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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숙 / 일상의 단면을 통한 어머니에의 회상(回想)

윤진섭

일상의 단면을 통한 어머니에의 회상(回想)



옥양목 위에 염색 물감으로 그린 황현숙의 그림들은 일상생활에서 모티브를 얻어 내면을 투사한 생활일기와도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보는 사람을 깊은 공감에 젖게 한다. 그의 그림들은 오늘날처럼 소위 뉴미디어에 의해 빛의 강도가 동영상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시각 환경에서, 이처럼 아날로그 방식에 의존하여 자신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수록 이처럼 정겨운 생활세계를 담고 있는 그림들이 반대급부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고향과 같아서 바라볼수록 잊어버렸던 향수를 되살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그가 이번에 발표하는 그림들이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사(獻辭)처럼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가족의 행복을 기도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상기하며 한복, 노리개, 부채, 버선과 같은 소재를 통해 이를 형상화하고 있다.




황현숙이 그린 그림의 기원을 우리의 전통에서 찾자면 신사임당의 그림이 범본이 될 것 같다. 현숙하고 기품이 있는 규중세계를 담담하고도 세밀한 필치로 화폭에 담아낸 신사임당의 그림들은 회화를 정신적 수양의 방편으로 삼았던 사대부 집안 여성들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황현숙은 그러한 맥락에서 현대적 가정의 단면을 화폭에 옮기고 있다.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는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문구, 가구, 책, 목기 등등이다. 이 모두는 가정에서 주부의 손때가 묻은 것들이다. 황현숙은 이처럼 매일 일상에서 접하는 평범한 기물들을 소재로 택해 화면을 구성한다. 다색 염료를 사용하여 세필로 그린 그의 그림들은 따라서 거창하거나 위압적이기보다는 섬세하고 화사하며, 정감적이고,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친근하다. 작가의 감정이 오롯이 이입된 이 다정다감한 생활세계의 단면은 현대의 가정이 주부의 섬세한 보살핌에 의해 유지된다는 은근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그것은 패스트푸드로 대변되는 인스턴트 문화와 여성들의 사회참여로 인한 가사의 소홀함, 핵가족화로 인한 전통적 가치의 붕괴와 같은 현대의 사회문제를 상기시켜준다. 황현숙의 그림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언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그러한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번에 그가 주요 모티브로 등장시키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대표적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어머니 상(像)은 가족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 바로 그것인데, 그가 이번에 소재로 등장시킨 정화수(井華水), 조각보, 버선, 노리개, 한복 등등은 이의 상징이랄 수 있다. 특히 조각보는 대작의 바탕을 이루는 구성의 원리로 사용되고 있어 주목된다.



조각보는 원래 바느질하고 남은 자투리 천을 재생하여 생활용품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이만큼 돋보이는 것이 없다. 그것은 원천이 다른 천들을 한 자리에 모은다는 의미에서 오늘날 회자되는 소위 융합(hybrid)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황현숙은 조각보에서 착안하여 화면을 작고 큰 사각형으로 구획하고 그 안에 다양한 종류의 꽃과 버선, 노리개, 맷돌 등등을 배치하였다. 평면적인 배열을 통해 크고 작은 대상들이 포치해 있으나 그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중시되는 것이 아니라, 고른 시각에서 균형감각을 갖고 묘사하고 있다. 그는 제작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 노작(勞作)을 통해 다소 고전적인 미적 원리를 인용하자면 '다양성 속의 통일(Unity in Variety)'을 시도하고 있다. 그의 이 대작을 보면 사실 소재의 다양함과 크기의 대소(大小)에도 불구하고 고르게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매우 신기한 미적 체험이다. 매우 꼼꼼하고 섬세한 묘사를 통해 각기의 사물이 두드러지면서도 동시에 전체적으로는 고른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특히 바탕을 장식하고 있는 미점(米點)의 묘사는 매우 큰 공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기울인 작가의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붗꽃을 그린 연작은 황현숙의 사실적 묘사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수직의 구성원리를 바탕으로 꽃잎의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붗꽃 연작은 이처럼 사실적 묘사를 바탕으로 화면 자체의 내재적 질서를 꾀한 작품이다. 황현숙의 그림들은 이처럼 대상이 보여주는 현실을 그리되, 독자적인 화면 구성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찾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것은 현실이되 현실이 아닌 것이며, 꿈이되 꿈이 아닌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작가의 마음이 잘 담긴 작품이 바로 정화수(井華水)를 중앙에 배치하고 날짜와 달의 변하는 모습을 담은 대작이다. 그림의 왼쪽 한 구석에 탁상시계를 그려 이 작품의 모티브가 다름 아닌 시간임을 보여주고 있다.


갓난아이가 소녀가 되고, 소녀가 자라 주부가 되고, 주부가 다시 할머니가 되는 과정을 이작품은 시간의 추이를 통해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인생윤회(人生輪廻), 그 세월의 덧없음과 모녀 사이에 흐르는 애틋한 정조(情調)를 생활 속의 소품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황현숙의 근작이 보여주는 세계인 것이다.


윤진섭(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호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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