들 대다수는 미술대학 시절 앵포르멜 화풍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 따라서 1960년대 후반 앵포르멜 세대에서 [청년작가연립전] 세대로의 이행이 가능했던 이유를 우리는 앵포르멜 화풍의 쇠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학창시절에 앵포르멜을 경험했던 이들은 60년대 중반 무렵 이 화풍의 쇠잔을 보며 새로운 언어에 대해 암중모색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오브제와 설치, 해프닝과 같은 새로운 방법론이 등장한 것은 앵포르멜의 쇠잔과 관련이 깊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처럼 새로운 의식을 담을 수 있는 형식의 요구가 거세지기 시작한 것이다. <무>, <신전>, <오리진> 등으로 대변되는 청년작가들은 [청년작가연립전](1967. 11. 11-17)을 통해 ‘팝’과 ‘네오다다’, ‘구체음악’, ‘해프닝’과 같은, 당시로서는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평면 중심의 기성 작가들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반면에 한국 앵포르멜의 선구자인 기성 작가들은 1970년대 초반, ‘단색화(Dansaekhwa)’를 들고 나오기까지 새로운 화풍의 창출을 위해 암중모색을 하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엽에 이르는 기간은 한국 현대미술사상 새로운 세대교체의 시기인 동시에 새로운 미술 형식과 방법론을 둘러싼 실험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해프닝을 비롯하여 메일아트, 개념미술, 대지예술, 기하학적 추상 등등이 개인과 그룹 활동을 통해 활발히 전개되었다. 회화는 앵포르멜에서 하드에지 등 기하학적 추상으로 넘어가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김구림을 비롯하여 정찬승, 정강자, 고호, 방태수 등 장르를 초월한 예술가들이 모여 <제4집단>을 결성, 전방위적 언더그라운드 전위활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Ⅲ.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경복궁에서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면서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은 실험미술의 요람으로 자리 잡아 나갔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1970년대 중반 무렵 [앙데팡당전]을 비롯하여 [서울현대미술제], [에꼴드서울]과 같은 대규모 전시들이 열려 단색화, 개념미술, 하이퍼리얼리즘, 오브제 아트, 비디오 아트, 설치미술, 이벤트 등등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작품들이 선을 보였다.   

   이 시기의 화단에 나타난 특징적 양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른바 국전의 퇴조와 국제전의 부상이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같은 해 3월에 경인고속도로를 착공하고 4월에 구로동 수출공업단지를 준공하는 등 제2차 경제개발정책을 야심차게 추진해 나갔다. 외환보유고는 이미 3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으며, 사회는 산업사회적 징후를 노정하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선데이 서울’이 창간되고 정소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이 공전의 대 히트를 치는 등 대중문화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선전을 본 때 만든 국전이 퇴조의 기미를 보였다는 사실은 70년대 당시 한국 화단이 비로소 우물 안 개구리 식의 근시안에서 벗어나 국제적 관계망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정부의 경제개발정책과 과감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은 국내외의 인적 물적 교류를 촉진하였으며, 외환보유고가 높아짐에 따라 해외의 문호도 점차 개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70년대 국제화의 추세는 시류에 따른 자연스런 추세였다.  

   1970년 6월, 김지하의 <오적> 필화사건으로 대변되는 공안 정국은 사회를 얼어붙게 했다. 전국에 우편번호제가 실시되면서 표준화와 효율성을 추구해 나가기 시작한 이 무렵, 경부고속도로를 준공하여 경제적 번영을 위한 가시적 지표들이 늘어났지만 사회의 한 편에서는 평화시장 노동자인 전태일이 노동조건의 개선을 부르짖으며 분신자살을 감행, 70년대 노동운동의 서곡을 울렸다. 얼어붙은 공안 정국에서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었다. 김지하의 <오적>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문학 동네에서는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표현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투쟁과 저항을 계속했지만, 유독 미술 동네만큼은 침묵을 지켰다. 

   당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한 이우환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단색화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70년대를 통해 화단에 팽배한 ‘단색화’적 경향을 가리켜 “당시는 너무나 가난하고 꽁꽁 얼어붙은 추상적인 시대였다. 이것이 바로 모노크롬의 배경이고 바탕이다. 한쪽으로는 핍박한 최소한의 생활, 다른 한쪽으로는 강압적인 군정 하에서 모노크롬의 호소력은 안성맞춤이었다. 단색이나 반복의 방법이 저항감과 의지를 나타내기에 효율적인 집단양식으로 선택된 것이다.”라고 말하여 단색화가(單色畵家) 특유의 부정의 정신을 시대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 간주하였다. 색에 대한 부정이 무채색의 사용으로 내면화되면서 한편으로는 유교적인 생활윤리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이 발현되는 동시에, 선(禪) 수행을 연상시키는 반복과 절제, 비움 등 수행의 방법론이 등장하였다. 캔버스에 가시철망을 촘촘히 박아놓은 하종현의 <<접합>> 연작이 암시하듯, 얼어붙은 공안정국의 공포정치는 대화의 단절을 낳았다. 일방통행식의 상명 하달이 공조직을 통해 점차적으로 사회 각 부문에 확대, 침투되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반(反)문화, 비민주적인 조직문화를 낳았다.  



Ⅳ.

   한국 현대미술사상 ‘실험과 전위’의 확장은 <A.G>와 <S.T>, <신체제> 등 소수의 정예 그룹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A.G>는 ‘avant-garde(전위)’ 자체를 그룹의 이름으로 채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언문과 동명의 기관지, 전시 등을 통해 그룹의 이념을 실천해 나갔다. 김구림, 곽훈, 김차섭, 이승조, 서승원, 최명영, 김한, 하종현, 박종배, 박석원, 심문섭, 이승택, 신학철 등이 참여한 이 단체는 1973년까지 모두 세 차례의 테마전을 가졌다. [확산과 환원의 역학](1970), [현실과 실현](1971), [탈(脫)관념의 세계](1972) 등 주제의식이 분명한 전시회를 기획하여 작가주의 정신을 표방했다. “전위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선언문은 이 그룹의 이념을 잘 대변해 준다. 이 단체는 [청년작가연립전](1967) 이후, 앵포르멜 운동이 종말을 고한 시점에서 나타난 다양한 그룹들이 이합집산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김구림, 곽훈, 김차섭이 <회화 68>, 서승원, 이승조, 최명영이 <오리진> 출신이란 사실은 이 그룹이 연합체적 성격의 엘리트 집단이었음을 말해준다. 김인환, 이일, 오광수 등 이례적으로 당대의 미술평론가들을 회원으로 영입한 <A.G>는 1971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두 번째 주제전 [현실과 실현]에서 김청정, 김동규, 송번수, 이강소, 이건용, 조성묵 등을 회원으로 영입, 세(勢)를 확장해 나갔다. 73년에 전시를 거른 <A.G>는 이듬해인 74년 [서울비엔날레]를 기획하였으나 첫 행사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이듬해에 하종현, 이건용, 신학철, 김한 등 4인만 참가한 정기전을 끝으로 해체되기에 이른다.

   <A.G>의 회원들의 투철한 작가주의 정신은 4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몇몇 작고한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전 회원이 화단의 원로로 건재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사상 숱하게 명멸한 그룹들 중에서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또한 어느덧 노년에 이른 이승택과 김구림의 경우에서 보듯이, 대다수의 작가들이 상업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작가주의 정신을 고수하고 있어 본고의 주제의 범본이 되고 있다.    

   지면 관계상, <S.T>와 <신체제>를 비롯하여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자세를 견지했던 그룹에 대한 보다 상세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거니와, 이참에 살펴볼 것은 70년대 대구화단의 풍경이다. 섬유산업이 발달한 대구는 자본이 형성됨에 따라 일찍부터 화랑가가 형성되었으며, 서울 화단과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독자적으로 현대미술을 발전시켰다. 이인성의 구상 화풍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실주의적 풍경화가 강세를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현대미술의 기세도 강했다. [대구현대미술제]는 서울보다 앞선 1974년에 창립돼 회를 거듭할수록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작가들을 결집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박현기, 이강소, 김영진, 이명미, 황현욱, 최병소, 이교준 등 대구가 고향이거나 대구에 뿌리를 둔 작가들은 [대구현대미술제]를 중심으로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작업을 펼쳐나갔다. 특히 강정에서 이벤트가 펼쳐진 1979년, 제5회 [대구현대미술제]는 대구시내의 7개 화랑에 분산돼 열렸는데,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등 15명의 일본작가들이 다수 참여, 당시 지방의 사정으로는 매우 드물게 국제전의 성격을 갖췄다. 한편, 강정의 냉천에서는 이건용, 이강소, 박현기, 김수자, 김용민, 문범 등이 이벤트를 벌여 실험적인 열기를 더했다. 뿐만 아니라 박현기, 이강소, 김영진, 이현재 등이 비디오 작품을 발표하여 비디오 아트가 미술의 한 장르로 정착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대구현대미술제] 창립의 의미는 [서울현대미술제]를 비롯하여 강원, 부산, 전주, 광주, 청주 등 전국 단위 현대미술제 창립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데 있다. 또한 전국의 현대미술 작가들이 서로 교류를 하는 가운데 정보를 공유하고 친교를 맺는 구심점이 된 것 또한 [대구현대미술제]가 한국 현대미술에 기여한 공로이다. 최근에 새로 시작된 [강정 대구현대미술제]는 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의 전통을 잇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70년대의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작업은 투철한 작가주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그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기(1980년대 후반 이후)를 거쳐 이 땅에는 모든 것이 용인되는 다원주의 열풍이 불고, 세계화를 표방한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미술시장의 해외 개방과 함께 상업주의가 번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 한국화단은 집단의 소멸과 함께 작가주의 정신이 희박해 지는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0년대 화단을 반추하면서 “작가란 무엇인가?”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매우 긴요한 의제(議題)로 여겨진다.  


<대구현대미술제 4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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